|
<열린시학리뷰-윤석산, 신덕룡, 정가일> - 계간 [열린시학] 2009년 겨울호
시법으로 엮은 그들의 심상
김 광 기(시인)
윤석산,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황금느티나무, 2009)
신덕룡, 『아주 잠깐』(서정시학, 2009)
정가일, 『배꼽 빠지는 놀이』(시선사, 2009)
장르적 특성에서 보면 단적으로 시(詩)는 형식(型式)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인들이 구사하고 있는 시의 형식은 천차만별로 다양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감정 혹은 정서를 구현하는 나름의 자의적인 방식이기에 시인만이 갖는 개성적인 별개의 시법(詩法)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하지만 시대별로 유행처럼 번지는 몇몇의 시법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그러한 현상이 그렇게 다양하게 비쳐지지는 않는다.
윤석산, 신덕룡, 정가일 세 시인의 시집을 순서대로 읽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각기 개성이 다른 그들만의 시법(詩法)이었다. 처음에는 두드러진 그들의 독특한 시법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보이기도 하였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시선을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창출한 개성 있는 수사(rhetoric)적 힘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런 느낌을 바탕으로 세 시인의 작품을 탐독하며 그러한 시법 혹은 그 틀에서 생성되는 그들의 시적 세계를 조망해 본다.
먼저 윤석산 시인의 시는 그가 ‘자서’에서 밝히다시피 시인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언어에 대한 의미성을 시적심상과 밀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의 시는 그러한 의도적인 접근을 오랫동안 해온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언어의 기능과 구조보다는 ‘말(word)'이라는 의미성을 확보해서 독립적인 심상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닉한 논리가 보이기도 한다. 또 신덕룡 시인의 시는 대부분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듯 그의 시적주행이 전방을 향해 있다. 기존의 서사와 전설이 은닉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의 텍스트 지향성이 앞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단선구조로 직진하는 대부분의 정서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단순하거나 단조롭지만은 않아 보인다. 시인의 시적진행으로 보이는 보폭 또한 예사롭지 않다. 빠른 전환, 또는 다음 행으로 갈리는 행간을 처리하는 시법 등이 그가 제시하는 시적심상의 의미 등과 함께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끝으로 정가일 시인의 시는 돌발적으로 튀는 자유분방함 같은 것으로 보인다. 장난기 혹은 기발함이 가득한 텍스트들이 종횡무진 시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인이 구사한 시어의 보폭인 텍스트의 진법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다. 앞의 행과 뒤의 행의 의미가 어떤 매개도 없이 빠르게 전환되는 것이라든가 또는 앞에 제시된 이미지와 뒤에 제시된 이미지가 어떤 연계성이 없이 돌연하게 배열된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시적 세계는 진지하다. 진정성과 향수(鄕愁) 같은 것이 담뿍 배어 있다. 자유분방함과 자신의 삶을 우려내는 진정성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현상이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1. 혼령이 된 말들의 우주 : 윤석산,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시적구조로 사물성(事物性)을 강화하는 기법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언어의 기능과 구조, 시인의 언어관을 전달하는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이 언어를 매개로 삼고 있는 이상 시적 서정도 어떤 시적 정서나 심상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지적 분석과 그를 통해 얻은 인식의 세계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는 언어를 화자와 청자 간에 전달되는 소통의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담겨있는 의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모든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표현된 언어에 대한 의미성을 발견하려는 깊은 성찰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되기도 하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단순의미로만 상대에게 전달하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 인식의 세계를 담아서 신중하게 시적세계를 구현해서 전달해야한다는 강변의 목소리가 담겨있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시인은 언어의 기능과 구조보다는 ‘말(word)'이라는 의미성을 확보해서 말하고 전달하고 깨우치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세계를 그려서 독립적 심상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철저한 화자 중심의 논리인 듯도 하다. 그렇게 하여 ‘말(word)'로 이루어진 객체로서의 시적 예술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언어 그 이상의 존립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화자와 청자가 소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그러한 연원을 이룰 수 있는 대상들을 발굴하여 ‘말(word)'을 입힌다. 시인이 표면에 드러낸 대상들의 본 모습은 그가 스스로 경계하는 언어 구조의 뼈대이거나 어법이기도 하고 본질적 존재에 대한 상념이기도 하고 음악이나 음악가, 철학이나 철학가, 너와 나 혹은 너와 나라는 관계인식, 사물 혹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 사이에 있는 본연성, 더 나아가서는 말과 말 혹은 ‘말(word)'이라는 그 자체의 본연성 등이다. 시인은 이러한 본연적 사물과 그들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그가 의미구현에 쓰고자 하는 ‘말(word)'이라는 그 자체에까지 의미심장한 ‘말(word)'을 입히기도 한다.
1
사람들은 말보다 존재가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언어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성경 구절 때문만이 아닙니다.
집사람과 제 관계만 해도 그렇습니다.
집사람은 제 이름으로 절 기억하며 만났고
지금엔 ‘남편’이라는 말로 판단하며 삽니다.
그러니까 제 이름을 알기 전에는 전 존재했어도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남편이라는 말이 없었으면
이제까지 아내의 침실을 드나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지금 주방에서 딸그락 딸그락 하는 소리가 납니다.
‘아내’라는 말이 저녁 식사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각 모든 주방에서 나는 딸그락거리는 소리는
아내라는 말들이 내는 소리입니다.
3
우주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초에 ‘나’라는 말이 있어 ‘어둠’이 시작되고,
어둠이 있어 ‘빛’이 시작되고, ‘산수국’도 피고…….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간혹 산수국 숲으로 난
뻐꾹새 우는 숲길을 산책하다가
숲속 빈터, 통나무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습니다.
내가 앉지 않으면 통나무 벤치는 있어도 없습니다.
지금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제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존재의 탄생과 말의 의무」 전문
위의 시에서처럼 대부분의 작품 안에서 시인은 기표와 기의를 아이러닉하게 구사하며 새로운 의미창출을 시도한다. 또한 그 중에서도 대부분은 연속적인 기표의 정렬로 새로운 의미를 담는 용기로 사용하고자 한다. 또 때때로 그 안에 새로 담기는 의미들은 무성화(산수국)처럼 쉽게 풀이할 수 없는 절망의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거나 위 시에서 표현된 ‘통나무 벤치’처럼 서늘하게 그 질료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서정으로 드러나 있다. 이것은 화자의 절제된 욕망의 덩어리거나 혹은 그 안에 깊숙이 내재된 슬픔의 알갱이 같은 것들로 감지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관념 덩어리로 맺혀 있지 않고 끊임없는 서사를 이루며 시의 행간과 행간, 시의 편 편을 통과하며 흘러가고 있다.
“‘너’와 ‘나’라는 말 사이는/너무 아득해서 슬프다.”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나라는 말.” “간혹 헛디뎌/발을 적시며 건너간다.”(「너와 나라는 말 사이」 중에서), “사르트르는 자아를 <홀로 있는 나(en-soi)>와 <관계 맺은 나(pour-soi)>로 나누고, 내 가치는 타자와 맺은 ’관계의 질(質)‘에서 결정된다며 그녀를 자주 가든 테이블 위에 눕혔다.” “그리고 관계의 질을 생각하면서/서른 두 번 째 지는 꽃잎을 덧니가 아름다운 여자로 바꿔보고 있다.” “오늘 오후에는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그녀라는 말을 초대할 작정이다.” “나비들이 날아들기 시작하면/그녀라는 말을 테이블 위에 눕히고 사랑할 작정이다.”(「사르트르의 정원에 대해 상상하기」 중에서), “고흐의 그림을 놓고 세계적인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한 사람은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또 한 사람은 프랑스 미술사가 사피로, 나머지 한 사람은 내가 자주 바보라고 놀리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이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누구 구둔가는 고흐만 알 뿐이다.” “문득 벽에 걸린//고흐의 복제화(複製畵)에서 흙덩이가 떨어진다.”(「‘구두 한 켤레’에 대한 논쟁」 중에서).
시인의 사유가 시행 속을 흐르면서 관념과 관념, 대상과 대상 사이를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막힘없이 경계와 경계 사이를 건너뛰거나 허물면서 흘러가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기조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또는 언뜻 보면 다양한 관점과 보폭으로 돈키호테 식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나 집요할 만큼 기획적인 시적구성의 치밀함이 보이며 외면과 내면이 양분되는 시선으로 각각의 행로로 시의 행간을 관통하며 차갑게 서로 응시하는 인상을 갖게 한다. 시인의 ‘사랑’ 또한 그가 제시한 ‘사랑, 흔들리는 존재에 대한 관찰’처럼 사랑의 의미가 상호 소통되거나 교감되는 것이 아니라 가기만 하거나 오기만 하는, 또는 가거나 오면서 교차하는 양분된 시각의 ‘외사랑’에 대한 진술로 보인다. 시인의 시에서 끊임없이 전달되는 ‘사랑은 관념이 아닌 행위’라는 메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은 ‘소리’만 있고 마음이 가닿지 못하는 안쓰러움을 보게 한다. 제3부에서 제시한 ‘선악에 대한 부질없는 명상들’에서도 선과 악이 양분되며 명시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바라보며 그가 스스로 분별하는 ‘생각과 행동’의 상호인식이 교차되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시인은 ‘긴 잠’을 자며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피상적으로 비치는 역설로 시심을 이루는 그의 ‘말(word)’들은 끊임없이 시공을 건너뛰며 누군가를 깨우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2. 전방형 시적주행, 정신적 황무지의 표상 : 신덕룡, 『아주 잠깐』
스쳐지나가는 시적 정서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를 때 시인은 사유코자 하는 대상들을 머리로 인식하고 가슴에 담는다. 가슴에 담긴 것들은 시인의 가슴에 상처를 내기도 하다가 다시 사유 속에 담겨 깨달음으로 인도된다. 시인은 움찔움찔 가시에 찔린 듯 반응한다. 그러면서 그의 시적 자아는 깨어나는 듯하다. 신덕룡 시인의 대부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듯 그의 시적주행은 전방을 향한다. 기존의 수많은 서사와 전설이 은닉되어 있는 그의 시 텍스트 지향성이 앞을 향해 있는 것이다. 시인의 냉철한 시야에 들어온 다각적인 현상이나 다양한 의미망들은 시인의 시각에서 분해되고 정렬된다. 그러면서 전방 지향적인 시적정서들이 배열되는데, 단선구조로 직진하는 대부분의 정서들임에도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거나 단조롭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시인 스스로 ‘삶은 앞으로만 가다가 멈춰선 곳에서 끝난다.’라고 말하는 역설적 아이러니를 배면에 은닉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은 비의(悲意)적인 요소를 적당한 곳에 묻어두고 관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시인은 슬픔의 한 꼭지라도 손에 들게 되면 크나큰 설움을 감당치 못할 것도 같고, 앞으로만 가면서 쭈뼛쭈뼛 보았던 비의(悲意)들도 정통에서 맞닥뜨리게 되면 조금도 비켜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다. 때문에 시인은 외면상으로는 건재하게 무장하면서 앞으로 더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의 시적진행으로 보이는 보폭 또한 예사롭지 않다. 시행 안에서 쉼표(,) 등으로 처리되는 빠른 전환, 또는 다음 행으로 이어져야할 시행이 연으로 갈려 행간의 여운으로 차분한 느낌을 주다가 다시 빠른 전환으로 처리되는 시법 등이 신덕룡 시인이 구사하는 보폭의 특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쿨럭쿨럭 배꽃 핀다.
이건, 이 꽃들은 살아 있는 자의 멍에다.
혼자서는 결코 벗어버릴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도록
두 팔은 벌려진 채 철사줄로 단단히 묶여
꾸부정한 몸으로
기침하듯 내뱉는 비명이겠다.
위로 솟구치려는 야성은 늘 위태로운 법이어서
고개 드는 가지란 가지 모두 참수 당했으니
발치에 수북이 쌓여갈 터이니
하늘은 퍼렇고 봄날은 간다.
꽃 진 자리마다 또 한 근심 주렁주렁 매달아야 할
늙은 나무들, 공장에 늘어선
튀밥기계 같다.
한평생 달궈져 식을 줄 모르는, 말이 없다.
-「사월」 전문
위의 시 「사월」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로 시작되는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를 연상케 한다. 언뜻 ‘사월’이라는 말이나 시기 자체가 같아서 그렇게 연상이 되는 것도 있지만 내용에서도 「황무지」의 의미와 어떤 부분이 연결되지는 않을까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두 시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그러한 의문은 사라지고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보다도 ‘정신적 황무지’ 「사월」의 이미지가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첫 행의 ‘쿨럭쿨럭 배꽃’이 피는 의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쿨럭쿨럭’이라는 청각적 이미지와 ‘배꽃’이라는 시각적 이미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조화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기침’으로 연상되는 ‘쿨럭쿨럭’의 의미와 ‘기침해소’에 도움을 주는 ‘배’라는 과일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결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적 이미지인 ‘쿨럭쿨럭’과 희망적 이미지인 ‘꽃’이라는 역설적 결합이 만드는 제3의 현상(이미지)이 독자의 시선을 한 번에 끌어당기는 효과를 주고 있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현상들은 행을 거듭할수록 증폭되고 있다. 여러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사월」의 ‘정신적 황무지’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분재(盆栽) 같기도 한 배나무의 의인화된 시적대상이 위태롭게 서 있는 시점에서 ‘하늘은 퍼렇고 봄날은 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행간의 벌림(연 구성)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여백이 주는 공간에 편안한 여운을 느끼는 것보다는 왠지 전행들의 잔인하고 위태로운 이미지들이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시인의 특장적인 시법으로 보이는 이러한 구성법은 마지막 행에서 또 한 번의 의문을 갖게 한다. ‘한평생 달궈져 식을 줄 모르는, 말이 없다.’ 쉼표(,) 다음에 오는 ‘말이 없다’ 사이에는 엄청난 생략이 이루어져 독자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할 곳에 블랙홀 같은 여백을 두고 여백 혹은 수사가 작용되어야 할 곳에는 쉼표(,) 하나로 빠르게 전환시키는 아이러닉한 시법, 시인의 독특한 시법으로 보이는 이러한 장치는 그의 시집 『아주 잠깐』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3. 끝없는 상상력의 메타, 페이소스 : 정가일, 『배꼽 빠지는 놀이』
정가일 시인의 시는 돌발적으로 튀는 자유분방함 같은 것으로 보인다. 시집『배꼽 빠지는 놀이』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이 장난기 혹은 기발함이 가득한 텍스트들이 종횡무진 시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세계는 그렇게 즐겁거나 기뻐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불에 데인 자국의 쓰라림’ 같은 것들이 상흔처럼 펼쳐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 자유분방하게 느껴졌을까를 생각해 본다. 먼저 언뜻 보이는 것이 시인이 구사한 시어의 보폭인 텍스트의 진법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앞의 행과 뒤의 행의 의미가 어떤 매개도 없이 빠르게 전환되는 것이라든가 또는 앞에 제시된 이미지와 뒤에 제시된 이미지가 어떤 연계성이 없이 돌연하게 배열된다는 점이 그렇게 보이는 요소이다. 그것 또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불덩이’, ‘화(火)’, ‘그것을 안고 산으로 치달리고 물속으로 꼬꾸라지’듯이 시적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진술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적 세계는 진지하다. 진정성과 향수(鄕愁) 같은 것이 담뿍 배어 있다.
자유분방함과 자신의 삶을 우려내는 진정성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현상이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생채기에서 얼룩얼룩 묻어나오는 피를 쓱쓱 문지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서 그가 견딘 세월, 어머니, 다사다난했던 세상사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밝아 보인다. 그것은 대상에 전이된 슬픔, 아픔 같은 것들이 다소 희화화되거나 건강하게 삶의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작품 안에서 구현된 건강한 페이소스, 이것이 정가일 시인이 갖는 자유분방하지만 경솔하지 않고 아프지만 병들지 않은 요소가 아닐까 한다.
까마득한 맨발로,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다면 나는 죄가 될까
죽지 않고 왔을 저것이
제 몸 아낌없이 풍장에 내주고 있던 저것이, 밤마다
길게 우는 소리 들린다
수컷 부르는 손짓일 거라고
사람의 발아래 바퀴 아래 암수 엉겨 뒹구는 몸짓일 거라고
눈치 채셨겠지만 참 민망하게도
두꺼비 암수가 밤낮없이 붙어서 이 길을 가고 있었을 것인데
분명 그럴 것인데
원흥이방죽 두꺼비를 보고서야 알았다면
정말 죄가 될까
산길을 걷고 들길을 걷고 아찔한 순간을 걸어야 했던 것
지킴이의 수난은 수컷들의 결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아,
그렇게, 그렇게 산란을 하고
몸 한쪽이 기우뚱
돌이 되어,
-「돌두꺼비 두꺼비 업고 간다」 전문
몽환적으로 비쳐지는 이미지인 ‘까마득한 맨발’이 시선을 끈다. 시간과 공간이 교접하여 제3의 이미지를 생성시킨다. 그것은 마치 업보를 갖고 있는 시인 자신 같기도 하고 어떤 신성한 인물로 구현된 두꺼비의 영물적인 이미지로 비쳐지기도 한다. 또한 현현(顯現)된 대상과 ‘나’라는 화자가 일체화 되는 것 같으면서도 분리된 시적주체의 거침없는 서사가 생성부터 시작된다. ‘눈치 채셨겠지만 참 민망하게도’라는 고전적 내레이션으로 희화화시키는 경쾌함이 자칫 진부함으로 낙후된 죽음과 삶, 교접이라는 등식을 흥미 있게 형상화한다. 나아가서는 죽음과 삶이 교접하여 새로운 삶을 생성시킨다는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스스로 죄라고 여길 정도의 업보 같은 것이 뒤늦게 세상이치를 깨달은 것이라면 ‘산길’ ‘들길’ ‘아찔한 순간’들을 걸어야 했던 것들은 그 스스로 깨달음으로 가는 도정(道程)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보게 한다.
세상사 또한 그 자신의 업보와 같이 ‘이긴 자만이/누릴 수 있는 특권’의 방식으로 점철되고, ‘그렇게, 그렇게 산란을 하고’ 죽음의 형태를 연상케 하는 ‘돌’이 큰 방점을 찍으며 대단원이 종결된다. 하지만 ‘돌’이라는 상징성에 왠지 서사가 종결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우리 전래설화 중에서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내용을 가진 설화가 있다. 또 내용의 결말 부분은 어김없이 주인공이 뒤돌아보면서 돌이 되고 마는데, 위의 시「돌두꺼비 두꺼비 업고 간다」의 마지막 여운도 그렇게 귀결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붙여지는 쉼표(,)는 마치 다시 뒤돌려지는 되돌이표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