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부른 사모곡
-연산군
묘역 앞에서
김
종 훤
하늘은 무심한 듯하나 인간의 생사화복을 섭리하고, 산은 말이 없으나 인간 역사의 애환을 함께한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조선 5백여 년의 영고성쇠를 함께해 왔고, 오늘날 1천만 서울 시민의 허파와 숨통 구실을 하고 있다. 연인불이(然人不二), 곧 자연과 인간은 둘이 아닌 하나로서, 산속에서 어떤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됨은 이런 연유일 터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인 우이령에서 우이암
남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산자락 끝에 토끼 꼬리처럼 비죽이 나온 동산이 있다. 방학동(放鶴洞) 인가에 삼면이 둘러싸이고 뒤쪽은 버스길로 잘린 거북등 형상의
잘 생긴 명당터다. 여기가 조선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이 5백년 동안 잠들어 있는 곳이다.
방학동 네거리에서 우이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왼쪽에 무성한 숲을 이룬 곳인데 길 오른쪽 산자락에는 세종대왕의 둘째 따님 정의공주와 부군 양효안공의 묘가 있어 버스 표지판에는 정의공주묘로 되어
있을 뿐 연산군묘에 대해서는 아무런 표지판이 없다. 처음 찾는 사람은 묘를 지척에 두고도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묘 주변의 시멘트블록으로 지은 허술한 집들을 기웃거리며 물어물어 찾아야 한다. 입구는 큰길 반대편 골목에 있다. 입구의 문은 사립문 형태의 철문인데
자물쇠가 굳게 채워지고 그 안에 간단한 안내판이 있다. 당연히 별로 찾는 사람도 없지만 관리의 편의상
개방하지 않는 모양이다.
철책으로 둘러막은 묘역이 4천3백 평으로 입구 주위는 밤나무,
감나무, 소나무 등이 우람하게 잘 가꾸어졌으나 뒤쪽은 이름 모를 잡목들이 어수선히 우거져
퇴락과 망각의 낙엽더미 속에 고즈넉이 묻혀 있다.
엄연한 왕이었으나 왕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닌 묘이다. 그래서 대군(大君)의 예장(禮葬)에 따라
묘 뒤에는 석물(石物)이 없고 앞에 비석,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었다. 연산군묘 옆에 부인 신씨가 안장되고 바로 아래에
궁인 조씨 묘, 그 아래에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묘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아마 누군가의 배려로 딸과 사위, 궁인 조씨의 묘는 나중에 옮겨
온 듯하다. 일반 서민의 단란한 가족묘 같기도 하다. 출입문을
폐쇄해 놓아 다소 음산한 분위기이나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다섯 가족이 한데 모여 지하에서나마 오순도순 정담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능이 아닌 대군의 묘를 다른 능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큰 불충일지 모른다. 다만 명색이 왕위에 계셨던 분의 묘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쓸쓸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잠시나마 서글프게 할뿐더러 마침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과 연산군의 다음 왕인 이복 동생 중종의 능이 같은 서울 안에 있어 자연히
비교가 된다. 성종과 중종은 강남 삼성동 한복판인 금싸라기땅 7만3천여 평 녹지에 모셔졌다. 바로 선정릉(宣靖陵) 곧 선릉과 정릉이다. 도시인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개방되어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가지고 들어와 먹고 난 후 푸른 자연과 맑은 공기 속에서 쉬었다 가는 복된 지역임에 비해, 연산군의 묘는 너무나 호젓하고 적막하다. 역사의 냉혹한 심판에 따른
인과응보라 할지라도 5백년의 고혼(孤魂)을 떠돌지 못하게시리 봉쇄하듯 사람의 발길을 막음은 저 세상의 넋일지언정 너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연산군이 갓난애 적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길리면서 알게 모르게 어머니의 체취와 정을 그리워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음성과 정을 인지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유모 된 사람이 아무리 잘 양육한다 한들 어머니의 참정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연산군은 아기 적부터 또 청소년 시절에도 자기 친어머니가 없음을 늘 의아해하면서 그 정서상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에 욕구불만과 심적 갈증을 겪어왔다.
더구나 할머니 인수대비의 대쪽처럼 강직하고
서릿발같이 차가운 성품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며 자신도 알게 모르게 마음의 응어리를 형성하여 왔다. 연산군은
할머니를 비롯한 반대파들의 집요한 방해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후 3년 동안은 은인자중 왕으로서의
체통을 지켰다. 그러던 차에 훈구파인 이극돈, 유자광 등의
정략적 계략에 빠져들고,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마시고 죽어가면서 피를 토한 저고리를 본 후 충격을 받아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성질은 포악해지고 주색에 빠지면서 경연도 정사도 멀리 했다. 점점 복수의 화신이 되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충간하는 어진 선비들을 무참히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드디어 연산군 12년(1506)에
중종반정으로 폐주의 운명을 맞게 된다. 강화도 서북쪽 외딴섬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그해 병으로
서거하니 그의 꽃다운 나이 31세였다. 그동안 주색과 원한으로
그의 육체와 영혼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 수명을 다하리만치 소진되었는지도 모른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에 안장되었다가 7년 후인 중종 8년(1513) 부인
신씨의 간청으로 이곳 방학동 산77번지에 이장되었다. 당시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 뒷산의 외지고 호젓한 곳이었다.
5백년이
지난 지금 상전벽해가 되어 묘 앞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양옆은 연립과 단독 주택들이 에워쌌으며 뒤는 큰 버스길이 났다. 버스길로 인해 지맥이 끊긴 감이 있으나, 그래도 아직은 도봉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줄기가 실개천을 이루어 묘역 동쪽 기슭을 적시며 흐른다. 묘역 바로 앞에는 830여 년 된 은행나무가 널찍한 터를 가지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나무 둘레
10.7미터, 나무 높이 25미터의 거수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 그 옆에는 6백여 년 전 파평윤씨
일가의 자연부락인 원당 마을의 식수로 사용되었더 원당샘이 있어, 수려한 산수와 좋은 명당터임을 입증한다. 그러니까 은행나무와 원당샘은 연산군묘보다도 먼저 자리를 잡고 이 명당터를 지켜온 셈이다.
이 은행나무와 원당샘은 연산군의 5백년 핏빛 한을 함께해 오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바래어 사위어졌을 그 한을 달래주는 데 한몫을 했을 법하다. 그 한이 땅밑으로 잦아들어 원당샘에 고였음인지 이제는 마시지 않은 샘이 되었고(지금은 다시 정비하여 식수로 사용), 탄식처럼 하늘에 뿌려지는 그
한을 은행나무가 받아 삭여주다가 힘에 겨웠음인지 쓰러지려는 나뭇가지를 쇠기둥으로 단단히 받쳐 놓았다.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병상에 방치하다시피 하여 죽게 하고, 어머니를 인수대비에게 모함하여 궁에서
쫓겨나게 한 아버지의 두 후궁을 손수 때려죽여 산야에 버리게 했다. 폐비 사건에 연루되거나 방관한 선비
수십명을 살해하는 등 포학무도한 연산군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억제하지 못해
궤도를 벗어나고 만 모정에 눈먼 만행에 다름 아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었으니 궁궐을 피바다로
만들어서라도 내 한을 풀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어머니의 저주와 복수심이 연산군의 영혼을 꽁꽁 동여매, 사무친
사모(思母)의 한이 쌓이고 쌓였다가 뿜어져 나온 피눈물의
흩뿌림이었다.
폐비 윤씨가 핏덩이 어린 자식을 궁 안에 강제로
떼어놓고 사가에서 자식이 보고 싶어 울부짖는 울음소리와 그 한이 하늘에 사무치고 다시 메아리쳐 어린 연산군의 심령에 전달되었으리라는 점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 회포를 풀었더라면 아마 그토록 비극적 종말을 맺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승에서는 풀 길이 없는 모자간의 사무친 정을 순화시킬 방도를 찾지 못해 패륜의 천길 낭떠러지로 치달았던 연산군의
말로는 너무도 안타까운, 어머니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이었다.
용서가 곧 최상의 복수임을 그는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왕도로 다스리라고, 인륜과 품위를 갖춘
군주가 되라고 귀가 아프게 간하는 충신들을 하나하나 죽여 귀를 막았다. 그리고 황음무도한 주지육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하늘의 버림을 받았다. 인심은 천심이라고 인심이 다한 곳에 하늘의 심판이
따르는 법, 죄악은 인간이 심판하지 않으면 하늘이 대신한다고 하지 않은가. 인간이 인간을 단죄하는 영역은 생명을 다치지 않는 범위에서다. 생사
여탈(生死與奪)은 하늘의 영역이다. 옛날의 권력자들에게 생사여탈권이 주어졌으나, 지혜로운 자는 결코
인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악법의 잔재가 남아 있으나 머지않아 사라져야 할 역사의 유물인
것이다. 군도(君道)와
신술(臣術) 등을 기술한 ‘설원(說苑)’이라는 책에 ‘하늘의
뜻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知天者不怨天, 知己者不怨人)’는
말이 있다. 연산군은 이런 가르침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도 무시해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무덤을 팠을
뿐만 아니라 망국병인 붕당의 씨를 뿌리기까지 했다.
중종반정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그는 우리의 역사책에 가장 포악한 군주로 기록된 채 5백년 동안
북한산과 도봉산의 완충지대인 우이능선 기슭 폐쇄된 지역에 말없이 누워 있다.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일은 가슴에 묻어두고 평범한 왕자의 신분으로 조용히 살았더라면 더 낳은 인생이었으리라는 동정어린 시각에
대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다만 그의 영혼은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못다 부른 사모곡을 목놓아 부를 테지만 그것까지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폐쇄된 묘역에서
은은하고 애절하게 폐부를 찌르는 사모의 노래가 우거진 숲 사이로 소슬한 바람이듯 쇠미하게 들려옴은 나만의 환청이었을까.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두 사람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다. 훌륭한 사람에게서는 그 훌륭함으로 나의 본을 삼고 어리석은 사람에게서는 그 어리석음으로
나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행적은 실패한 인간의 표본으로서 우리의 경계를 삼는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연산군 묘역을 어두운 그늘 속에 방치해 놓을 것이 아니라 은행나무터와
원당샘터를 한 지역으로 엮어 작은 공원을 만든 다음 역사의 교훈장으로 꾸며 보면 어떨까 한다. 사적(제362호)으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연산군의 원혼을 세인들과 빈번히 접하게 하여 서로의 이해를 돕고 인간적·정신적 교감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5백년 한을 풀어 주는 방안이 모색되었으면 한다.
하늘의 섭리에 우연은 없다고 한다. 반드시 인과응보가 작용한다는 말이다. 연산군의 슬픈 행적은 우리
역사를 장식하는 한 장의 어두운 삽화로서 하늘의 예정된 섭리였다면,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따뜻한
시각과 인간적인 면에서 규명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10여 년 전에 쓴 글이라 현상황과는 다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