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姜邯贊) 장군..낙성대 (落星垈)
강감찬(姜邯贊. 948~1031) ...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고 시호(諡號)는 인헌(仁憲)이다. 본관은 금주(衿州)로 현재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이다.
이 곳은 강감찬장군이 태어 난 곳으로, 그가 태어 난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 졌다고 하여 낙성대(落星垈)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고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명문 귀족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관직에서는 청백리의 모범이었고 충신이었다고 하였다. 실제 그는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文臣 출신이다.
고려사에는 국난(國難)을 헤친 강감찬장군의 승전기록 뿐만 아니라 그의 신이(神異)한 행적들을 많이 적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의 용모에 관한 것이다. 보통 강감찬의 외모는 키가 작고 추남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의하면 원래는 잘 생긴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날에 여자들로 인하여 큰 일을 그르칠까봐 마마신(神)을 직접 불러 얼굴을 얽게하여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탄생설화 그리고 여러 신이(神異)한 행적들 그리고 그의 빛나는 위업을 기려 무신(巫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최영장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를 구한 강감찬을 기리기 위하여 당대에 사리탑 형식의 3층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근처 생가터에 있었으나 여기에 안국사(安國祠)를 세우면서 옮겨 놓았다.
고려와 거란(契丹) ..시대적 배경
거란(契丹)은 993년(고려 성종)부터 1019년(고려 현종)에 이르기까지 3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민족이 대두하여 中原의 한족(漢族)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고려는 건국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북방민족에 대하여는 서로 대립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고려는 특히 거란에 대하여는 같은 민족인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국가로 여기고 배척하였다. 이에 거란은 942년(고려태조)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을 청하였으나, 태조 王建은 이를 거절하였고, 나아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단정하여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 후 고려의 역대 왕은 이러한 태조의 反 거란정책을계승하여, 정종(定宗)은 거란의 칩입에 대비하여 30만명의 광군(光軍)을 조직하였고, 광종(光宗)은 서북지역에 여러 성을 쌓아 거란에 대한 경계를 엄하게 하였다. 또한 이 무렵 발해의 유민들은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우고 송(宋), 고려 등과 통교하면서 거란을 적대시하였고, 더 나아가 宋과 협력하여 거란을 협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 거란은 배후의 강적인 고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거란국내가 안정되는 聖宗代에 이르러 986년에 먼저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키고, 991년에는 여진족을 공략한 후, 27년에 걸쳐 3 차례 고려를 침입하게 되는 것이다.
거란(契丹)의 1차 침입 ..서희(徐熙)의 활약
993년에 거란은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서북면을 공격하였다. 이 때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西京(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이 나왔으나,고려의 서희(徐熙)는 이에 반대하고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인다.
결국 고려는 宋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을 철수시키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약 280리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강동육주(江東六州)이다.
거란(契丹)의 2차 침입 ..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이 여진족을 몰아내면서 흥화진(興化鎭 ..의주), 용주(龍州 ..용천), 통주(通州 ..선천), 철주(鐵州 ..철산), 구주 (龜州 ..구성), 곽주(郭周 ..곽산) 등 강동6주(江東六州)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서희(徐熙)의 외교적 승리이었다.
이 처럼 강동6주를 차지하여 고려는 군사거점으로 삼으면서 宋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청하는 등 송과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그러지 거란은 이에 큰 불만을 갖게 되고, 더욱이 거란은 강동6주의 전략적 가치를 깨닫고 그 것을 탈환하고자 결심한다.
기회를 노리던 거란 ...당시 고려에서는 정변(政變)이 일어난다.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죽이고, 현종(顯宗)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 난 것이다. 거란은 이를 구실로 1010년에 다시 고려를 침입한다. 그리하여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王은 전라도 나주(羅州)까지 피난가기도 했지만, 거란은 고려王의 친조(親朝)라는 실리도 없고, 그 실현도 애당초 불가능한 강화조건에 만족하고 철수하였다.
이는 강동6주 등 요새를 함락하지도 못 한채 開城에 까지 깊숙하게 들어 온 상태에서 병참선이 차단되어 역습 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의 나주 피신 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물리치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 노력도 성공하여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된다.
그 뒤 거란은 고려가 국왕의 친조(親朝)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강동6주의 반환 요구도 고려에 의해 거절되자 1018년 다시 고려를 침입한다. 3차 침입이고, 강감찬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契丹)의 3차 침입 ..강감찬의 구주대첩(龜州大捷)
1018년 거란은 소배압(簫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王의 親朝를 요구하면서 제3차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 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을 물리치게 되는데....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12,000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城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가두어 둔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은 고려군을 피해 산간지대를 통하여 개성으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강감찬은 추격전과 매복전을 전개하면서 적군을 괴롭하게 되고, 사기가 저하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거란군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교과서에 실린 귀주대첩
이를 추격하던 고려군은 귀주(龜州)에서 전면 포위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적군이 귀주에 이르자 이 곳에 집결해 있던 강감찬 등은 일시에 공격을가하여 적군을 거의 몰살시켰다. 침략군 10만명 중에서 생존한 자가 겨우 3천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귀주대첩 (龜州大捷) 이후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 오니 현종(顯宗)은 직접 영파역(迎波驛 ..지금의 의흥)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 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戰勝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 ... 金으로 만든 여덟가지 꽃 장식)를 머리에 꽂아 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베풀었다.
결국 거란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019년 고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고려는 北方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1029년에 개경(開京)에 나성(羅城)을 쌓았고, 1033~1044년에 걸쳐 전 국경선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였다.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
거란의 제3차 침입을 좌절시켜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강감찬...그는 무신(武臣)이 아니라, 문과에 장원급제한 전형적인 문신(文臣)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기도 하였던 아버지 강궁진으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익힌 강감찬은 남들보다 늦은 36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탄탄대로를 달린다.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을 때에도 모든 조정관리들이 항복을 건의하였지만, 유일하게 항복을 반대한 인물이 강감찬이다.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며 전라도 지방으로의 몽진을 건의하였고, 고려는 곧 국권을 회복하게 된다.
구주대첩을 마치고 최고의 영웅이 된 강감찬..그 후의 행보가 더욱 눈에 띈다. 개경으로 돌아 온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현종은 만류하였고, 강감찬은 거듭 사의를 밝혀 마침내 1년 후에 공직을 떠난다. 물론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잠시나마 門下侍中을 맡기는 하였지만, 그는 사실상 10년동안 野人으로 살았던 것이다.
아마 나라를 구한 英雄이 계속하여 조정에 남았다면 어떤 명목으로든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강감찬은 대전략가인 동시에 정치의 본질을 꽤뚤어 보았던 대정객(大政客)이기도 하였다. 강감찬 "將軍"은 이러한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를 덮을 수 있다.
강감찬의 설화
강감찬이 한양판관으로 새로 부임하였을 때 경내에 호랑이가 많아 관리와 백성이 많이 물려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잠시 생각에 몰두한다.
그는 아전(衙前)을 불러 " 내일 새벽에 삼각산에 올라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려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다음 날 새벽에 올라 가 보니 과연 늙은중이 바위에 앉아 있어서 그를 강감찬 앞에 데려 왔다.
강감찬이 중을 보고 꾸짖기를 ' 너는 비록 금수(禽獸)이지만 또한 영(靈)이 있는 동물인데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해하느냐. 너에게 5일간의 말미를 줄터이니 무리를 인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라. 그렇치 않으면 굳센 화살로 모두 죽이겠다 "하니 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뿐이었다.
이 이상한 광경을 보던 아전이 강감찬에게 영문을 물으니, 강감찬이 늙은 중을 보고 " 본 모양으로 화하라! "하니 그 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한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여 난간과 기둥으로 뛰어 오르니, 그 소리가 밖에 까지 진동하였으며, 아전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강감찬이 '그만 두어라" 하니, 호랑이는 다시 늙은 중으로 돌아가서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다음 날 아전이 동쪽 교외로 나가 살펴 보는데, 늙은 호랑이가 앞장서고 작은 호랑이 수십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 갔다고 한다.
한편 강감찬은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으로도 불려졌다. 어느 날 감식안(鑑識眼)이 뛰어난 중국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여 여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使臣의 눈에는 딱 한사람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는 맨 앞줄에 서 있었는데, 허름한 옷에 키도 작고 얼굴이 못 생겼다. 그렇지만 사신은 불현듯 그 쪽으로 가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 문곡성(문곡성)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몰랐었는데, 여기 동방(東方) 고려에 있으시군요" 라고 말하는것이 아닌가. 바로 강감찬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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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