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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화승총의 세계사(9)
작성자 : 손상익
병자호란과 화승총
만주 도적떼라 업신여겼던 여진족이 12세기 때의 대금(大金)제국을 재현한다며 후금(後金: 1616-1636)을 세웠다. 후금은 척박한 만주 땅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원의 명나라까지 치고 대륙 통일을 넘봤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 대청제국(大淸帝國: 1636-1912)은 그렇게 태어났다.
후금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이 눈엣가시였다. 사르후 전투 이후에도 조선 인조 임금은 향명배금(向明排金: 명나라만 인정하고 후금은 배척하는 정책)을 천명하고 심지어는 후금이 빼앗은 랴오뚱(遼東)반도를 수복하려는 명나라 모문룡(毛文龍)부대를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주둔시키고 원조했기 때문이다.
후금은 조선을 먼저 정리하지 않으면 중원대륙을 차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엉뚱하게도 이괄(李适)의 난으로 만주에 피신한 조선인 잔당을 앞세워 “광해군이 억울하게 왕위를 찬탈 당했다”며 조선내정을 간섭했다. 급기야 1627년 1월에 후금장수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병력이 사루후 전투에서 항복한 조선 원정군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일행을 길잡이삼아 압록강건너 의주를 공격하고 청천강까지 넘었다. 정묘호란이었다.
황망하게 당한 조선 조정은 도원수 장만(張晩)을 내세워 대적했으나 전투로 단련된 만주 기병부대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인조 임금과 조정 대신이 한양을 비우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한양 코앞인 황해도 황주까지 치고 내려온 후금군은 2월 9일 유해(劉海) 장군을 강화도의 인조 임금에게 보내 강화(講和)를 했다.
후금 군이 철군한다는 조건으로 조선 왕실 왕족을 인질로 붙잡아가며, 더 이상 명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후금과 형제나라로 지낸다는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었다. 후금 군은 3월 3일 인조 임금의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잡고 철군했다.
후금이 명나라를 완전히 몰아내고 청나라를 건국했음에도 조선 왕실은 여전히 명나라만 떠받들고 청나라를 오랑캐 보듯하자 못내 괘씸하게 여기던 홍타이지가 칼을 빼들었다. 1636년 12월, 이번에는 10만 대군을 끌고 조선을 침공해 닥치는 대로 조선 백성을 살상하고 두 달 만에 인조 임금을 무릎 꿇렸다. 30만 왜구가 침노한 임진왜란도 7년이나 버티고 물리쳤던 조선이 후금에게 단 두 달만에 무너지는 치욕을 당했다. 병자호란이었다.
청 태종의 10만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군이 지키는 산성쪽 성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질풍처럼 남하하여 12월 12일에 경기도 개성부근까지 진군했다. 인조 임금과 조정은 강화도 피난을 떠나려했으나 미리 알아차린 청군이 양화나루를 막자 12월 14일 야밤에 세자와 조정 중신을 대동하고 조선 군부가 철옹성이라 자랑하던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다.
인조 임금은 도원수와 부원수가 이끄는 13,000여 장졸에게 남한산성 방어를 맡기고 각 도 관찰사에게는 긴급 파발을 보내 근왕병(勤王兵: 임금과 조정을 사수할 병사)을 급히 출진시키라 명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과는 1637년 1월 10일부터 종전협상이 시작됐지만 그 와중에도 김상헌을 위시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격심하게 대립하여 협상은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다.
▲ 백성과 조선군이 함께 싸웠던 병자호란. 남한산성 서문을 방어하는 조선군과
백성의 가슴아픈 역사기록화. 이 그림에서는 정규 조선군은 모두 활을 들었고
백성만 창을 들고 있다. 당시 성곽 방어전투의 일선에 섰던 병사는 화승총수였다.
청군은 남한산성 인근의 망월 봉에 홍이 포를 거치하고 산성내부를 정 조준 발포했고 조선군은 이에 천자총통으로 응사했으나 성능이 떨어지는데다 비축 화약마저 넉넉하지 못해 제대로 된 반격은 할 수 없었다. 우선 대포의 크기와 위력에서 청군 홍이 포는 월등했다. 포신 2미터 15센티에 포구경이 10센티에 달해 쏘아붙인 무쇠탄환은 남한산성 돌 성곽을 직접 타격할 정도여서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월 22일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피난 갔던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인조 임금과 조정대신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1월 30일,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신하의 예’를 올리고 항복했다.
▲ 삼전도비. 반만년 역사에서 이만한 치욕은 일찍이 없었다.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는 서울 잠실의 석촌 호수 수중 30여m 지점이었다. 현재는 송파구
잠실동 47번지 석촌호수 서호 언덕에 세워져있다. 사적 제101호인 비석에는
전서체(篆書體)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란 제목이 적혀있다.
비석 높이 395㎝, 넓이 140㎝.
비문은 몽고 글과 만주 글, 한문으로 적혔는데 조선 학자가 지어 올려 청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다시 고쳐 “청나라 황제의 성은이 하해와 같아서 조선
백성이 은공을 잊지 못한다”는 치욕적 내용이 담겼다. 원래는 인조 임금이 항복
했던 한강변 삼밭나루(三田渡)터에 세워졌으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백성들이 한강물에 버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시절 1913년에 조선
총독부가 건져내어 조선을 조롱하듯 다시 세웠고, 광복을 맞자 한강변 주민들이
비석을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 서울의 홍수로 ‘치욕의 비석’이 다시 땅위로 모습을 드러내 이곳저곳
옮겨다니다가 1983년에야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로
옮겼다. 이후 사학계가 비석이 섰던 자리를 고증하고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욕된 역사지만 후손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 청 태종은 삼밭나루에서 높다란 옥좌 위에 앉았고 그 아랫자리 돌무더기 땅바닥에
인조가 무릎 꿇고 큰절로 충성을 서약했다. 청 태종은 허리 굽히는 절 받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했다. “바닥에 머리 닿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게 하라.” 윽박질렀다.
인조 임금은 한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쿵쿵 소리가 울리도록 이마를 돌바닥에 찧었다.
아홉 번을 그렇게 찧자 머리가 깨져 흘러내린 핏물이 얼굴을 적셨고 곤룡포까지 붉게
물들였다. 치욕의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였다. 사진은 당시 모습을 재연하여 삼전도
비석 옆에 세운 부조(浮彫) 상이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을 '용서'하면 안된다.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이 벌인 만행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였다. 부녀자를 닥치는 대로 겁간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해 혹한 속 남한산성 주변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나라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을 때 백성이 어떤 수모를 당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비극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청군 기마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몇몇 전투에서 조선군 화승총부대는 청군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다. 철원의 김화(金化)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 조선 백성 60만명이 포로로 끌려가 중국의 심양 노예시장에서 팔렸다. 남자 포로들은
농노로 혹은 전쟁에 동원됐고, 여자들은 중국 상류층 족속의 첩과 노비가 됐다.
사진은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이다.
김준룡의 화승총부대
1636년 12월 20일,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은 인조 임금의 다급한 근왕병 소집과 남한산성 출진 명령을 접하고 6,000여 명의 장졸을 급히 조직하여 12월 29일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과 함께 출진했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 벽암(碧巖)과 각성(覺性)이 승병 2,0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해 전라도 근왕병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다음해 1월 2일, 이시방은 남한산성을 불과 백 여리 남겨놓은 경기도 양지에 도착하여 김준룡 부대 2,000명을 선봉군으로 삼아 남한산성으로 진격케 하고 자신은 본대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김준룡은 1월 4일 수원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병참물자를 축적,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청군 양굴리(楊古利) 장수가 긴급히 2천명의 청군 장졸을 광교산 동쪽에 보내 김준룡 부대의 남한산성 접근을 막았다. 그 뒤에 양굴리 장군은 직접 5천명의 청군을 이끌고 김준룡 부대 섬멸 공격에 나섰다. 양굴리는 청 태종의 매부였고 만주벌판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꼽히는 장수로 청군 지휘부에서도 최고위 서열이었다.
1월 5일 양굴리 부대는 김준룡 진영에 화포를 퍼부으며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김준룡 부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1선에 화승총수를 배치한 김준룡은 청군이 다가오면 집중 사격을 퍼부어 전열이 흩어놓았고 그 순간 제2, 제3선의 궁수와 창검 병이 청군의 배후를 기습하는 양동작전을 펼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양굴리는 청군 전 병력을 동원하여 광교산 일제 공격에 나섰다. 김준룡 부대는 진지사수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절대 병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해질 무렵 광교산 동남방을 지키던 광양 현감 최택(崔擇)의 방어진이 무너졌고 그 틈으로 청군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군 침략도와 조선군이
접전을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 김준룡 화승총부대는
발군의 전과를 올렸다.
김준룡이 휘하 병졸을 끌고 급히 광양 현감 진으로 달려가 백병전을 도왔고 그 와중에 화승총수 하나가 양굴리 장군을 저격, 말에서 굴러 떨어지게 했다. 청군 진영은 한 순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김준룡 부대는 사기를 높여 일제 반격에 나섰고 도망가는 청군을 뒤 쫒아 광교산 동쪽 10리 까지 따라가며 총탄을 퍼부어 절반 이상을 사살했다. 김준룡 부대는 화약을 소진한 뒤 수원방면으로 철수했다.
김준룡 부대의 화승총수는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거둔 최대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청나라 지휘부가 조선 화승총 부대를 다시 쳐다보게 만든 전투였고 청국 제일의 장수라는 양굴리를 조선군 화승총탄에 잃은 것에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유림의 화승총부대
압록강을 건넌 청군이 불과 6일 만에 개성까지 내려오자 팔도의 조선 군영이 속속 토벌군(근왕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이 청 태종 10만 군사에 포위 됐던 1637년 1월 26일,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柳琳)의 2,000명 조선군과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이끈 3,000명 부대가 김화에서 합류했다.
평안도 군영의 5,000명 부대가 남한산성으로 이동하려 할 때, 철원·연천·포천 일대에서 강원도와 수도권을 잇는 길목을 막고 있던 청나라 우익군이 알아채고 일부 기병대를 김화로 진격시켰다. 그에 맞선 조선군은 홍명구 부대가 김화의 평야 쪽에 진을 구축하고 제1선에 화승총수, 제2선에 궁수, 제 3선에 살수(창검) 병을 배치하였고 유림은 기병대가 접근하기 어려운 백동산(栢洞山) 고지에 진을 쳤다.
1월 28일 아침 김화에 닥친 청나라 병사는 홍명구와 유림 부대 사이에 진을 쳐 조선군 간 연계를 끊은 뒤 평야 쪽 조선군을 먼저 공격했다. 화포공세와 함께 돌격선두에 1천여 기병을 앞세워 홍명구 부대 주위를 돌며 화살공격을 퍼부어 전열을 무너뜨린 뒤 장창 보병 3천명을 돌진시켰다. 튼튼한 나무 방책으로 두른 홍명구 부대는 서너 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불붙인 수레를 앞세운 청군의 돌진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결국 백병전에서 승리하며 홍명구 이하 3,000명 조선군 대부분이 전사하고 말았다.
홍명구 부대가 전멸하자 청군의 다음 목표는 백동산에 포진한 유림 부대였다. 유림은 제1선에 창검 병, 제2선에 궁수, 제3선에 화승총수를 배치했다. 진지 울타리는 큰 돌을 쌓아놓았는데 청군이 고지를 올라올 경우 그 돌을 굴려 저지할 목적이었다. 청군은 그날 오후 백동산 유림 부대를 포위하고 전면공격에 나섰다.
유림은 청군이 진지가까이 오도록 기다렸다가 한 순간에 돌을 굴려 전열을 무너뜨린 뒤 제1선에 섰던 창검 병을 일제히 돌격시켰다. 배후 공격의 허를 찔린 청군은 허겁지겁 물러나고 말았다. 후퇴한 청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재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도 유림 부대는 차분히 기다렸다가 화승총 사격권 안에 청군이 진입하는 순간 제2선 궁수와 제3선 화승총수가 지휘관 발사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교대 사격을 가했다. 청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고 말았다.
오후 내내 청군의 공격이 계속됐지만 고지를 차지한 유림 부대를 감히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유림은 진영을 재정비하여 일부 병사를 은밀히 진지 외곽에 매복시켰다. 해가 저물 쯤에 초조해진 청군이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유림 부대는 청군이 사정권에 들어오도록 기다렸다가 진지와 매복지 궁수와 화승총수가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청군을 완전히 와해시킨 뒤 후퇴하는 길까지 쫒아간 화승총수가 사격을 가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 평안도 병사 유림장군의 영정.
기세등등하던 청군은 물러갔으나 유림 부대는 탄약과 화살을 모두 소진하여 진지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유림은 부대를 화천 쪽으로 은밀하게 이동시키고 무사히 청군의 관할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림 부대는 매복과 기습, 사거리까지 적을 끌어들이는 화승총 방포전술을 구사하여 승승장구하던 청군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다. 조선 화승총 부대의 우수함을 청군 지휘부에 확실히 각인시킨 전투였다.
유림 장군은 정묘호란 때도 연강방어대장(沿江防禦大將)으로 한강방어선을 지켰으며 명나라 군사가 요동반도 수복을 위해 평안도 철산의 가도에 잠시 주둔할 때도 조선군 주장(主將)으로 지원에 나섰던 경력이 있다.
계속 - (10) 흑룡강의 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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