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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입체파
피카소(1881~1973 스페인의 화가)는 새로운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본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화폭에 담기위해 고민을 하다가 비밀리에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그림을 완성했는데, 이 그림이 바로 ‘입체파의의 탄생’을 알린 그림이다.
입체주의란 주사위를 그린다고 볼 때 전통적 그림은 분명 3개의 면 정도를 그릴 것이다.
화가가 그 주사위 앞에 앉으면 3면이 보일 것이고, 어찌 보면 2면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가 보는 주사위는 마치 평면도를 그리는 것처럼 주사위를 펼쳐 놓았다. 수학 선생님이 정육면체를 설명하기 위해 6개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평면도를 칠판에 그린 것 같이 피카소는 그 평면도를 그리듯 사물을 그렸다.
내게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는 사람은 등과 다리 뒷부분, 팔의 뒷부분, 그리고 뒤통수만 보인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 사람을 마치 주사위의 평면도처럼 펼친 뒤 원하는 부분을 따와서 나열하듯 한곳에 같이 붙여서 그려 놓았다. 피카소의 이런 그림은 세잔을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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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처녀들 - 1907년 피카소 작 아비뇽이란 원래 매춘부들의 집단 거주지로 그림의 여자들도 모두 매춘부다. 5명의 여자들이 앉거나 서 있는 모습의 그림으로,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피카소는 대상을 똑 같이, 혹은 최소한 비슷하게 그려야 제대로 된 그림이라는 강박과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그릴 때, 화가가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마치 평면도처럼 펼친 뒤 원하는 부분을 따 와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
‘아비뇽의 처녀들’의 누드는 일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형태다. 몸통은 유연하고 살을 가진 인간의 몸이 아니다. 원통형이며, 원뿔이며, 원기둥이다. 그녀들의 얼굴은 평면적이다. 가면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가.
-. 빛 : 빛이 물체에 떨어지게 되면 물체의 형태에 따라 다른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그 빛의 양에 따라 또 그림자의 어두운 정도도 달라지 게 된다. 얼굴을 보거나 몸통을 보면 그 빛에 따라 달라지는 몸 위의 그림자들을 다르게 채색했다
-. 기하학 : 그는 빛에 따라 모든 물체는 기하학으로 해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리는 원통이며, 가슴은 원뿔이며, 몸통은 삼각뿔이다. 심지어는 그림의 배경 또한 삼각형이며, 포도를 담은 그릇도 형상이 기하학적이다
-. 토속가면 : 그는 평생 아프리카에 대한 열망으로 살았다. 아프리카의 가면은 표정이 없으며, 선은 굵고, 양감이나 원근감도 서양의 것보다 투박하다. 그는 아프리카의 굵은 선과 투박한 면, 그리고 가면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가면에서 느껴지는 힘을 좋아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의 얼굴도 가면과 같이 그려 넣었다. 가만히 앉아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을 때로는 서서 때로는 낮춰서 보고 그림을 그리던 세잔처럼 피카소는 아예 그리고자 하는 대상 뒤를 관찰하여 한 화면에 펼쳐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괴물 같은 얼굴로 오른쪽 귀퉁이에 앉아 있는 여자는 목이 꺾인 것이 아니라, 뒷모습과 앞모습이 함께 그려진 것이다. 피카소는 ‘그림이니까 가능한’모든 일을 다 하고 싶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우리에게 사람을, 아니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관찰하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관찰자가 움직이면 대상의 입체적인 모든 면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여러 면을 다양하게 관찰하다보면 그 사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면을 가지고 있다. 그 모든 면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경은 왜 손장난하듯 그려놓았을까? 그것은 그림이 더 이상 사진처럼 보일 필요가 없기에, 우리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배경조차도 입체로 관찰해 그린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도 여러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여 조각내서 그린 것이다. 괴물 같은 얼굴은 피카소가 파리에서 살던 시절, 아프리카 등의 원주민들이 만든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탓이다. 그가 그린 저 가면 같은 형상은 지금의 스페인인 이베리아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서양 미술이 이베리아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미술보다 훨씬 가치 있고 훌륭한 것이라생각했지만 피카소는 오히려 그들의 미술이 훨씬 더 멋져 보였다.
피카소는 저 여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깨끗하게 보여도 창녀와 같은 음란함이 있고 창녀지만 아름다운 심성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습은 결코 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이 합쳐져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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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여인 1937년 작
게르니카(Guernica) 1937년작 (작품 크기 350cm * 780cm) : 스페인 내란을 보고 전쟁의 비극을 슬퍼하는 여인을 시각화 한 그림.
게르니카 작품 배경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스페인 공화정이 정권을 잡고 세력이 커지자 기존의 왕당파와 프랑코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부는 독일에게 군사 요청을 하고, 1937년 4월 26일 히틀러는 공화세력의 근거지인 바스크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콘도르 비행단을 보내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폭격은 서너 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불길은 사흘이나 지속되었고, 이 작은 도시 인구의 1/3인 154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의 70% 가량이 파괴되었다. 표면적으로 게르니카 폭격의 명분은 프랑코 장군에 대한 나치의 지원이었다. 그런데 왜 군사 기지도, 주요 도시도 아닌 게르니카였을까? 그 사실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폭격의 실제 목적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나치는 당시 마을 전체에 자동소총이 1정 밖에 없을 정도로 군사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게르니카에 5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 사실은 폭격의 목적이 다른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히틀러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바로 독일 나치가 자신들의 비행기와 폭탄에 대한 성능테스트를 위해 감행한 것이었다.
거대한 벽화의 형상을 띤 이 그림은 사실,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설치되도록 당시 스페인의 정권을 잡고 있는 공화파가 피카소에게 의뢰한 작품으로 파리의 그랑 오귀스탱가에 화실을 마련해 주었으며, 마무리 작업은 도라마르가 도왔다.
원래 이 그림은 게르니카의 사건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의뢰된 것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게르니카의 참상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폭격의 공포와 피카소가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근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표현방법 - 분절된 신체들이지만 이 속에서 격노한 황소와 말, 죽은 아기를 무릎에 놓은 채 절규하는 엄마, 횃불을 들고 진실을 밝히려는 것처럼 보이는 혁명적인 젊은 여인, 부러진 칼을 손에 쥔 채 죽어있는 군인들을 찾아 낼 수 있다.
<게르니카>는 단순히 1937년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폭력적인 야수성과 힘없는 이의 절규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과 파괴, 폭력과 피해자, 동물과 인간, 남자와 여자, 이 세상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힘 센 자의 폭력과 힘없는 자의 울분의 관계로 말이다.
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 입은 말, 버티고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케 하며, 흰색·검정색·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
재료 및 기법 - 벽화로서 구도는 날카로운 불안감과 이질감을 주는 삼각형 구도를 사용했으며
이 작품에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성이 표출되어 있고 광기, 절망, 좌절의 절규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큐비즘의 파괴성과 평면화법, 큐비즘 후에 개척한 신고전주의적인 양감 표현과 왜곡, 그리고 그의 미술적 상징성 등 그때까지의 모든 성과를 모아 표현한 훌륭한 종합이라고 평가된다.
소장 전시 - 미국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 소장 되었다가 스페인의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옮겨져 이 그림 하나만을 위한 큰 방에 두꺼운 방탄벽에 둘러싸여 있다.
13. 추상화(抽象化)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 러시아의 화가, 현대 추상화의 시조).
피에트 몬드리안 (1872~1944 네덜란드의 화가).
구성VI - 바실리 칸딘스키, 1913년 :사물이나 사람 등의 어떠한 형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추상화로서, 칸딘스키는 내용이 사라진 오직 선과 색의 조화만으로 이루어진 그림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에서의 추상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의 모양을 최대한 단순화 시켜보자. 조금씩 서로 다른 것들을 없애고 압축시키면 집은 세모와 네모 모양, 나무는 원기둥 모양에서 다시 줄여 그리면 동그라미와 긴 네모, 사람은 동그라미, 네모 등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다. 색깔도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초록은 파랑과 노랑을 섞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색은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을 섞어 다른 색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색들을 단순화시키면 빨강, 노랑, 파랑이 남는다.
추상화에서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의 기하학적 모양과 빨강, 노랑, 파랑이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본질이 되는 것만 남기고 다른 것들을 생략하는 식으로 그리면 추상화가 된다.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이라는 추상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면 추상화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추상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많이 연구해서 그려야 진정한 추상화가 될 수 있다.
서양화가들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라는 최초의 추상 화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대상을 그릴 때 실물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도록 여러 방법들을 연구하는 데 골머리를 앓아 왔다. 그런 그림 속에는 사람, 물건 혹은 자연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하지만 칸딘스키가 나타나면서부터는 그림 속에 더 이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상을 굳이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드디어 붕어빵에서 붕어가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붕어빵의 맛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칸딘스키는 우연히 자신의 화실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는 그 그림을 그린 기억조차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그림은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거꾸로 세워 둔 것이었다. 엉뚱한 이 상황이 바로 추상화의 시작이었다. 이 이야기는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논란도 있다.
칸딘스키는 반드시 그림이 어떤 대상을 묘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음악이 그렇지 않은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속에는 황제는 없고 멜로디와 리듬만 있듯이, 그림도 오직 선과 색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어찌 보면 그림은 단지 물감과 종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종이에 물감만 발라 놓은 듯한 그 추상화가 바로 칸딘스키의 이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림 속 대상을 그나마 느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 속에 더 이상 대상의 모습을 그려 넣지 않았다. 그냥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의 기하학 도형들을 반복하거나, 나중에는 어떤 모양이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붉고 푸르고 노란 색들의 잔치로 바꿔 버리기도 했다. 선과 색, 그리고 색이 만들어낸 모양과 느낌만을 이야기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칸딘스키의 추상화도 가장 본질이 되는 것만 남긴다는 점에서 몬드리안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림은 ‘선과 색’이 가장 본질이 되며, 그 본질이 되는 ‘선과 색’만으로 보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한 것이다.
-. 피에트 몬드리안. 1911-1912년
붉은 나무, 회색나무, 꽃 피는 사과나무, 구성 10본 - 피에트 몬드리안. 1911-1912년
몬드리안은 나무를 그리면서 그 모양의 본질이 되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단순화하거나 생략하는 방식으로 추상화를 그렸다. 아래의 그림은 순서대로 실제의 대상을 그린 그림이 어떻게 추상화로 변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4. 계몽하고 행동하는 화가들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프랑스의 화가) - 신고전주의
테오도르 제리코 (1791~1824 프랑스의 화가) - 낭만주의
‘화가’하면 엉성한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곰방대 담배를 문 채 붓을 들고 서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세상일과는 담을 쌓고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모든 화가가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세상일에 더 예민하고 생각이 깊어서 부패하고 비만한 권력자들에게 반항한 화가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화가가 살았던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는지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에는 왕의 힘이 막강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프랑스에서는 왕의 힘보다 귀족들의 힘이 더 강해졌다. 이제는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왕의 파티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파티를 주최하고 서로 초대하면서 귀족들의 사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모두 먹고 놀기에 바빠 사회전체는 엉망이 되어 갔다.
나라꼴이 이렇게 된 것은 내 말을 안 듣는 귀족 탓이라는 왕과, 이 모든 혼란은 왕 혼자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는 귀족들, 그 사이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다들 제 밥그릇이나 챙기는 것이 상책이라며 나랏일과 이웃의 일에 무심한 채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이 때 프랑스의 화가들은 왕에게는 “넓은 세상을 당당하게 재패하던 옛 로마를 기억하라.”하고, 귀족들에게는 “그리스인들처럼 국가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또 일반 시민들에게도 “나랏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나와 머리를 맞대며 의논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던 그리스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합리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던 로마의 정신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예쁘고 화려하기만 한 로코코에서 벗어나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고전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다. 따라서 로코코 이후에 생겨난 미술을 신고전주의 미술이라 부른다.
이 신고전주의 미술은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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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 자크 루이 다비드 1784년 작 전쟁에 나가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의연한 모습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완벽하고 멋지다.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고대 역사 속의 영웅적인 장면들을 그려 프랑스 시민들에게 민족에 대한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다. |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신고전주의 최고의 화가였다.
그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 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주로 그렸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로마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떠나는 형제들과 아버지의 모습을 마치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처럼 단단하고 힘차게 그렸는데, 화면의 오른쪽 슬픔에 잠겨 있는 여인들은 누이들과 엄마다.
다비드는 남자는 조국을 위해 앞장서는데, 여자들은 가족이 당할지도 모를 나쁜 일들을 미리 걱정하면서 슬픔에 빠진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요즘 여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비드가 그런 그림을 그린데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불타는 애국심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다비드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비록 죄가 없지만 나라에서 정한 법을 묵묵히 따르는 소크라테스의 모습도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처럼 그렸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국가와 법에 충성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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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87년작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린 그림으로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사약을 받아드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위대하고 엄숙해 보인다. |
그런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그림은 큰 인기를 얻어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려고 몰려왔고, 그림 속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옷차림을 따라 입기도 했다.
한편, 다비드가 활동하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나랏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빚더미에 오른 루이 16세와 사치를 일삼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그리고 많은 땅과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는 귀족들, 헌금으로 교회 재산을 만들어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는 성직자들에 대해 파리 시민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당시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 당에 가입했다. 자코뱅 당은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다비드 역시 그 주장에 동의 했다. 당시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 당에 가입하여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프랑스문화 정책에 중요한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폭력 정치를 하다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왕과 왕비처럼 자기도 사형을 당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를 도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후로 프랑스는 계속 시끄러운 날들을 보내다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다시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다비드는 나폴레옹 밑에서 일을 하였고,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그림을 이용해 국민들이 자신에게 충성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전속화가가 되었는데, 어쩌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왕정을 부활시켜 가까스로 타오르기 시작한 프랑스의 민주화를 주춤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위대함을 유럽 전역에 알렸다는 점에서 존경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자기 개인의 평화와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계몽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붓이나 물감을 뒤로하고 목을 던져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에 대해 “이게 옳은 일이다.”며 외치는 행동하는 예술가였다.
감정과 이성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일까? 사실 감성과 이성은 늘 함께 존재한다. 때로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다가도 감정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반대로 감정에 치우쳐 사는 것 같아도 여러 일들을 이성적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문제는 지나치게 한쪽만 강요할 때 일어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성만 강조한다면 세상은 재미가 없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감정만 앞세우면 상처 받을 일이 너무 많을 것이다.
다비드를 비롯한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이성을 앞세웠다.
그들은 애국심과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영웅의 모습을 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혹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그림이나 조각처럼 대상을 정확하고 알맞은 비율에 맞추어 누가 보아도 멋지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미화시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신고전주의가 프랑스에 맹활약을 하던 시기에 낭만주의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두사 호의 뗏목 - 테오도르 제리코 1819년 : 제리코는 뗏목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끔찍한 날들을 보내던 사람들의 참담한 모습을 어둡고 탁한 색으로 묘사했다. 그는 비참함에 빠진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당시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밤에 여인을 향한 애틋한 마음에서 잦아내는 기타소리로 연상되는 로맨틱 한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아픔, 고통, 분노, 고독, 슬픔 등, 모든 것을 주제로 삼았다.
신고전주의는 개인의 이런 감정 하나 하나를 그리는 것에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낭만주의 화가들은 맑았다가 벼락을 치며, 갑자기 비를 뿌리는 거칠고 변덕이 심한 자연을 그리는가 하면, 분노와 슬픔이 느껴지는 잔인한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를 개시한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아주 유명하다.
이 그림은 실제로 있었던 프랑스 군함 ‘메두사 호’의 침몰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민을 갔다. 그런 이민자들을 태운 메두사 호가 세네갈로 향하던 중에 암초에 부딪혀 바다에 가라앉게 되었는데, 그때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약 400여명으로 구명보트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영화에서는 여성, 어린이, 노약자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태워 구출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했다. 먼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 선장과 직책이 높은 선원 등 250명이 구명보트에 올랐다. 나머지 하급 선원들과 승객 150명은 급하게 만든 허술한 뗏목에 올라탔는데, 처음에는 구명보트와 150명의 사람을 태운 뗏목이 밧줄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은 자신들만 살겠다며 밧줄을 끊어버리고 그 곳을 탈출했다.
부서진 배의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뗏목에 몸을 실은 남겨진 사람들은 무서운 폭풍우와 한낮의 뙤약볕과 싸워야 했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다. 그런지 12일 만에 구조된 사람은 겨우 15명 뿐으로, 더러는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으며 버틴 그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가까스로 구조된 이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은 나머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그림은 우울하고 지친, 그리고 시신을 뜯어 먹고 난 뒤의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음침한 분위기가 바탕의 탁한 색상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게다가 이 그림에서는 영웅을 찾아볼 수 없다. 깃발을 쳐들고 구조를 기다리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그림을 보면 “아 정말 처참하다! 저게 뭐야?” 라는 감정이 앞선다. 그림의 배경이 된 사실을 알면 더 끔찍하다. 제리코는 뗏목 안에서 벌어진 처참함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감상자에게 전율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이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만 살겠다며 가엾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명줄 인 구명선과 연결 줄을 끊어 버렸다는 것과, 또 부패한 정부와 관리들이 실력도 없는 자를 선장 자리에 앉혀 사고를 나게 한 것도 알게 되었다.
신고전주의의 대가 다비드와 낭만주의의 아버지 제리코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호소하거나 없는 자가 불공평하게 당하는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다비드는 지나치게 개인주의로 변해가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만 하지 말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이기심을 억누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애국과 충성심, 그리고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한 것이다.
그에 비해 제리코는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정치인들과 자신의 살 길만 찾는 지식인들이 “무조건 희생해라 조국을 믿어라!”라고 떠드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국가 전체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리코의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낭만주의 화가들은 서로 자신의 사상이 옳다며 부딪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리려고 했다. 그것을 신고전주의자들은 이성으로 낭만주의자들은 감성으로 이해한 것이다.
15. 장 프랑수아 밀레 (1814~1875 프랑스 화가) 의 ‘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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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 1857~1859년 작 하루 일을 마치고 교회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드리는 부부를 그렸다. 밀레가 그린 풍경화 속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은 이 처럼 평화롭고 아릅답다. 성실히 일하고 노력하는 이들이야말로 신화 속의 신이나 영웅들 보다 더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미술관 두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세느강을 사이에 둔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을 이야기 한다.
강 북쪽의 루브르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의 고전 미술, 중세,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미술, 그리고 이후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강 건너 남쪽의 오르세 미술관에는 쿠르베의 그림과 모네, 마네 등의 인상주의 미술을 포함한 19세기의 많은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이나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옛 왕궁이었던 루브르 미술관의 멋스러움과 아름다움에 감탄 한다. 또한 왕궁 앞의 초현대식 유리 피라미드도 너무 멋있다.
루브르 미술관은 워낙 규모가 커서 그 내부를 제대로 보려면 1년이라는 긴 시간도 부족할 정도라 한다. 그만큼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브르의 겉모습을 둘러본 뒤 미술관 안의 몇몇 뛰어난 작품을 골라서 감상하곤 하는데, 그 가운데 꼭 봐야 할 작품으로 누구나 손꼽는 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그린 ‘모나리자’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이다.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다빈치는 많은 연구와 발명에 몰두하느라 정작 그림 그릴 시간은 많지 않았는데 그의 그림 실력을 아깝게 생각한 왕과 많은 귀족들은 그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하는 게 소원이었다.
그 때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1세는 다빈치 처럼 위대한 인물을 자기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나라의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여 그를 불렀다.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편안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었고 그 고마움에 대한 인사로 왕에게 ‘모나리자’를 선물하였다.
세월이 흘러 어떤 이탈리아 사람이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훔쳤는데, 그림을 그린 다빈치도 이탈리아 사람이고, 그림 속 여자도 이탈리아 사람인데 왜 프랑스 땅, 루브르에 그림이 있느냐는 것이 이유로, ‘모나리자’ 때문에 루브르가 세상 사람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미술관이 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런 루브르 미술관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오르세 미술관에는 ‘만종’이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만종’은 한때 우리나라 시골의 이발소마다 복제품이 걸려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 1939년 복잡하고 시끄러운 기차역이 다른 장소로 옮겨진 뒤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84년 건물을 개조해서 지금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바로 ‘만종’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종’은 저녁에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뜻한다. 그림 속 부부는 아마도 힘든 농사일을 하는 모양이다. 고단한 하루가 저물 무렵,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밀레는 바르비종파 화가로 알려졌는데, 바르비종은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 마을이다.
이 곳은 당시 산업화로 탁해진 파리의 공기에 질린 많은 사람이 전원생활을 꿈꾸며 몰려간 곳이다. 바르비종에 모인 화가들은 파리의 살롱에서 그다지 인정하지 않던 풍경화를 주로 그렸는데, 말이 전원생활이지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풍경화만 그리던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했다. 밀레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떤 때는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마음에 내키지 않는 그림을 그려 팔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 그대로 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밀레는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자연 속에 늘 농부의 모습을 그렸다. 사람이 없는 풍경만을 그리기 보다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을 그림 속에 등장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자신의 집에 걸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밀레가 살던 시대에는 화상들이 화가들의 그림을 산 다음 높은 가격으로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되팔곤 했다.
밀레의 그림을 사들인 화상은 밀레를 선전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밀레를 ‘위대한 농부의 화가’라고 소개하는 일이었다. 화상의 말에 따르면 밀레는 가난한 농가에 태어났고 바르비종에서 어렵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농부들과 매우 친했으며, 그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어쨋거나 농민화가라는 칭호를 받으며 잘 나가던 밀레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정치인들이 밀레가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면서 그들을 부추겨 정부에 발발하는 세력이 될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모든 일에 간섭하려 했다.
그러나 화상이 뭐라고 말했건 간에 밀레는 제법 부유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고생 없이 자랐고 농사일은 거의 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시골 마을로 내려와 살아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곳 농부들과 사이좋게 지내지도 않았다. 바르비종 마을의 농부들은 밀레는 도시에서 내려온 좀 깐깐하고 말수 적은 화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밀레가 살던 시대의 프랑스는 많은 지식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고 뜻하지 않게 죽기도 했다. 그런데 밀레는 시골에서 조용히 아름다운 자연이나 그렸을 뿐이다.
농민들의 모습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본인 스스로 밝힌 대로 그들을 위해서 라기 보다 단지 그림 속 주인공이 늘 영웅이나 신화 속의 신들인 것이 싫어서 농부를 그렸을 뿐이다.
가볍게 생각하면 밀레는 남들이 나라와, 민족, 정의를 위해 피를 흘리는 동안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이나 그린 천하태평의 예술가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에 못지않은 일을 해냈다.
밀레가 가난한 농부를 그림 속 주인공으로 그림으로써 세상의 중심에는 귀족과 영웅이 아닌,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앞에서 말한 쿠르베도 밀레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때 밀레의 ‘만종’은 돈 많은 미국인에게 팔린 적이 있었다. 그때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격분했고,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보다 못한 프랑스의 알프레드 쇼사르라는 사람이 그림을 팔 때보다 몇 십 배 비싼 돈을 지불하고 다시 사 와 루브르 미술관에 기증했고, 나중에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덕분에 이제는 프랑스 하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예술을 사랑하고 또 자기 나라 미술가에 깊은 애정을 가진 나라로 생각하게 되었다.
밀레의 그림이 있어서 더 유명해진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가 있어서 더욱 멋있어진 파리, 그 도시를 보기 위해 몰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프랑스를 부러워한다.
16. 삶은 곤궁했으나 그림을 사랑한 화가들의 고독하고 처절한 삶
-. 이중섭(1916~1956)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화가들은 자신이 사는 사상과 기법에 맞춰 그림 그리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킨다.
그렇다 해서 화가들이 단순히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만을 고민하는 게 아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도 늘 생각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문학 작품에서 자신의 삶을 들려주듯 화가들도 자신만의 아픔이나 슬픔들을 그림을 통해 이야기 한다.
화가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화가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
유난히 아프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잘 그린 특이한 그림인 것 같지만,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나면 그림을 대하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중섭의 그림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얼핏 보면 행복한 아이들과 함께 있는 한 가족의 평온한 나들잇 길 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이 사실은 뼈에 사무치는 아픔과 그리움으로 완성된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삶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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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는 가족 - 이중섭 1954년작 :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엽서그림이다.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워 따뜻한 남쪽나라로 함께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다. 평화롭고 즐거워 보이는 이 그림에는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화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중섭은 그리움을 안주 삼아 눈물을 술처럼 마시며 산 사람이다.
이중섭은 일제시대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그림 실력이 뛰어나 미술 선생님의 도움으로 서양 그림을 배웠다. 그런 그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는 조선 땅을 차지한 일본인의 만행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문화까지 없애 버리려 했다.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일부러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이용한 그림을 그렸다. 뿐만 아니라 졸업 사진첩을 제작하면서 일본에 반항하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가 취소당하는 등 일본인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이중섭이 다니던 학교는 비록 일본인의 간섭을 받기는 했지만 조선인의 학교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여 그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학교 방화범으로 몰린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에 불이 나면 일본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타서 그 돈으로 최고의 학교를 다시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서 몇 명이 모의를 한 것이다.
이중섭은 그 모의에 참여는 했지만 실제는 친구 한 명이 혼자 일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중섭은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 했다. 다행히 이 상황을 파악한 선생님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로 결정하여 이중섭은 벌을 면했다.
이중섭은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선보다 선진국이었던 일본으로 건너가 더 발전한 문화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일본에서 이중섭은 뛰어난 그림 솜씨로 일본 미술협회에서 연이어 상을 받는 등, 일본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그때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마사코라는 일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잠시 일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목말라 갔다.
방학 동안 마사코에게 보낸 그림엽서를 보면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2년여간 이중섭은 연인 마사코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했다. 마침내 1945년 광복되기 3,4개월 전 마사코가 온갖 고생 끝에 조선으로 건너와 그와 결혼식을 올리고 첫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이후로 이중섭의 삶은 이상하리만큼 꼬여 갔다.
후에 두 아이가 태어나 잠시나마 행복을 되찾는 듯 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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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제주도 풍경 - 이중섭 1954년경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그림으로, 비록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던 제주도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고 있다. |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까지 피난을 갔다.
그 고된 시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닷가에 나가 게와 물고기를 잡아 끼니를 해결했다.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선생님 그림에는 게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죠?” 라고 물을 때, 그는 웃으며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그나마 가족이 함께 있던 그 행복한 시절에 가장 많이 먹은 게 게였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너무 많이 잡아먹은 게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라고 답했다.
당시 이북에서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남한으로 피난 온 그의 삶은 고되고 힘들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병이 들고 말았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던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이를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심했고 전쟁 상태라 일본은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썼고 그 틈에 마사코는 두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혼자 남은 이중섭은 그 이후 지독한 외로움과 가난에 치여 살아야만 했다.
그 외로움을 풀 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그림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화지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지인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친구들이 힘을 모아 그를 일본으로 보내어서, 생이별 후 딱 한번 일본을 방문해 짧지만 애틋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새롭고 특이한 그의 그림 세계를 인정해 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직후라 그의 그림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선뜻 큰돈을 내고 살 사람조차 없었다.
혼자 남은 이중섭은 이후 지독한 외로움과 가난에 치여 살아야만 했다.
도화지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지인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여러 친구들이 힘을 모아 그를 일본으로 보내어서, 생이별 후 딱 한번 일본을 방문해 짧지만 애틋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새롭고 특이한 그의 그림 세계를 인정해 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직후라 그의 그림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선뜻 큰돈을 내고 살 사람조차 없었다. 골방에 누워 “그림만 팔리면, 그림만 팔리면”이라고 되뇌며, 가족을 조선으로 데려오는 꿈을 꾸던 이중섭은 결국 정신분열증까지 앓다가 굶주림과 병으로 쓸쓸히 죽어갔다.
이런 그의 삶을 알고 난 후 그림을 보면, 그림 속 아이들이 아무리 즐거워도, 그림 속 남자가 아무리 태평스러워 보여도, 그림 속의 여자가 아무리 다소곳해 보여도 모두 슬퍼 보인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평온은 결국 그림 속에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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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지화 1950년작 : 6.25 사변으로 남으로 내려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물감과 도화지 살 돈 조차 없어 담뱃갑 속의 은박지를 뾰족한 것으로 긁어내는 방법으로 은지화를 그렸다. 이중섭의 많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은지화 작품에서도 아내와 두 아이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 황소 1953년작 : 평소 소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이중섭은 가끔 우직하고 성실한 소를 우리 민족에 빗대어 그리기도 했다. 화난 소는 마치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에 대해 격분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처럼 보인다.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 프랑스의 화가)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소외된 사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성인이 된 뒤에도 키가 152cm 밖에 되지 않는 곱추였다.
로트레크는 프랑스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승마와 사냥, 그림 그리기를 즐기는 멋쟁이 아버지와 인내심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둔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어린 시절 사고로 넘어져 두 다리가 자라지 않는 관절쇠약증이라는 병에 걸려 멀쩡한 뼈마저도 약하게 되어 등까지 점점 굽어 곱추가 되었다.
병 때문에 몸이 이상하게 변한 그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림 속으로 숨어 버렸다.
침대에서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93년 : 가난에 찌든 두 여인이 힘든 하루의 일을 끝내고 단잠에 빠져 있다. 로트레크는 불쌍하고 가여운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곤 했다.
로트레크는 파리의 술집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그의 눈에는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들에게 손가락 받는 일을 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특히나 가여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녀들의 모습이나 불구가 된 채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로트레크는 아예 허락을 받고 술집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 시절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가 ‘침대에서’다. 얼핏 보면 2명의 남자가 잠든 것 같지만 사실은 두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하루 종일 술을 나르고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며 테이블과 바닥을 청소한 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는 잠이 들었는데 머리 모양이 꼭 남자 같다.
그 시절 파리에서는 여자들의 곱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드는 일이 많았다. 가난한 그녀들은 머리카락마저 잘라 팔아야 했던 것이다. 전혀 예쁘게 그리지 않은 그림이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그림 속 그녀들이 단잠을 푹 잤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 정도로 애틋하다.
로트레크는 파리 사람들이 즐겨 찾던 오늘날의 연예인 공연 무대와 비슷한 카바레의 모습도 자주 그렸다. 노래나 춤, 연기 등에 뛰어난 스타들이 카바레의 무대에서 공연 하며 손님을 모았고 텔레비전이 없던 그 시절은 주로 입을 통해 스타들의 소식을 접하곤 했다.
카바레 관계자들은 요즘의 광고처럼 로트레크를 통해 자신들의 공연 소식을 포스터로 제작해 선전하기도 했다.
로트레크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물랑루즈를 위해 많은 양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흔히 미술을 구분할 때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미술은 순수미술이하고, 광고나 디자인 등 상업적인 용도의 미술을 상업미술이라 한다. 로트레크의 포스터 제작은 이런 상업 미술 발달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로트레크는 포스터건 순수한 그림이건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특징을 잡아 단순하고도 간결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가끔 그는 여자 가수나 무용수들을 아름답지 않게 그려 항의를 받기도 했다.
로트레크는 사람을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미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그린 물랑루즈의 모델 가운데 라 굴뤼라는 가수 겸 무용수가 있었는데, 라 굴뤼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닌 예명으로, ‘먹보’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한창 시절에 그녀는 통통한 매력으로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는 많이 먹는 습관 때문에 살이 너무 쪄서 무대에서 퇴장당하고 말았다.
물랑루즈에서 나온 라 굴뤼는 시장 바닥을 떠돌며 천막을 쳐 놓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 로트레크는 그녀를 위해 무대에 세울 작은 칸막이에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것도 무대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그녀의 요청으로 급하게 그림을 그렸다. 잘난 척하는 화가 같았으면 시간이 촉박한 그림은 아예 그리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급하게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수준이 떨어질 것이고 훗날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정 하나로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려 주었다. 이것은 그가 카바레 사람들을 단순히 그림의 모델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염려하고 격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리를 떠도는 보잘 것 없는 라 굴뤼였지만 그 우정 덕분에 그녀는 로트레크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 속에 남아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로트레크는 귀족인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미 가족들에게는 그의 몸이 불구인 것만으로도 큰 상처였는데 술집이나 카바레를 떠돌며 그 곳 여자들 그림이나 그리고 있으니 집안 망신을 시킨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겨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늘 역부족이었다. 괴로운 정신은 그를 병들게 해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한 로트레크는 서른 일곱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몸을 가진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그림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살았던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로트레크와 그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람들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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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라 굴뤼 - 1895년 작 일자리를 잃고 쫒겨난 라굴뤼의 거리 공연을 위해 급하게 완성한 그림이다. 로트레크는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정을 소중히 간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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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루즈의 라굴라 - 포스터 |
-. 김정희(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
삐뚤어진 집에 살아도,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신의를 지킨 자를 위하여 그려준 그림.
“잘살 때나 곤궁할 때나 변함없는 그대의 정이야말로 세한송백의 절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 ‘세한도’에 적힌 글귀 가운데 하나다.
세한도 - 1844년작 : 김정희는 자신이 힘들 때 위험을 무릅쓰고 의리를 지켜 돌봐준 제자 이상적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잘살 때나 곤궁할 때나 변함없는 그대의 정이야말로 세한송백의 절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부분 착하게 성실하게 살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살았지만 그 참뜻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의 행복만을 좇아 이기적으로 산 것도 아닌데, 왜 세상은 그리도 가혹할까? 이럴 때는 정말 세상이 싫어진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작지만 소중한 우정과 깊고 따뜻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들이었다.
그는 사대부의 양반집 자손으로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에서 앞선 문화를 배우고 돌아온 깨인 인물 이었다. 게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 참판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냈다.
시와 학문에 능하고 그림과 서예에도 남달리 뛰어났던 그는 누가 보아도 부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일이 술술 풀리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당쟁으로 서로 싸우다가 엉뚱하게 불통이 김정희에게로 튄 것이다. 그로 인해 김정희는 9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던 김정희의 분노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쩌면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하나 둘 자신의 곁을 떠나는 이들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절에 찾아와 우정을 다짐하던 이들이 그가 제주도에 있는 9년 동안 무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사람 그의 제자였던 이상적은 달랐다.
이상적은 역관으로 오늘날 외교관과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직업상 중국의 북경을 자주 오가면서 구하기 어려운 귀한 책들을 구해서 수시로 김정희에게 보내주곤 했다.
귀양 간 사람들은 죄인이었고 또 위험한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었으므로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나라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던 시절에 이상적의 입장에서 보면, 책을 구해 김정희에게 보내는 행동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은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김정희는 감사의 마음으로 그에게 ‘세한도’라는 작품을 주면서 “잘살 때나 곤궁할 때나 변함없는 그대의 정이야말로 세한송백의 절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글을 그림 속에 적었다.
세한송백은 한글로 풀어쓰면 ‘차가운 겨울날의 소나무와 잣나무’라는 뜻이다.
피카소나 세잔이 원근법 등을 무시하고 사진처럼이 아닌 그림다운 그림을 그린 것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의 동양화를 보았다면 아마 놀라서 책상에 머리를 찧지 않았을까? 김정희가 그린 그림을 보라. 앞부분의 선과 뒷부분의 선이 맞지 않아서 어설퍼 보이기까지 한다.
무엇이든 비슷하고 정확하고 혹은 똑같아 보이게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나무들은 서양 사람들처럼 색을 넣는다거나 밝은 부분은 밝게 어두운 부분은 어둡게 꼼꼼히 그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붓의 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신비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진 나무를 보면 김정희는 필요한 곳은 정확하게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또 나름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 것이다.
“동양화가 더 낫다. 서양화가 더 낫다”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동양 사람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대상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사실주의적 그림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저 검은 선과 하얀 여백으로 점잖고 여유가 묻어나는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사실 주의적 그림을 좋아했다.
서양에서는 19세기가 거의 지나서야 그런 규칙들을 깨기 시작했지만 사실 동양화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버렸던 것이다. 김정희의 찌그러진 집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억울하며 고통스럽기까지 한 자신의 삶을 초라하고 일그러진 집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기품을 잃지 않는 나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바른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선비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이상적은 그 다음 해 북경으로 가 중국에서 그림이나 글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 앞에 스승이 보내 준 그 그림을 펼쳐 보이며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정에 감탄하며 시문을 남겼다. 시문은 현재를 말하면 인터넷 댓글 정도라고 하겠는데 그것 보다는, 좀 더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해 글을 지어 붙이는 것을 말한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댓글을 달아 ‘세한도’를 펼치면 그 길이가 약 10미터에 이른다.
이상적의 스승에 대한 사랑은 김정희로 하여금 “세상 참 잘 살았소.”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한 사람인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영웅도 떠나 사라졌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그 깊은 정은, 오래오래 남아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삐뚤어진 집에 살았어도 세상 모두가 그를 버렸어도 김정희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 구본웅(1906~1953) - 세상에 대한 지독한 사랑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유명한 글은 소설가이며 시인이었던 천재 이상이 썼다. 이 말은 남과는 다른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가졌지만 시대가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아 결국 꿈을 꺾을 수 밖에 없는 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다. 고흐가 이런 유에 속할 것이다.
이상은 자신을 포함한 몇몇 천재 예술가들의 고단함을 그와 같은 말로 표현했다.
겉보기에는 살아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박제 상태, 이상이 살던 시대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였던 때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천재는 당시의 뛰어난 우리 민족 예술가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천재 이상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이가 구본웅이라는 화가다.
그의 인생은 어떤 면에서 프랑스의 화가 로트레크와 비슷하다.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만 마루에서 떨어져 한평생 등이 굽은 채로 살아야 했다.
사고로 몸이 불구가 된 것도 서러운데 그가 가고 싶었던 경기중학교는 그의 신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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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초상 - 구본웅 1935년
구본웅이 그린 절친한 친구 이상의 초상화다. 그는 보통의 초상화와는 달리 친구 이상의 모습을 실물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구본웅은 탁하고 거친 색과 선으로 어둡고 힘든 식민지 시대를 이겨 나가는 한 천재의 자존심을 표현하고자 했다. |
그의 입학을 거부하는 바람에 구본웅의 인생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구본웅은 어쩔 수 없이 경기중학교를 포기하고 경신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그림 실력을 우연히 발견한 교장 선생님 쿤스씨는 구본웅에게 그림을 익히고 배우도록 권했다.
구본웅에게 교장선생님의 격려는 그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큰 사건이 되었다.
이후 구본웅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았다.
조각부터 시작한 그는 스물한 살 때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얼굴 습작’이란 작품을 제출해 입선했다. 그러나 그는 회화로 방향을 바꿨다. 어쩌면 온 몸을 써야 하는 힘든 조각보다 그림이 그에겐 더 잘 맞았는지도 모른다.
다음 해 그는 일본 유학을 꿈꿨지만 역시 신체적 이유로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몸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외국생활은 힘들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서양에서 들어온 여러 가지 미술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미술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하여 이론과 실기에 모두 능통한 실력자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상당히 주목받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일본을 통해 배운 서양 미술을 식민지 조선 땅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조선인 대부분이 일본인들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천재 이상과 또 다른 천재 구본웅이 힘들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구본웅이 그린 그림들은 터지기 일보직전의 풍선과 같이 누르면 누를수록 격렬하게 저항했다.
구본웅은 하늘은 파란색, 얼굴은 살색 그림자는 검은색이라는 당연한 일종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고 그 억눌린 풍선과 같은 자신의 마음을 화폭에 담았다. 이런 그림을 표현주의 그림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워 보이거나 진짜같이 보이는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독특한 마음이 담긴 그림이다.
표현주의 그림의 특징은 사물의 겉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감상자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구본웅의 그림에서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구본웅은 삐뚤어진 집을 통해 자신의 아픈 삶을 조용히 그려낸 김정희와 온통 구불구불하고 거친 선과 눈부신 색으로 화면을 뒤덮으며 자신의 격렬한 삶을 그려낸 고흐처럼, 때로는 불안하고 어둡고 그러면서도 거친 선과 색으로 자신의 험난한 삶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그가 식민지 조선 땅에서 느꼈던 예술가로소의 분노와 정상적이지 않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의 그림은 결국 세상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하지만 분노는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감정이다. 분노는 ‘사랑의 폭발’과 같은 말이 될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없다면 분노도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구본웅의 분노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목마른 애정과도 같다. 구본웅이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하게 세상을 살았다면 과연 그런 그림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험난한 세상을 끝까지 미워하며 침묵한 채 포기한 듯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구본웅은 그림 속에서 때론 거칠고 난폭해보이지만 ‘세상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그렸다.
17. 살바도르 달리(1904~1989 스페인의 화가) - 꿈 속 세계를 그리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무엇을 그렸을까?
전시장에 가면 화살표를 많이 본다.
사람들은 그 화살표가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화살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에도 그런 것이 있다.
얼핏 보면 풍경이나 인물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숨은 뜻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림 속 물건들은 겉모습과는 다른 뜻이 담겨져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강아지는 충성, 백합은 성모마리아를 뜻한다. 이런 상징들을 알고 그림을 보면 그냥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대체로 무시한다. 일반적으로 꿈은 들쑥날쑥하고 정확하지도 않고 황당하다. 그러므로 별 가치 없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프로이트라는 정신 분석학자가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내놓은 뒤부터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꿈의 해석’은 인간이 꾸는 꿈의 의미들을 조목조목 연구한 책이다.
이 책은 이제껏 의미 없다거나 있다고 해도 별 가치 없다고 생각하던 꿈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좀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꿈의 세계를 그리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꿈 속 풍경 뿐 아니라,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그리고자했다.
‘이성’은 건강한 상태의 우리가 세상에서 정해놓은 규칙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깨어 있는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인간이 이성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꿈도 그렇지만 어딘가 낯선 장소를 갔는데 처음인데도 한 번쯤 와 본 듯하거나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예전에 그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 느낌들 속에는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서 이성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처럼 그려냈다.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해볼 수 있다. 또한 현실에서 너무나 강한 억압 때문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꿈속에서는 자유롭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현실의 나는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지만, 나도 잘 몰랐던 또 다른 무의식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런 무의식을 그림으로 그렸다.
우리는 그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화가 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하고 싶었던 것, 하지 못해 마음 아팠던 것,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놓았던 불만과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하진 않다. 꿈의 해석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니까.
기억의 고집 - 살바도르 달리 1931년 : 사진처럼 정교해 보이지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달리가 실제의 상황이 아닌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그림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기억의 고집’을 보면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서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생생하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은 현실의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풍경들로 이뤄져 있다. 특히 축 늘어진 시계를 일상에서 만나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계, 곧 시간은 가장 쓸모 있는 것과 동시에 우리를 가장 억압하는 것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해가 뜰 무렵에 일어나고, 해질 무렵엔 저녁을 먹고, 깜깜해지면 잠을 잤다.
달리는 늘어진 시계를 그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늘 정확함만을 강요하는 시간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시간이 휴식을 취한다면 우리 모두 그만큼 쉴 수 있을 것이다.
달리의 그림 속 풍경은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실은 전혀 볼 수 없는 세계다. 그 세계는 역시나 꿈처럼 이해될 듯 말 듯 아리송하다.
달리는 꿈 속 같은 장면을 사진처럼 자세하게 표현했다. 얼핏 보면 진짜 풍경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림 속 내용은 사실 말도 안 된다. 꿈이 그렇다. 달리가 그린 그림처럼 꾸고 있는 동안 너무나 선명하고 진짜 같지만 그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것을 보면 달리가 얼마나 인간의 꿈을 그림으로 잘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해석이 될 듯 안 될 듯 굉장히 정확한 것 같지만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꿈의 세계를 포착하여 그림으로 표현 하였다.
달리는 괴짜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친구들 앞에서 벌레를 잡아먹기도 했고 기자 회견장에 삶은 가재를 머리에 이고 나온 적도 있었다. 또 대학에서는 우유 통에 발을 담근 채 강의를 하기도 했다.
자신의 아내가 된 갈라에게 와이셔츠 깃을 자르고 가슴 털과 젖꼭지가 나오도록 구멍을 낸 뒤 수영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겨드랑이에 파란 물감을 묻히고 빨간 꽃을 귀에 꽂고는 사랑의 고백을 했다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런 고백을 받아준 그의 아내도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그의 행동들은 관심받기 위한 유치한 장난쯤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모두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된 모습이라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달리는 무척이나 성실했다.
그는 자신이 꾼 꿈을 잊지 않고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 늘 잠자는 머리맡에 그림 도구를 준비해 둘 만큼 철저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만나면서 무심히 넘겨 버리는 꿈의 세계를 더욱 철저히 기억하고 또 그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