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 뺨치는 ‘컬처코드’가…
기사입력 2009-06-29 02:59
경기 여주군 세종대왕의 영릉. 봉분 뒤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27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는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조화된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여주=윤완준 기자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10가지 비밀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들여다본다.》
1.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3.조선왕릉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 동아일보 ‘숨쉬는 조선왕릉’ 시리즈 보기
4.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이다.
5.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6.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7.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8.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9.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제의 위용을 드러낸다.
10.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로 몰아넣었다.
윤완준 기자 - 동아일보
“형태-무늬 시대따라 달라… 조선문화 결정체”
기사입력 2009-06-29 02:59
세계유산 등재 숨은 주역 이창환 교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하나만 따도 온 국민이 기뻐합니다. 세계문화유산은 ‘문화 올림픽’에 비유될 수 있죠.
조선왕릉이 40기이니 금메달을 40개나 딴 셈입니다.
이제 조선왕릉은 단지 왕들의 무덤이 아니라 조선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사 뒤에는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53·조경사·사진)가 숨은 주역으로 활약했다.
2005년부터 등재 신청을 위한 학술연구와 회의, 2008년 등재 신청서 작성,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세계유산의 등재 가치를 평가하는 기구) 실사단에 왕릉의 가치를 보여주는 일 등
그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등재 신청서 중 핵심 가치로 평가받은 △조선왕릉을 죽은 자의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의 진입공간으로 구분한 것
△왕릉 입구에서 봤을 때 자연 지형과 정자각(제향공간)이 절묘하게 봉분을 가려
신비감을 더하는 절묘한 경관 등은 이 교수의 연구 결과다.
그의 연구 덕분에 조선왕릉의 경관과 구조가 조선의 문화적 철학적 결정체로 인정받았다.
그는 “조선왕릉은 어딜 가나 비슷해 보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석물의 크기, 정자각의 형태, 석물에 새긴 무늬 등이 시대에 따라 다채롭다”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동아
조선왕릉 ‘500년 숨결’ 세계가 함께 지킨다
기사입력 2009-06-29 02:59
40기 세계문화유산 지정
조선왕릉의 가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데 걸린 시간은 15분여에 불과했다.
27일 오전(한국 시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장.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평가하는 비정부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조선왕릉에 최고 등급인 ‘등재 권고’ 평가를 내린 사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5분의 설명 이후 호주 등 4개국 위원의 지지 발언이 이어지자 마리아 세군도 위원장은 “모두 조선왕릉의 가치를 인정하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심의를 끝내겠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었던 문화재청 채수희 서기관은 28일 “논란이 되는 유산의 경우
3시간 이상 심의가 이어질 때도 있다”며 “조선왕릉은 위원들의 지지에 힘입어 15분 만에 끝났다”고 말했다.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랐다.
500년 동안 지속된 왕조의 무덤이 고스란히 보존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로써 한국은 종묘 창덕궁 경주역사유적지구 등 8건의 세계문화유산과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등 1건의 세계자연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조선왕릉은 경기 일대와 강원 영월군에 조선시대 27대 왕과 왕비,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능 40기가 남아 있다.
왕의 무덤이지만 폐위돼 대군묘로 조성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사, 건축양식, 미의식, 생태관, 철학이 담긴 문화의 결정체로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경관 때문에 ‘신(神)의 정원’이라 불린다. (본보 2008년 7월 23일∼10월 8일 ‘숨쉬는 조선왕릉’ 10회 시리즈 참조) 조선왕릉 40기 전체에서 매년 제례가 이어져 왕릉이 박제된 옛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왕릉의 조성 과정 관리일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의 수준 높은 기록문화도 보여준다.
특히 2007년 한국을 찾은 ICOMOS 관계자들은 “도심 속에서 개발 압력을 견디고 녹지가 이렇게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 세계유산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수도권 일대 조선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만3067m²에 이른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의 복원, 보존 관리 의지를 세계유산 지위의 유지에 중요한 요소로 평가하고 있어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된 조선왕릉의 원형 복원이 과제로 떠올랐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7일 등재 결정문에서 왕릉 주변 개발 완충 지역 내 개발의 가이드라인을 만들라고 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7일 세비야에 파견된 한국대표단(단장 이건무 문화재청장)에 축전을 보냈다.
조선왕릉 40기 세계문화유산 지정… 내달 12일까지 무료 개방 문화재청은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해 7월 12일까지 서울과 경기, 강원 영월군 일대 조선왕릉을 무료 개방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