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
김은영
며칠 전, 나에게는 한 해에서 가장 신경 쓰이며 큰 행사인 시아버님 제사를 치렀다. 한 번도 조부 제사 참례에 빠진 적이 없던 아들이 이번에는 오지 못했지만 시어머니를 모시고 소박하게 제를 잘 모시고 아버님을 추모하는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이야기를 빌리면 아버님 장례에 전라도에서 전 가족이 직접 오셔서 조문하고 따로따로 부조금을 낸 외가 친척이 있었다.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올 만큼 가까운 친척은 아니라 의아해 했는데 거기엔 그때엔 남편도 몰랐던 사연이 있었단다. 아주 오래 전, 외가 작은댁 아버님께서 중한 병에 들리셔서 대구에 있는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오셨다가 그만 돌아가시게 돼버렸다고 한다. 그 당시엔 전라도가 대구보다 의료시설이 갖추어 있지 않아 급히 대구로 오셨는데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모시고 전라도 익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구급차도 그다지 없던 때라 시신을 마치 살아 계신 듯 꾸며 택시로 모시고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아버님께서 직접 하셨다고 한다. 행여 기사분이 꺼려 할 것을 염려해서 마치 살아 계신 분을 모시고 가듯 안고, 가끔 말도 붙이는 것처럼 하면서 익산까지 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댁에서는 너무도 고마워서 아버님 부고를 받자 먼 거리를 가족이 모두 달려오신 것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그런 분이었다.
시이모, 시삼촌, 그리고 남편의 이종사촌들까지 시댁에서 머물렀던 분이 많았다. 한 며칠 쉬다가 간 것이 아니라, 아예 몇 달, 몇 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을 먹이고 재우고 한 시어머니도 대단한 분이지만 처가 식구들을 기꺼이 머물다 가도록 하신 아버님은 더 대단하신 분이다. 늘 친인척의 화합을 바라고 그 일을 실천하신 아버님다운 행적이었다.
행여 당신의 조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차편도 어렵던 시절에 버스를 타고 먼길에도 문병을 다녀오시고 직장도 직접 주선해 주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집안 구석구석 다독이고 화합을 시키시려 애쓰시는 모습을 나 또한 목격했었다. 아버님 작고 후에 남편 사촌과의 거리도 다소 소원해지고 보니 아버님의 빈자리는 더 커 보인다.
내게도 늘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시어머니와 가끔 갈등이 있어 속앓이라도 할랴치면 아버님은 슬며시 위로를 해주셨다. 사회생활을 시작해 정신없는 며느리 대신 아이들을 병원에 데리고 다녀주시기도 하고, 손자들보다 바깥 모임을 더 좋아하신 시어머님을 대신해서 손자들을 예뻐하고 잘 돌보아 주셨다. 말씀이 없으시고 근엄하시지만 어렵지는 않았던 아버님, 손자들도 할아버지 손잡고 짜장면 먹으러 가던 때를 그리워하며 꿈에라도 뵙기를 바라고 있다.
아버지를 산소에 모시고 돌아오는 장의차 차창에는 벚꽃이 성글게 흩날리고 있었다.
친정엄마와 우리 삼 남매에게 아버지는 늘 애증의 대상이었다. 어릴 때는 아침 드시는 아버지 어깨에 타고 놀 정도로 내게 애정을 듬뿍 쏟아주셨으며 늘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 낭만에 대해 들려주시는 아버지였다. 중학교 운동회 날 라면땅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학교를 오신 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
중고이긴 하지만 일제 커다란 카세트 녹음기를 가져오신 날, 삼 남매를 나란히 앉히시고 경기병 서곡을 들려주시며 긴 설명을 하시기도 하고 아침 밥상에서는 빅토르 위고의 명언으로 일장 훈계를 하셨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늘 무기력하셨다. 남들은 큰돈을 번다는 전기공사업을 세 명의 전공을 두고 하셨지만 우리는 늘 가난했다. 그래서 친정엄마의 삶도 힘들었고 우리 삼 남매도 일찍 자신의 처지를 알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우리들의 길을 열어주려 하셨지만 현실은 늘 아버지를 배신했다.
어느 날 새벽 김창옥 강사의 다큐를 보았는데 그분 또한 아버지는 애증의 상대였다. 물론 아버지보다 더 많은 갈등을 안고 계신 분이었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 잠도 잊고 보고 있었다. 내용 중 청각 장애인 아버지의 소원인 귀 수술을 앞둔 병원 장면에서 난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휠체어에 앉아서 들리지 않는 의사 입술을 보는 그분의 눈과 얼굴 표정. 두려움과 불안으로 두리번거리는 커다란 눈동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졌다. 그때만 해도 그리 빨리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박서방이 속 썩이면 돌아오라던 말씀. 그 말씀이 그립다.
내게 유전자를 주신 아버지 그리고 법적인 아버지. 두 분은 참으로 닮아있는 삶을 사셨지만, 성품은 참으로 정반대셨다. 두 분은 서로를 좋아하시고 잘 통하셨다. 지금은 저 하늘에서 두 분은 만나셨을까? 한 분은 장구를, 한 분은 노래를 하시며 좋아하시는 약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