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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라져가는 그러나 살아 있는(!)
오세인
여기 첫 시집을 낸 두 시인이 있다. 이달희 시인은 등단 40년 만에 낙동강시집을, 박경희 시인은 등단 11년 만에 벚꽃 문신을 세상에 내 놓았다. 등단한 지 늦어도 4~5년이면 첫 시집을 출간하는 요즘의 추세에 비하면 참으로 더딘 걸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두 시인이 느리게 디뎌온 온 걸음걸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들은 ‘고향’인 ‘농촌’의 풍경과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두 시인은 어찌하여 ‘농촌’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2000년대 이후 ‘미래파’라는 이름으로도 다 묶일 수 없는 다양한 실험들이 시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정’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정’에 대한 크고 작은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더불어 오늘날 ‘서정’으로 표상되는 ‘시적인 것’의 발생적 기원이 ‘도시(적 삶)’에 있다는 암묵적 합의가 도출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논쟁 이후 ‘농어촌(의 삶)’은 시적 관심의 영역에서 점점 더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실 대부분의 기성 시인 및 신인들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거나 도시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삼고 있으며 문단의 쟁점이나 주된 흐름 또한 잡지사나 출판사가 있는 도시와 그 주변에서 형성된 지 오래이기도 하다.
허나 문학이 그리고 시가 입 없는 자나 소외된 자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일이기도 하다면 지나칠 정도로 도시에 편중된 우리의 시는 그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사라진, 사라져가는, 그러나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 그들의 삶을 시적 순간으로 고양시켜 ‘지금, 여기’로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오늘 다루고자 하는 이달희 시인의 낙동강시집과 박경희 시인의 벚꽃 문신은 소중하다. 한 시인은 ‘낙동강 시편’을 통해 사라진 고향의 풍경을 달빛처럼 은은하고 맑은 언어로 복원해 내고, 다른 시인은 충남 보령의 구수하고 걸쭉한 사투리를 통해 농촌의 삶을 생생한 현재로 그려낸다. 두 시인의 시집에서 우리는 굴곡진 역사와 고된 삶에서 받은 상흔을 품고 살았던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1. 차갑게 아프고 맑게 그립다
- 이달희, 낙동강시집(서정시학, 2012)
문학 작품에서 ‘강’은 오랫동안 ‘역사’의 표상으로 사용되었다. 신동엽의 금강과 신경림의 남한강 그리고 김용택의 섬진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달희 시인의 ‘낙동강 시편’은 서사성을 주축으로 역사의 굴곡과 그에 휩쓸린 민중의 삶을 그려낸 세 시인의 시와는 조금 다르다. 물론 시인 역시 강을 식민지와 전쟁의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으로 그려낼 때가 있다. 허나 그가 형상한 낙동강은 대개의 경우 그곳에 깃든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는 생활의 공간이다. “돌도끼를 만들고” “고기 잡고 사냥하고” “빗살무늬 토기도 만들어 놓고” “춤추며 노래”(「강가의 오막살이-낙동강(洛東江) 14」)하는 곳. “강가에서 태어나 아금바금 살다가 속절없이 죽어서 돌무덤”이 되는 곳. 먼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촐한 살림살이”의 터전이어 온 곳. 그렇게 시인은 강가에서 펼쳐졌던 일상의 풍경과 함께 강에 깃든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빚어낸다.
이달희 시인의 ‘낙동강 시편’이 “낙동강의 역사성과 서정성을 반영”(최동호, 「낙동강의 모래알처럼 빛나는 서정시」, 시집 해설)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심층으로부터 삶의 일상적 풍경을 건져 올리는 시선 덕분이다. “스무 마리”로부터 “조금 뒤쳐져 힘없이 끼웃끼웃/ 따라가던 한두 마리” 기러기를 바라보는 “차갑고도 맑은” 시선.
강 마을
긴 긴 겨울밤에
얼어붙은 강물 위로 날아가던
저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는
희디흰 달빛의 시였다.
싸늘한 삭풍 속에 북쪽 하늘로
끼륵 끼르륵, 끼륵 끼르르륵 끼륵 ……
시옷 자를 그리며 서럽게 날아가던
스무 마리 눈물의 시.
조금 뒤쳐져 힘없이 끼웃끼웃
따라가던 한두 마리는
한 줄기 고드름 같은
차갑고도 맑은
시였다.
- 「기러기의 詩-洛東江 12」 전문
“얼어붙은 강물 위로 날아가던” “기러기들”은 “大寒날/ 얼어붙은 낙동강을/ 홀로 건너가시던 할머니”(「낙동강-洛東江 1」)이며 “강을 건너 오가던” “흰옷 입은 사람들”(「수산나루-洛東江 23」)이다. 시인은 “명주수건으로 두른/ 사천년의/ 그 忍從의 시린 추위”를 “희디흰 달빛의 시”로, “스무 마리 눈물의 시”로 그려낸다. 그 눈물이 흘러 “한 줄기 고드름”처럼 맺힌 “차갑고도 맑은 시.” 하여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할머니”와 함께 “얼어붙은 낙동강”을 건너간다. “마른 갈밭을 헤치는 회리바람”과 “불꽃처럼 확확 타오르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시인은 낙동강에 깃든 생명은 사람이나 새나 그 “싸늘한 삭풍”을 맞아야 비로소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그 부침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고된 삶이 시적 순간으로 고양될 때에야 비로소 생생한 오늘로 되살아난다고. 마치 “강의 젖줄”을 먹고 자란 “뭍 새들”이 “울음을 삼키며/ 강의 끝자락을 입에 물고” 날아오를 때, 강이 “새가 되어 날아가기 시작”(「乙淑島에서-洛東江 34」)하듯. 새를 품어 길러내는 강과 강을 품고 날아오르는 새. 이렇게 이달희 시인의 ‘낙동강 시편’에서는 “무수한 강의 영혼들이 활활 깃을 치며/ 모래섬 위로 갈대밭 위로/ 날아오른다.” “차갑고도 맑은 시로.”
오래 침묵하던 시인이 낙동강의 주변 풍경과 “무수한 강의 영혼들”에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오십여 년 세월을 돌아 곡강에 가보니” “그 시절 그 마을”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저 강물만 흐르”(「곡강에 가서-洛東江 31」)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라진 마을’과 ‘여전한 강물’ 사이에서 노년에 이른 시인은 역사 속에 깃든 지난 시절의 삶을 되짚는다. 그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꿈꾸는 듯 흐린 눈길”로. “큰 함지박을 이고 가던 아주머니”와 “암탉을 품에 꼬옥 안고 가던 소년”을, 그리고 “낡은 자전거를 끌고, 입담배를 물고/ 바삐 가던 그 아재”(「수산나루-洛東江 23」)를 역사의 심층에서 불러내 구체적 일상의 풍경 속에 머물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하여 강 건너로 번지는 것은 노을이 아니라 시인의 그리움. 풍금을 치던 “여자아이의/ 꽃 물든 손톱, 복숭아 꽃빛”(「노을-洛東江 25」)으로, “멀리 강물 위로 흔들리던/ 그리운 그 등불 빛”(「낙동강 소금배-洛東江 10」)으로 그리움은 번지고 또 빛난다.
시인에게 유년 시절의 낙동강 풍경이 그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굴곡진 역사의 마디마디에는 강에 깃든 사람들의 아픔이 서려 있다. 그 마디마디를 짚을 때마다 선연한 아픔이 “고요히 흐르던 내 안의 강물 소리를/ 토막토막 자르며”(「낯선 악기-洛東江 20」) 울려온다. “깡통과 막대, 철사 같은 것으로 만든” “상이군인”의 “낯선 악기 소리”로. “밤이면,/ 넓은 강가 모래밭을 헤매는” “미친 아저씨들”의 “노랫소리”(「사막의 길-洛東江 18」)로. 꿈에까지 “시커먼 굉음을 뿜으며/ 뒤따라왔”던 “삐이 이십구 소리”(「고무다리-洛東江 17」)로. 이 모든 소리의 울림이 서정적 순간으로 빛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아픈 역사의 격랑에서 “강 건너 뱃사공 집 어린 소녀”(「홍수 끝나고-洛東江 6」)의 죽음을 건져 올릴 줄 알기 때문이다. “내 안의 강물 소리를/ 토막토막 자르며” 울려오는 아픔들을 다만 “강변 모래톱에/ 꽃고무신 한 짝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네.”라고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힐 때 “차갑고도 맑은 시”가 태어난다. 하여 이달희 시인이 그려낸 낙동강의 풍경은 차갑게 아프고 맑게 그립다.
2. 환하게 웃고 환하게 아프다
- 박경희, 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
박경희의 벚꽃 문신은 시인이 고향인 충남 보령에 살면서 보고 들은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농촌 사람들의 삶을 시적 대상으로 삼았을 때 시인의 가장 큰 고민은 그것을 미화(美化)하지 않으면서 시화(詩化)하는 일이었으리라. 자신의 언어를 버릴 때 미화의 욕망도 함께 사라짐을 알기에 시인은 그들의 언어를 빌려 말한다. 구수하고 걸쭉한 사투리로 전해지는 그들의 삶. 마치 사설과 같아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물론 거기에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그의 언어와 함께 틈입해 들어가 있다. 시인의 언어는 그 사설을 시적 순간으로 끌어올린다. 때로는 따뜻한 그러나 때로는 사실 그대로이어서 차가운 순간으로.
「입동(立冬)」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노부부만 남은 집의 풍경을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노부부에게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만큼 시들어가는 고통은 오래 지속된다.
시든 국화만 설렁설렁하는 고랑 가까이
죽어가는 개 한 마리와
할매 끌어안고 사는 할배
풍 걸린 할매 데리고 죽으러 들어갔던 저수지가 깡, 말랐다
쩍쩍, 갈라지는 게 어디 저수지뿐인가
욕창 난 할매 엉덩이 닦아줄 때마다
풀풀 날리는 똥 가루가 누렇다
(…)
질질, 질긴 목숨 줄처럼 끊어지지 않고
떨어지는 진물 흥건하다
문지방 너머 힘겹게 눈만 감았다 뜨는 개가 멀뚱거리고
두 목숨이 저승 문턱을 두고 앞서라 뒤서라 한다
허물 한 겹씩 벗어질 때마다
문풍지 앓는 소리
달리다가 미끄러진 다람쥐만이
마당을 쥐었다 편다
- 「입동(立冬)」 부분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운명이지만 노년의 부부에게 그것은 삶의 일부로, 아니 전부로 여겨질 때가 있다. 하여 바싹 말라 갈라지는 것은 일상화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그들의 시간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시듦의 시간. 언제 올지 모르는, 아니 어서 오기를 바라는 순간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지루한 날들. “진물”처럼 “질질” 더디 흐르는. 남은 것은 다만 “힘겹게 눈만 감았다 뜨는” 일. “문풍지 앓는 소리”처럼 가늘게 신음하는 일. 느려지고 가늘어지다 끝내 “풀풀 날리는 똥 가루”처럼 누렇게 지는 일. 그 정지와 정적을 향해 흘러가는 시공을 가로지르는 다람쥐. 다람쥐는 노부부가 한때 머물렀던 생의 시공을 차지한다. 미끄러질 때에야 비로소 환하게 살아나는 달리기로, 그 시공을 “쥐었다 편다.” 도래하지 않은 죽음이 주름진 시간의 흔적으로 잠시 빛날 때, 남은 생이 다시 아프게 펼쳐진다. 멈춘 듯 다시 흘러가는 시간. 더딘 노년의 일상. 다람쥐처럼 노년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시인은 그들과 함께 오래 아프다.
박경희 시인의 시에서처럼 농촌 인구의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자녀들을 대처나 읍내로 보낸 노인들. 남편을 먼저 보낸 할머니, 혹은 그 반대. 시인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걱정보다는 남아 있는 노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노인들은 “저 아래 저수지 쩍쩍, 우는 소리에” “괜스레 벽에 걸려 있는 새끼들 사진”(「소한(小寒)」)을 처다 보기도 하지만 고향을 떠난 자식들은 “땡감 씹은 얼굴로 문을 연 지 오래”(「입동(立冬)」)인, 그곳에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시인의 시선은 부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곳에 실재하는 노년의 일상에 가 닿는다.
겨울이 올 무렵의 농촌에서 노년의 일상은 밭에 나가 지푸라기나 콩대를 태우고 감을 따는 것과 같은 소소한 일들의 연속이다. 시인은 노년의 일상과 놀이에서 발생하는 다툼에서 그들이 살아 있음을 발견한다. 감을 따다가 “밥 세끼 먹고 아궁이에 불만 처넣었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라는 할머니의 잔소리에 “화통을 삶아 묵었나 목청이 자래 질거리 넘어 북망산까지 가겄구먼”(「11월」)이라며 대꾸하는 할아버지. 그 일상적인 말다툼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지막 연. “도랑에 떨어진 감만 뻘겋게 성질나 있다.” “성질”이 난 “감”처럼 “뻘겋게” 살아 있는 노인들. 마누라는 콩 농사를 잘못 지었다고 집 안팎에서 바가지를 긁어댄다. 성질이 난 남편이 콩대를 태우다 말고 마누라를 향해 날리는 “주먹쑥덕 한 방”(대설(大雪)」)의 시원함. 일을 작파하고 겨우 “지나가는 개새끼 붙잡아놓고” 하소연하는 데서 터지는 웃음. “앉은 자리가 묏자리”인 노인들도 윷판 앞에서는 “잡아라 엎어라 뒤집어라, 씨부랄” “욕지거리”(「고양이」)를 내뱉는다. “할매들” 그 소리를 듣고 던지는 질펀한 농. “니 불알 내 불알 큰 불알은 누구 거냐.” 시인은 그 걸쭉한 “욕지거리”와 농에 “불콰한 햇살 뒤집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 순간의 풍경 속에서 “봄볕”에 나온 “고양이”처럼 “따사롭게” 살아나는 “할매들.” 이렇게 박경희 시인은 소소한 다툼을 통해 농촌 사람들을, 그들의 삶과 감정을 생생히 살아 있는 것으로 그려낸다. 하여 우리는 박경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환하게 웃고 또 환하게 아프다.
이달희 시인의 낙동강시집은 품이 넓다. 시인의 연륜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시는 사라진 것들을 품에 안고 강물이 흐르듯 흘러간다. 아픔마저 가라앉힌 채 면면히 흘러온 삶이 달빛 같은 시인의 언어로 은은히 빛난다. 박경희 시인의 벚꽃 문신은 생생하다. 시인은 가족과 이웃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환하게 때로는 아프게 되살려낸다. 노년의 일상 속에서 포착해낸 시적 순간이 구수하여 따뜻한 언어로 때로는 담담하여 아픈 언어로 환하게 빛난다. 두 시인의 시집에서 농촌은 풍요로운 향수의 대상도, 지향해야 할 어떤 것이 남아 있는 ‘오래된 미래’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근원적 세계도 아니다. 이미 사라진 과거이자 사라져가는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생생한 ‘지금, 여기’의 일부이다. 두 시인이 앞으로도 오래 ‘지난, 여기’를 맑고 환하게 그러낼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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