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世盛期, 특히 12세기에는 경제의 팽창 - 농업혁명과 도시의 건립 - 과 함께 중세유럽에 전형적인 정신생활, 문화양식도 開花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시토 수도회로 대표되는 허다한 개혁교단의 출현을 보게 되었으며, 기독교적 사유방식과 행동윤리가 더욱 내면화되었다. (개요 10 참조) 한편 성직자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古典의 연구가 다시 일깨워 졌으며, 도시적 배경에서 知的活動의 중심으로 대학이 세워졌다. 대학에서는 당대의 일급지식인들이 신학과 철학적 사유방식을 세련되게 발전시키고, 복잡해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로마법이 연구·교수되었다. 미미하게나마 그 이전 시기와는 달리 "개인"에 대한 자각도 싹트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활발해진 일련의 정신적 활동을 "12세기 르네상스"(Charles Homer Haskins)라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인문주의(Humanism)적 정신활동과 개인에 대한 각성은 당시의 종교적 열정과 자주 결합하였다. 이런 풍토에서 개혁교단의 활동이나, 대학의 지적운동, 나아가 13세기 스콜라철학의 융성으로 이어지는 중세적 지성운동의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 정열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편 속인사회에도 새로운 활력이 넘치게 되었다. 경제의 팽창과 상업의 확대, 십자군운동의 영향으로 유럽인의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그들 보다 선진된 비잔틴과 아랍문명과 접촉하는 밀도와 빈도도 확대되었다. 한편 군주국을 비롯하여 도시의 자치정부가 정비되면서 識者能力을 구비하여 일종의 관료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력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사회에 서서히 부와 지식이 축적되면서, 좀 더 고도화된 문화적 욕구가 발생하고, 이에 부응하는 문화적 개화는 당대의 문학작품, 건축을 비롯한 조형예술, 음악 등등에 흔적을 남겼다.
카롤링왕조의 왕들, 특히 카알대제는 소위 카롤링朝 르네상스라고 알려진 문예운동을 주도했다. 이는 제국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식자층을 양성하고,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성직자들의 자질을 유지하려는 정책적 배려와 맞물리는 것이었다.
카롤링왕조 시대에는 그리하여 카롤링제국의 도처에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들은 당연 성직자들에 의해 지도되었고, 기본적인 식자능력의 계발에 기여했다. 카알대제 자신은 모든 수도원과 주교구 성당에 학교를 세울 것을 명했고, 실제로 교육은 교회의 업무라는 전통이 수립되었으나, 그 密度가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10세기경 再次 외부의 침입을 받은 유럽에서 모처럼 싹트기 시작한 교육과 문화의 창달은 좌절되었다. 많은 곳에서 학교는 존립이 위태롭게 되고, 극소수의 수도원과 성당학교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B. 성당학교 (Cathedral School)와 도시의 속인학교
11세기말과 12세기초에 사회적 안정이 확보되면서,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발전에 힘입어 지식에 대한 요구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12세기초부터 수많은 학교가 생겨나면서, 지식과 교육에 대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주로 도시에 소재했던 주교좌 성당에 학교가 세워졌다. 중세초기에는 수도원이 외부인에 대해서도 약간의 교육기능을 담당했었으나, 12세기경부터 수도원은 이러한 관행을 중단하고 성당학교(Cathedral School, schola)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사실상 수도원은 12세기 시토 수도회의 개혁운동에서 보듯이 중세초기와 같은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 즉 시토 수도회는 그 개혁적 면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수도자의 이상에 헌신하는 근본주의적인 성격을 갖는 보수적인 운동이었다. 이제 문화와 종교의 중심은 수도원에서 도시에 위치하는 대성당, 그리고 성당학교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도시와 학교의 연관관계를 주목하라. 즉 도시의 주민들,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인들이 학교를 특히 필요로 했다. 이는 그들의 직업활동상, 계약을 체결하거나 영업실적에 대한 기록의 필요성 등에서 문자능력을 더욱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후기에는 도시참사회가 운영하는 도시학교의 등장까지 보게된다. 교황청은 1179년부터 모든 성당에 학교기능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는 우선 교사를 배치하는 일로 시작하여, 적어도 희망하는 자에게는 최소한의 문자능력을 전수하도록 하였다.
성당학교의 목적은 물론 사제양성에 있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점증하는 사회적 요구로 인하여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이 행해지게 되었다. 국가와 교회, 도시 모든 측면에서 단순한 식자능력이상의 전문지식 - 특히 법률지식 - 을 갖춘 인력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고급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언어, 즉 라틴어의 구사능력이 철저히 주입되기 시작했다. (성당학교의 교과목을 상징하는 샤르트르 성당의 남문의 조각을 참조.)
이를 위해, 또는 이로 인해서 라틴고전의 이해수준이 일층 높아지게 되었다. 이미 중세성기의 수도사들 사이에는 Vergilius와 Cicero가 애독되고 학습되었다. 기독교의 종지와 큰 갈등없이 로마의 고전이 수집되고, 연구되었으며, 作文에까지 모방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시기의 古典연구에 대한 증대된 관심에서 "12세기 르네상스"를 운위하게 되었다.
13세기경부터 성직을 지망하지 않는 俗人知識人이 대량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학교는 중세에서 오랫동안 성직자양성소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성직과 무관하게, 문자능력, 산술능력으로 새로운 출세의 경력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당학교 보다 도시의 속인학교를 선호하였다. 이제 교육기관의 운영과 그 혜택이 서서히 성직자와 교회에서 벗어나 속인에게도 개방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와 같은 속인교육이 아직 철저히 뿌리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는 허다한 문화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즉 교육 및 학교의 言語로서 라틴어 이외 각 지방의 俗語(vernacular language, Volkssprache)가 文語로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중세유럽의 문헌전승에서 드러나듯이 12세기를 고비로, 특히 13세기부터 일상의 계약, 재판, 법률, 행정문서에서는 점점 더 압도적으로 俗語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학교는 이와 같은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또 영향을 받았다. (도시에 설립된 속인학교의 한 모습 참조)
물론 이렇게 양성된 속인지식인은 아직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전문적인 학자", "자유직업 지식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대다수가 市政이나 군주들의 지배·행정기관의 말단에서 書記로서 생존의 기반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 이들의 활동이야말로 사회의 文明化, 합리화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C. 성당학교의 발전
11,12세기 북프랑스의 많은 성당학교들이 "7개 자유교양학과 (septem artes liberales, seven liberal arts)"을 교수하는 곳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아가 이들 성당학교의 교육은 기본 교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샤르트르(Chartres)의 주교 풀베르(Fulbert)는 저명한 문예학교(교양과목)를 세웠으나, 곧 이어 랑(Laon)은 신학으로, 오를레앙은 법학으로 유명해졌다. 특히 대도시 파리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7 자유교양학과는 이미 고대 로마인이 확립해놓은 교과였다. 일반적으로 카롤링시대부터 중세학교의 교과과정은 3 단계로 나누어진다. 초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기초적인 라틴어의 읽기와 쓰기, 셈, 노래, 약간의 문법과 날짜계산법을 학습하는 단계, 그리고 7 교양학과가 전개된다. 이것은 다시 2 단계로 나뉘어 문법(grammatica), 수사학(rhetorica), 변증법(dialectica)의 3 과(trivium)와 산술(arithmetica), 기하(geometrica), 천문학(astronomica), 음악(musica)의 4 과(quadrivium)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교과는 모두 라틴어로 교수되었고, 사실 라틴어의 올바르고 능숙한 구사능력을 완성하는데 중점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의 성당학교와 대학에서는 모두 라틴어로 교수와 토론, 시험이 이루어 졌는데, 이러한 전통이 유럽대학에서는 부분적으로 18,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왜 artes liberales(liberal arts)?: 로마인의 사고방식에 이 학문은 모든 自由人이 추구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물론 이 학과의 수식어 "自由"는 물론 반드시 자유인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수는 없지만.
이러한 성당학교(schola)를 중심으로 그 곳에서 교수활동을 하는 교사들에 의해 사상적 논의도 활발해 졌다. 이런 이유에서 중세성기의 철학을 schola철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철학자들에 의해 고대 이래의 難題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왔던 문제가 다음 2 가지로 정리되어 다시 등장했다. - 신의 존재증명문제: St. Anselm (1034-1109), 즉 신의 존재를 어떻게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 - 보편개념(universals)의 본질, 소위 실재론과 명목론의 문제: Pierre Abelard (1079-1142), 개체들의 집단전체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에 보편개념이 존재하는가, 즉 보편개념은 실재하는가(realism, 실재론), 아니면 단지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추상에 불과한 것인가 (nominalism, 명목론) => 이 문제에 대해서는 B. Tierney, pp. 309-315를 정독하라. 물론 보다 전문적인 중세철학 관계서적을 보아도 좋으나, 골 아픈 문제이므로 적절한 주의가 필요.
12세기말 13세기초에 교사와 학생의 공동체로서 형성. 오늘날 西歐語에서 공통적으로 대학을 의미하는 University의 어원은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교사와 학생의 공동체)의 universitas에서 유래. 이 말 자체는 "공동체"라는 의미로서, 도시의 시민"공동체", 또는 동업조합의 "공동체"(즉 길드), 농촌의 촌락"공동체"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사용되었다.
대학은 말하자면 그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통의 이익(교육)을 증진시키기 위해 결성된 길드였다. 이 길드의 주도세력에 따라 두 가지 타이프의 길드, 즉 대학이 있었다. 이태리의 볼로냐 대학과 같이 학생이 주도하는 대학과 파리대학과 같이 교사(magister)가 주도하는 대학이 그것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조합은 당대의 문서에 studium generale, studium privilegiatum, academia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지칭되었느데, 볼로냐에서 최초로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이 형성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대학들은 이와 같은 길드로 출발했으나, 정확히 그 형성연대는 알 수 없다. 대체로 이런 대학들이 군주나 교황으로부터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해가 창립기념의 해로서 새겨질 뿐이다. (대학의 분포: 지도 참조)
B. 볼로냐 대학
이태리는 중세초기이래 로마제국의 유산 - 도시적 생활양식, 법률문화, 상업적 경제활동 - 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고대의 7 교양학과, 특히 수사학의 교수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적 교사도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11세기부터 이태리의 법률가들은 좀 더 완전한 로마법지식을 갈망.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대전이 재발견됨으로써, 법률연구가 활발해 졌고, 그 중심지가 볼로냐였다. Irnerius와 같은 탁월한 학자에 의한 주석활동으로 하나의 학파(소위 주석학파, glossatores)가 수립되었고, 이어 12세기중엽 이 대학에서 수학한 Gratianus가 교회법(canon law)을 로마법의 논리에 따라 정리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Corpus Juris Canonici)
12세기말에는 적어도 4 개의 교과과정 - 수사학, 로마법, 교회법, 의학 - 이 개설
대학의 조직상 볼로냐는 매우 흥미있는 선례를 제공한다. 서유럽 전역에서 법률을 배우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은 교수나 현지주민들의 요구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길드를 형성. -> 알프스 이북의 학생길드(Ultramontane)와 알프스 이남의 학생길드(Cismontane), 당대인들은 이 길드를 natio라고 불렀다.
학생길드의 대표가 總長(rector)으로서 기능, 학위수여 요건 이외 모든 사안을 학생길드가 주도, 예를 들면 교수는 학생들의 대표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이주할 때는 허가를 받고, 부실한 강의에 대해 벌금을 지불하는 등의 의무를 지었다.
C. 파리대학
노트르 담(Notre Dame)성당학교의 교수들이 결성. 성당참사회의 관리로서 학교에 대한 감독, 관리권을 위임받은 學務官(chancellor)이 교수들에게 Ile de la Cité의 성당부근에서 강 의개설을 허가. -> 대학의 출발
교수들과 성당학교의 관계는 학무관이 존재하는 것 이외 아무런 직접적인 물적, 인적관계가 없었음. 즉 교수들은 학무관의 강의개설허가만 받으면, 각자 방을 세내어 강의를 하고,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받았다. 학위는 학무관이 수여.
학무관과 갈등을 일으킨 일부의 교수들이 세느강 건너편 St. Geneviève수도원의 보호아래 강의속행,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수도원 주변에 파리대학이 형성. → quartier latin (말 자체의 뜻은 "라틴어가 말해지는 구역")
12세기말 교수들이 조합을 결성, 1200년 Philip August의 특허장 획득. 13세기 중엽 교양학부교수의 대표(rector) 선출. 신학, 법학, 교회법, 의학부는 각기 학장(decanus, dean)을 선출 -> 교양학부가 가장 규모가 커서 교양학부의 대표가 총장의 역할.
파리대학은 중세성기의 기라성같은 지식인이 활동하고, 중세 지성사상 대논쟁이 이루어졌던 무대였다.
** 기타 영국 및 독일에 대해서는 B. Tierney, pp. 414 ff. 참조.
D. 대학의 조직과 이수과정
전형적인 중세대학의 조직과 이수과정은 유럽대학의 전통에서 19세기초 근대대학이 탄생했을 때까지 지속된 것이었다. 소위 학부조직은 파리대학에서 시작해서 13세기에 전 유럽의 대학에 관철되었다.
우선 대학은 4 개의 학부(facultas, faculty, Fakultät)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과두지배체제로서 소수의 교사, 즉 교수(magister)가 관장하였다.
인문학부 (facultas artium, Artistenfaultät): 7 자유교양학부를 수학하는 학부로서 모든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이수하는 과정. 문법책 2권과 논리학 서적 5권을 강독하면, 최하의 학위 B.A.(Baccalaureus Artium, bachelor of arts)학위를 취득하는데, 대략 4-5년이 소요되었다. 그후 5-6년간 학생지도에 조력하는 徒弟기간을 마친 후 M.A.(Magister Artium, master of arts)학위를 취득하고 학업을 종료하거나 또는 7 자유교양학과의 교사 일을 개시한다. 일부의 학위취득자는 법학, 의학, 신학의 상위학부로 진학하고 이 상위의 학부를 마치면서 이른바 Doctor(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라고 번역하는 Doctor학위의 명칭은 "가르치다"라는 뜻의 라틴어 docere에서 유래, 따라서 doctor라는 말은 "교사"라는 뜻에 불과하다. 앞에 언급한 magister 역시 "교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학, 법학, 의학: 중세대학의 上位學部, 직접적인 직업활동, 사회적 출세와 직결. 가장 어려운 과정은 神學. 신학과정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교양학과를 마친 뒤, 12-3년의 수학기간이 소요. 규정상 35세 이하는 학위를 취득할 수 없었다.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험을 치루어야 했는데, 절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특정한 기간에만 개최되는 시험에 신고를 마친 수험자는 학장(decanus, dean)의 임석 하에 학위취득에 필요한 선수조건을 충족했다는 선서를 한다. 이 조건에는 규정된 강좌의 출석뿐만 아니라, 부모의 정상적인 혼인에서 출생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행한 적이 없었음이 포함된다. 그 다음에 수험자는 평가결과에 불복하여 試驗官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이어 학부의 위원회에 의한 시험이 시행되는데, 수학한 기본서의 해석과 주석능력을 시험하고, 수험자가 선택한 주제에 대한 口頭논쟁(Disputation)으로서 이루어진다. 합격자는 각종의 의식 - 교회의 의식, 축제, 행렬(procession), 연회 등등 - 과 함께 학위가 수여된다.
그러나 중세의 대학이 나름대로 오늘날의 대학같이 모든 면에서 정연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정상적인 봉급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고, 매 강의마다 학생들이 걷어주는 수업료, Magister나 Doctor학위후보자의 선물과 접대가 거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당연히 박사학위와 같은 높은 학위의 수여에는 복잡한 의식비용과 함께 교사들에 대한 선물로 많은 비용이 들었다. 심지어 학위의 賣買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E. 대학의 자치와 학생의 생활
오늘날의 대학에 대해서도 자주 운위되는 대학의 자치와 자율은 중세대학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중세대학의 自治(Autonomie)는 추상적인 원리로서가 아니라 분명한 법률적 의미와 실천능력을 가진 특권이었다.
공권력자체가 분산되어 있던 중세사회에서 대학 역시, 수많은 길드나 도시, 교회기구와 같은 자치체 또는 법인체(corporation)의 하나였다. 대학의 자치는 대학의 성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재판권의 부여로 표현된다. 대학의 재판권은 하나의 특권으로서, 군주나 황제 또는 교황에 의해 認可되었다. 대학의 설립연대 기준을 정하는 이러한 특허장에는 자주 재판권부여가 주요한 내용의 하나로 언급되어 있다.
교수 및 학생과 주민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면, 해당지역의 재판영주가 아니라 대학이 법률적인 조정, 소추, 처벌을 담당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대학의 구성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결이 내려졌다. 유럽의 대학은 이와 같은 중세적 특권을 자주 19세기말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死刑을 선고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대학재판권도 있었다.
중세대학의 학생들은 오늘날과 달리, 나이가 많고 이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즉 군주 및 도시기관, 교회기구의 書記 및 법률가 조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등등. 때로는 유럽천지의 대학을 전전하는 방랑학생(Goliards)도 많았었다. 이들은 출신고향에 따라 대학 내의 학생조직인 natio(同鄕組織, 국민단?)에 속했다. -> 볼로냐 대학과 같은 학생대학이 가능했던 하나의 조건.
실제로 중세의 대학생 다수는 不汗黨과 별로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난폭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교수들도 별로 예외가 아닌 경우가 허다했다. 노름과 飮酒歌舞(In vino veritas!: 술속에 진리가 있다!)가 그들의 일상생활이었으며, 부모와 친지로부터 금전을 갈취하는 일로 머리를 짜내곤 했다. 심지어 범죄자들이 학생신분을 취득하여 대학생속에 은신하고, 유사시 대학재판권의 보호를 받는 일도 허다했다. (대학생의 생활상 참조)
중세후기에 이르러 대학은 어쨌든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의 길을 열어주었다. 학교의 규모도 불어났다. 13세기에 파리대학은 매년 약 7000명 정도의 학생을 유지하고 있었고, 옥스퍼드대학은 약 2000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가난한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기숙사가 자선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기숙사에는 질서유지와 면학을 위해 교수가 공동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설에서 소위 collegium(college)이 발달하게 되었다. - 파리에서는 1258년 Robert de Sorbon이 최초로 collegium 설립(-> Sorbonne 대학의 유래), 1500년경에는 약 60개 가량의 collegium이 존재 - 영국, 특히 Oxford나 Cambridge의 college역시 이러한 중세적 기원과 전통을 갖고 있다: Merton College, Baliol College 등등.
중세성기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대학은 중세후기에 이르러 거의 독점적인 학문과 지식인의 무대가 되었다.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대학의 교육은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했다. 이미 대학의 탄생 자체가 순수하게 혈통신분에 의해서만 사회의 엘리트가 충원하기 어려운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대학은 지식의 추구와 전문인력의 양성이 가능한 최소의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인문학부의 졸업자들은 여기 저기 도시에 세워진 학교의 교사가 되거나 관리가 되었고, 로마법을 연구한 자들은 변호사개업을 하거나, 聖俗諸侯의 관리로 출세했다. 교회법학자와 신학자들은 고위 성직자로 출세하였다. 중세성기의 막강한 교황 Innocent III도 대학출신의 律士였고, 중세후기, 말기의 대사상가, 신학자들 - 특히 도미니쿠스교단의 수도사 - 역시 대개 대학출신 또는 대학을 무대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쉬운 예로 Martin Luther역시 Wittenberg대학의 신학교수였다.) 중세 말에서부터 지금까지 대학은 결국 문화의 중심지, 생산처, 전문직 인력의 양성처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첫댓글 자료와 과제 부분 클릭하면 사진 등 자료를 볼 수 있고 다시 오려면 '뒤로'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