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生을 읽고
음악, 사랑, 언어, 매혹, 나체, 노출, 금기, 냄새, 성욕, 갈망, 욕망, 악기, 은밀, 불륜, 침묵, 비밀, 유혹, 성교, 공모, 문자 등의 단어가 주로 언급된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이라면 주제, 구성, 문체나 인물, 사건, 배경, 또는 사건의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 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다. 즉, 전통적인 소설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한 편의 긴 시로 보이고, 에세이라고 말 할 수 있고, 소설이라고, 철학서라고 불릴 수도 있다. 아니, 이 모든 것들이 뒤섞어 놓은 것 같다. 반듯하게 닦인 포장된 도로를 걸어가다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외길로 접어들고, 그 길 끝나고, 언젠가 누군가 지나갔으나 오래되어 흔적이 남지 않은 숲속으로 들어선 것 같다.
기존의 형식은 파괴되고, 길들여졌던 머릿속 생각들은 전부 망각되고, 텅 빈 상태로, 아무것도 갖지 않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시침이 반대로 돌고, 그것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 내가 젊어지고, 어려지고, 하나의 점이 되고, 어둠을 통과하여 늙은 윗대가 되고, 그 조상이 그 위의 선대로,......, 원시 상태에 놓여버리고.
내려 쪼이는 뜨거운 태양아래, 뾰족한 돌들을 밟으며 한 인간이 걸어간다. 치렁한 머리에 몸에 걸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늘 위를 날고 있는 새들, 무리지어 지나가는 들소들, 이 모두가 자연스럽다. 맨몸인 것처럼 언어도 없다. 부끄러움도 없고, 죄스러움도 없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 뭔가 먹어야 된다는 생존욕구만이.
사랑의 순수성, 그것은 침묵하는 초라한 나체가 맨 앞쪽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이미 피할 수 없는 뻔뻔스러움이다. 사랑이란 언어에 선행하는 것의 벌거벗음, 언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사회가 망각하고자 하는 벌거벗음이다. 사랑은 위선적이고, 수다스럽고, 선명하지 못한 인간의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이다
저 멀리서 누가 다가온다. 역시 아무것도 입지 않은 혼자이다. 출렁이는 가슴과 큰 엉덩이로 이성임을 짐작한다. 일부러 피하지도 숨지도 않는다. 얼굴이 보일만큼 가까이 다가서고. 머릿속에는 위험하지 않다는 느낌, 싫지 않은 생각이 떠오른다. 아무 말이 없다. 하얀 침묵이 흐른다. 어제를 묻지 않는다. 단지 현재로 끌어당긴다. 어떤 약속도 없이.
어둑하고 습기 찬 동굴 속에서 여자는 비명을 지르고, 한 아이가 태어나고, 새와 들소와 같이 침묵과 소리, 움직임으로 자라난다. 억수같은 비 솟아지는 캄캄한 밤, 섬광 같은 번개 치고, 천둥소리도 저 멀리까지 뻗어간다. 이렇게 태어남이 거듭될수록 도구를 사용하고, 불도 발견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점차 배워야하는 것은 늘어나고.
의미 있는 낱말이 증가할수록 무리는 개별로 나눠지고, 내 것과 남의 것이 구별된다. 멀리 있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도 생각한다. 오래토록,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복잡한 사고를 하게 된다.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참가해서 만들지도 않은 제도와 관습과 문화에 억압된다. 이미 만들어 놓은 언어에 정신이 예속되어 가고.
전혀 창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들이 부끄러운 것, 어색한 것이 되고, 옷으로 맨몸을 숨기듯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을 주변을 돌아보고 긴장하며, 말하지 못하고, 숨기게 된다. 매년 자신도 알지 못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점차 촘촘한 그물에 갇힌 물고기가 된다. 몸과 마음을 갑갑하게 만든다.
피아노 홀 뒷방 후미진 곳에 네미가 벗은 몸으로 몰래 사랑하듯이 나체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몸은 언어를 잊었으나, 숨 막이는 긴장감을 느끼고, 오랫동안 길들어진 의식은 ‘불륜’,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이라는 단어와 문구를 자신도 모르게 가져와 버린다. 먼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언어가 없을 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밀도, 약속도, 의무도, 기록도 없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대상과 소리와 냄새, 갈망, 본능과 감정만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갯벌에 앉은 새의 자취는 희미한 자국인 것처럼, 인간도 단지 두발로 눌려 놓은 발자국만 남길 것이다. 존재, 그 자체가 가치였다.
원시 상태의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무 주저함 없이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은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보이지 않는 체로 거른 후, 밖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이상적 자아가 욕망의 주체가 되는 상상계에서 언어와 관습, 문화로 이뤄진 보편적 질서 세계인 상징계로 힘들여, 집중하여 전환하는 것이다.
자아와 자연스러운 욕망이 상주하는 상상계와 보이지 않는 무엇에 의해 억압되고 길들어 진 상징계 사이에 있는 문턱을 넘나드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엄숙한 사회 가치와 개인 욕망이 충돌하여 정신적인 갈등과 불안을 불러온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과 남에게 보여주어야 할 삶의 각도는 커지고, 방향도 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글쓴이 키냐르는 기존의 질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삶의 비밀을 찾아 나선다. 그 방법으로는 문자, 언어가 없는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추정한다. 또 우리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을 집요하게 탐색한다. 결국 이 두 갈래는 강물처럼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를 억누르는 질서나 가치, 도덕, 관습, 제도 등을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진정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별 생각 없이 장래식장에 가고, 돼지수육에 소주를 마셨지만, 곧 차례가 닥칠 것이고, 얼마 남지 않는 生,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2015. 02. 23
첫댓글 이 작품이 무엇인지 몰라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랑에 대해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책인가요?
두잉 형님 마지막 문장 처럼 얼마 남지 않는 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치명적인 사랑이야기 입니까? ^^;;
저자 키냐르는 1996년 소설을 집필 중이었는데, 갑자기 심한 출혈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삶으로 귀환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 즉시 모든 일을 중단하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어떤 것, 총체적인 모든 것(사상, 소설, 삶, 지식 등)이 포함된 단 하나의
육체와 같은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은밀한 생'이라는 제목은 사회의 사각(死角)지대에서 사회의 중재 없이 살아가는 삶의 한 형태,
정상적인 흐름에서 단락(短絡)된 상태로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집단의 동의 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결혼이 아닌, 번식의 목적성이 배제된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책을 이해하려면 직접 읽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형식입니다. 몇 번을 읽어 봤지만, 한계만 알게
되었습니다. 윗글은 나름대로 아마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적은 것입니다. 꽃은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피는 것은 아닙니다. 꽃이 피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즉, 식물은 꽃으로, 향기로, 꿀로, 벌과 나비, 곤충들을 유혹합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사랑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닐까요. 처음부터 관습이나 법으로 메어 놓지 않았을 겁니다. '도덕적이다.', '반사회적이다.'
이런 관점은 틀 속에 갇힌 생각들입니다. 기존의 가치나 질서에 대해 의심하고, 또 다른 각도로
보고, 유연한 사고를 갖는 것이 좋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