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효문화 마을관리원(뿌리공원)에서 성씨 조형물 설치 계획 공고에 의거
제출하는 서류중 성씨 유래문을 전 대종회장이신 초영 대부님께서 작성하신
서림.서천 이씨 연원(淵源)을 이곳에 올립니다...
종친들이 다 같이 보실수 있도록 하면 조상에 대한 자녀들 교육에 도움도 되고
자긍심도 생기고 할 것 같아서요~~~
서림⋅서천 이씨 연원(淵源)
우리 이씨의 관향은 원래 서림(西林)인데 조선 초기에 지금의 서천(舒川)으로 개칭되었다. 이로 인해 각 문중에서는 오래전부터 본관을 서림 또는 서천으로 달리하고 있어, 종중 차원에서는 서림⋅서천으로 병서하고 있다.
우리 시조(始祖)는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휘는 익존(益存), 흥록대부 충성 양절익찬 정원 공신이시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시다. 가승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시조의 뒤를 이어 대대로 고려 조정에 출사하시어 공신(功臣), 상신(相臣), 문형(文衡) 등 요직을 담당하셨다. 이렇게 여러분의 중신들을 배출한 우리 가문은 명문(名門)으로 자리 잡았으나 세손은 번창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중시조(中始祖)로 받드는 분은 고려 후기의 공신으로 휘는 언충(彦忠),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이시다. 충렬왕 때에 국자감시에 장원으로 벼슬길에 오르셨다. 충렬왕의 뒤를 이은 충선왕은 원(元)의 부마로서 당시 제국의 도읍인 연경에서 5년간 전지(傳旨)만으로 고려를 다스렸다.
중시조(中始祖)께서는 당시 조정의 중신으로 연경에서 내려오는 왕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왕이 없는 조정을 흔들림 없이 잘 지켰다고 한다. ≪고려사≫를 보면 충선왕의 뒤를 이은 충숙왕이 이런 중시조의 공을 인정한 기록이 나오는데, “서림군(西林郡) 사람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에게 공이 있어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승차시켰다”라고 한다.
충숙왕 또한 원(元)의 연경에 5년간 볼모로 가 있었는데, 그동안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지고 음모가 난무하여 왕위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중시조(中始祖)는 당시 중추원의 중신으로 계시면서 여러 중신들과 혼란한 조정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시는 한편, 원(元)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충숙왕을 환국케 하는 데 큰 공을 세우셨다. 그 결과 관직이 도첨의 정승에 오르셨으며, 고려 후기 누대에 걸친 국정혼란을 극복하는 데 충의일념(忠義一念)으로 헌신하신 공으로 “단성수의 동덕보리공신”과 “서림군(西林君)”의 칭호를 받으셨다. 이에 후손들은 중시조(中始祖)의 이와 같은 충의정신(忠義精神)을 높이 받들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는 8세(世) 휘 흥의(興儀:부여현감)의 단종에 대한 절의(節義)와 13세(世) 휘 함림(咸臨:광양현감) 3부자(父子)의 병자호란 시 순절(殉節), 15세(世) 휘 일삼(日三:대재학)의 뛰어난 문필(文筆), 17세(世) 휘 봉명(鳳鳴:증예조참의)의 신임사화에 대한 직소(直訴) 등은 우리 종사(宗史)의 자랑이다. 그 밖에 많은 선조(先祖)들이 조정에 출사하기보다는 절의와 학문을 숭상하면서 고고(孤高)한 선비의 길을 걸어오셨다.
우리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지는 못하였으나 선조(先祖)들께서 물려주신 인(仁)과 덕(德), 의(義)와 충(忠)의 소중한 정신을 이어받아 권세와 재물보다는 분수(分數)를 지키며 정의롭게 살아가면서 조상(祖上)의 은덕을 기리고자 한다.
2014. 6.
서림⋅서천 이씨 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