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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21일 부터 30일까지 터키와 그리스 여행을 했다. 터키와 그리스 여행은 긴 비행시간, 긴시간 버스타기, 배타기 등 조금은 고된 여행 이었지만 많은 볼거리들을 접하게 되어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나투어 여행사를 통해 다녀왔고, 우리 일행은 모두 19명으로 된 전국연합팀(서울 3명, 부산 2명, 인천 2명, 춘천 2명, 과천 2명, 영주 2명, 제천 6명)으로 재미있는 구성원이었다.
로마 유적과 기독교유적 그리고 유서깊은 동서양의 많은 유적을 접할수 있었다. 막상 여행기를 쓰려고 하니 여행지에서 찍어온 사진과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메모해온 것이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여행기간 보고 들어온 기억들을 다시한번 회고하며, 도서및 인터넷등 많은곳에서 자료를 수집 보완하여 이 여행기를 작성했다. 특히 여행시 같이 동행했던 로뎀나무(Internet ID)님의 여행기를 많이 인용 하였음을 밝혀둔다.
떠나기전 터키와 그리스의 고대사 관련 자료를 대충은 읽어보고 갔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두 나라의 고대사와 오늘을 간략하게 짚어 보기로 한다.
★- 터 키 편 -★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있으면서 두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나라 터키는 고대에서 부터 중세,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넘쳐 나는 나라이다.
북으로는 흑해. 서쪽으론 에게해, 남쪽에는 지중해로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고 내륙에는 해발 1000m 가 넘는 고산들을 비롯한 풍부한 자연유산을 갖춘 천혜의 땅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을 아홉 군데나 보유한 문화대국이며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보기 전에는 그 감동을 한껏 안아볼 수 없는 땅으로 꼽힌다,
축복받은 이 땅에서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길을 함께 걸어보기도 하고 무슬림의 문화를 엿보기도 했다.
어느 곳에서나 두 팔을 벌려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온 우리를 ‘코리아... 대한민국 짝짝짝’하며 환영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 터키의 기원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남부에서 기원한 터키 민족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혹은 돌궐족)이며,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어키의 Teoman Yabgu 왕국을 중국인들은 "흉노"라고 불렀다.
터어키 민족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했다.
2.시대별 터키의 역사
1) 석기, 청동기시대 - B.C 7000년경 이전에 아나톨리아 지역에 구석기인들이 살았다는 흔적 B.C 3000년경의 층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고 이 청동기 문화는 에게海 일대에 퍼져 후에 크레타문명, 미케네 문명을 꽃피게 했다.
2) 히타이트 문명 - 터어키 국토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아나톨리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연계하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B.C 2000년경 아나톨리아 지역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200년경에 발칸반도에서 들어온 이민족에 의해 무너졌다.(트로이 함락도 같은시기)
3) 우라르트 왕국 & 프리기아 왕국 - 히타이트 멸망 후 작은 나라와 부족이 난립하는 혼란기로 전해진다.
아나톨리아는 프리지아인과 리디아인에게 점령되었으나 동부지역은 토착왕조인 우라르투 왕국 통치 아래 남아 있었다.
4) 리디아 왕국 & 페르시아 제국 - 리디아 왕국 서 아나톨리아를 지배했으며 세계최초의 귀금속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했으며 B.C 546년 페르시아 키로스 2세와의 전투에서 패망하여 멸망했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가 기원전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후 헬레니즘 제국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
5) 헬레니즘 시대 - 헬레니즘 이란, 그리스 고유문화와 오리엔트(동양) 문화가 융합한 시대를 일컽는다.
B.C 334년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나서며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던 페르시아를 격파하여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며 헬레니즘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바빌론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며 점령지는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로 분할되며 아나톨리아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영토 분쟁의 장이 된다.
6) 로마제국 & 비잔틴(지금의 이스탄불)제국 -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B.C 146년 카르타고, 그리스를 점령 후 지중해 연안을 통일 한다.
AD 30년경 예수 그리스도는 처형되었으나 사도 바올, 베드로의 포교에 힘입어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가 최초에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아나톨리아로 초기 그리스도교 유적이 많다
313년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다시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비잔틴, 지금의 이스탄불)을 도읍으로 정하고 융성 한다.
그러나 395년 로마는 동, 서 로 분열되고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인의 침입으로 멸망하며 동로마는 로마의 정치, 그리스도교, 그리스문화를 중심으로 존속했다. 이 시대를 비잔틴 제국이라 한다.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성당이 완성되었고 이때가 비잔틴 제국의 최고 전성기였다.
7) 셀주크 투르크 - 터키족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6세기로 중국이 말하는 ‘돌궐’은 ‘투르크’의 한자음 표기이다.
6세기 중반 돌궐족은 동북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으나, 당나라에 의해 밀려나 중앙아시아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이란)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이후 투르크족은 이슬람화 되었고,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 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며,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에서 발흥하여 중동에서 투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다.
12세기 이란의 셀주크는 멸망을 하였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는 13세기 쿠바드 1세 때 최고의 전성기를 거쳐서 터키 민족국가를 발전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14세기 초에 이르러 셀주크는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고 멸망하여, 몇몇 나라로 분할되었다. 그중에 하나인 오스만 투르크가 나중에 다시 대 제국을 세우게 된다.
8) 십자군 시대 -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이 제1차 십자군으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의 성치 탈환을 기치로 아나톨리아에 들어온 것은 1096년의 일이다. 비잔틴은 셀주크 연합군을 대파하고 아나톨리아에 있던 구영토의 일부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셀주크는 지금의 콘야로 지역을 옮기고 힘을 기른 뒤 제2차, 3차 십자군 전쟁에서 비잔틴에 큰 타격을 준다.(십자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목적이었음)
셀주크는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비잔틴의 수도인 콘스탄틴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하여 라틴제국을 건설했다.
그로 인해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은 이즈닉, 트라브존으로 피신 한다. 라틴제국도 50년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여 이즈닉, 트라브존으로 피신한 비잔틴 제국은 재부흥 했다.
9) 오스만제국 시대(1281-1922) - 이슬람 왕조 - 몽골의 세력이 쇠퇴한 13세기말 오스만(셀주크 투르크의 일부)을 족장으로 한 터키족의 일파가 아나톨리아의 비잔틴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1402년 몽골의 티무르군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하였고 앙카라지역에서 오스만은 대패하여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겼으나 이때부터 영토내 크리스트교도의 자제들을 징용하여 친위대를 기르는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하였다.
몽골 티무르가 사라지자 오스만세력은 급속히 회복하였고 1453년 메흐멧 2세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는 16세기에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이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가 국경으로 되었고,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며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술레이만 대제때 3개대륙을 점령 최전성기를 구가)
오스만제국은 하렘중심의 구태의연한 체제가 근대화를 막아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그리스의 Maritsa강 지역까지로 축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패전국인 독일 측에 가담, 1920년 8월 연합국측과 체결한 Sevre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背後地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Mustafa Kemal Pasha의 영도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23.7 연합국측과 Lausanne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현재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10) 터키 공화국 시대 - 유럽열강은 약체가 된 터키에 다양한 요구를 하였고 1853년부터 러시아와 싸웠던 크리미아전쟁은 영국, 프랑스가 터키 편을 들었으나 일부 영토(카르스)는 러시아 수중으로 넘어갔다.
적십자 설립의 원인이었던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활동한 것이 이때이다. 병원으로 쓰였던 병영은 아시아측 이스탄불에 아직 남아있다.
1914년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편에 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1918년 패배하였다.
파리교외에서 체결한 세브르조약에 의거 본토이외의 영토를 포기해야했다. (시리아,아라비아,아르메니아의 광활한 영토를 포기해야했다)
본토의 아나톨리아도 연합군에 분할 관리되었다. (영국은 삼손,프랑스는 키리키아,이탈리아는 콘야,안탈랴, 그리스는 이즈미르를 점령관할)
이러한 터키의 존망위기에서 구해준 인물은 후에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장군 이었다. (아나톨리아 북부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됨)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1919년 삼순을 회복하고 1921년 그리스를 몰아내고 이즈미르 에서 스미나르까지 회복,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술탄제도를 폐지하고 (마지막 술탄 마흐멧 6세는 망명)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을 건국했다. 로잔조약에 의거 거의 현재의 영토가 회복되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터키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함으로써 터키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다. 또한 이후 오랫동안 영향력이 지속된 국가통제 방식의 경제발전 정책을 마련했다.
근대화를 위한 과감한 개혁은 1) 이슬람교의 국교폐지 , 2) 정치와 종교 분리, 3) 일부다처제 폐지, 4) 남여모두 교육의무화 5) 여성 참정권실현 , 6) 이슬람력을 대체한 태양력채택, 7) 미터법 도입, 8) 아라비아문자를 대신한 로마자 사용 , 9) 남성의 페스(모자), 여성의 페체 (검은 베일)착용금지 등이다.
그는 터키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1935년 터키의회는 "터키의 아버지" 란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칭호를 선사 한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후 불안정한 기간과 짧은 군부 통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및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터키의 정식명칭은 터키공화국이다. 지리학상으로 동서양의 교차로에 있어 동양과 서양 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고대 유적이 즐비하다.
★- 터키 여행 -★
<이스탄불>
이스탄불(터키어: İstanbul)은 터키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행정적으로는 이스탄불 주에 속해 있다. 터키 서부에 위치해있으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걸쳐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때까지 수도로 존속하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1923년 이후로는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가 되었다. 2008년 기준 인구수는 13,872,613명이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히포드럼광장 - 히포드럼은 본래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이곳에서 마차 경주가 최초로 열렸다고한다. 10만명정도 수용이 가능했던 이곳은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들이 이때 파괴 되었다. 그후 이곳에 있던 각종 기둥과 돌들은 블루모스크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어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된 넓은 광장에 3개의 기념물만이 보존되어있다.
◇오벨리스크 -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 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나일강 가에 있는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운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가져온 사람은 유리아누스이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곳에 옮겨 세웠다 해서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라고 불린다. 분홍빛이 도는 최고품질의 화강암으로 무게 300톤, 높이 20m이며, 대리석 받침대 사면에는 전차경기 모습, 테오도시우스 1세가 오벨리스크가 세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 노예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장면, 승자에게 월계관이 씌워지는 장면, 춤추는 무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둥 _ 이 기둥은 콘스탄틴 7세가 할아버지인 바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10세기에 돌벽돌로 높이 32m의 오벨리스크처럼 만들어 세웠다. 본래는 금박청동으로 입혔었는데 4차 십자군 전쟁 때 동전 제조용으로 벗겼다고 한다. 지금은 그 화려함은 찾을 길 없고 돌벽돌이 흉하게 드러나 황폐해진 모습이다.
◇설펜타인(Serpentine) 기둥 - 설펜타인(뱀) 기둥은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m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기둥이다. 이 기둥은 기원 전 479년 그리스가 전쟁에서 이긴후 페르시아 병사들의 방패를 녹여 제작, 델피의 아폴로신전에 헌정 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정하면서 옮겨 왔다고한다. 머리부분이 파손되어 3개의 뱀머리중 하나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또 하나는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으며, 하나는 훼손 되었다고 한다. 높이는 약 5.5 미터다.
◇술탄 아흐메드 사원(SULTAN AHMET CAMII : 블루스모크) -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단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성소피아성당 - 이스탄불 성소피아성당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 때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안길이 81m, 너비 70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라고 하는데, 100명의 감독관과 1만명의 공인이 5년10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그들의 재능이 만들어낸 풍부한 내부 공간과 동산을 방불케하는 장대한 외관을 보고 537년 12월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끈다.
- 마리아, 예수님, 세례 요한 -
- 그리스도와 콘스탄틴 9세와 조에 왕비 -
- 마리아와 요한 콤네누스 2세와 이레네 황후 -
◇그랜드 바자르 - 터키어로 '덮여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파르 차르쉬(Kapar Carsi)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으로,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
1455~1461년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의 명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16세기 술탄 술레이만 1세(Suleiman I) 통치 시기의 대대적인 확장을 비롯하여 여러 번의 증·개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현재 60여 개의 미로 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으며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금, 은 세공품을 포함한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 그랜드 바자르 가는길 -
- 그랜드 바자르 입구 -
◇보스포러스 해협(유람선 승선관광) - 보스포러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약30km 이며, 가장 넓은 폭이 3500m, 가장 좁은 폭이 750 m이다. 깊이는 36m에서 120 m 사이라고 한다.
해협 양쪽으로 이스탄불 시가 자리하고 있어 고대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터키전통적인 마을, 터키에선 보기 힘든 울창한 숲들이 곳곳에 있고,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풍경 이었다. 해협을 횡단하는 두 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며, 바다 아래로 기차 터널이 있다.
고대, 중세에는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계속되어 매년 3만8000여척의 배들이 이곳을 통과한다고 한다.
보스포로스 해협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닭고기를 겻드린 쉬시케밥으로 점심식사를 한 우리일행은 앙카라로 이동하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앙카라 까지는 약 6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버스가 달리고 차창밖으로 터키의 시골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높은산이 거의 없고 민둥한 언덕이 주를 이룬다. 광활한 초원도 보이고, 우리나라와 흡사한 시골집들도 보인다. 옹기종기 모여사는 시골집들이 정겹다.
버스는 쾌적하고 깨끝했다. 고속도로의 휴계소는 우리나라 처럼 만치않다. 끝없이 달리기만 한다.
몇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휴계소를 만날수 있었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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