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물관 가는 길/ 오장환문학관/ 한강문학 4호
어머니, 고향, 그리고 조국(祖國)의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곳
「오장환 문학관」
임선빈- 수필가
오장환 시인을 아세요. 뜬금없는 물음에 그는 모호하다는 눈빛이다. 정지용 시인, 미당 선생은? 이번에는 어이없어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말하는 속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본다.
오랫동안 나도 시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문학관에 대한 나름의 관심이 없었다면 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천재시인이라 불린 그를 모를 일이다. 일제 강점 말기 폭압적 상황에서도 절필하지 않으면서 친일시를 단 한편도 쓰지 않았던 오장환을, 정말 나는 몰랐다.
일제강점기에는 고향을 앞에 두고서도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였던 오장환은 어머니, 고향, 그리고 조국(祖國)의 시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2015 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 대표 시(詩)로 꼽는 「고향 앞에서」가 출제되면서 부쩍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오장환문학관을 찾았다.
해바라기
울타리에 가려서
아침 햇볕 보이지 않네.
해바라기는
해를 보려고
키가 자란다.
문학관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담벼락에 그린 해바라기가 먼저 반겨준다. 오장환의 대표적 동시「바다」가, 누나가 시집가던 날의 풍경을 그린 「편지」도 아닌 해바라기 시 그림에 잠시 의아해했다.
오장환의 시집에는 유독 울었다는 시어가 많다. 작품의 연대로 볼 때 세 번째 시집인 『나 사는 곳』시절에는
‘사랑하는 내 땅이여, 조선이여! 행동력이 없는 나는 그저 울기만 하면 후일을 위하여, 아니 만약에 후일이 있다면 그날의 청춘들을 위하여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자와 무력한 호소겠으나 정신까지는 썩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쳤는가를 알리려 하였다.’
일제 강점 말기 폭압적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던 나약하던 자신의 심경을 피를 토하듯이 고통스럽게 기술하였다. 하지만 오장환은 폭압적 일제 강점 말기 상황에서도 절필하지 않았고 끝까지 우리 글로 시를 썼던 시인이다. 미 발표작인「전쟁」에서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기도 한다.
해바라기의 꽃말이 기다림이라 하던가. 오장환은 1936년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이 폐막된 다음날인 8월 17일부터 12월까지 자신의 동시 44편 중 무려 27편이나 집중적으로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해바라기는 올림픽의 꽃이라고도 하는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고 한 달 후에 발표한 시(詩)다. 오장환 시어(詩語)에서 울타리 또는 개 등은 일제를 지칭하거나 비하하는 의미로 전달되고 있는데 해바라기의 행간 속은 숨은, 오장환이 힘 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해볼 필요가 있다. 해바라기가 담 벽에 왜 그려져 있는지, 그 이유가 선명해진다.
오장환문학관은 전시실, 영상실, 로비와 문학사랑방,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오송회 사건을 만들게 한「병든 서울」을 비롯한 시집과 휘문고보 교지『휘문』에 실린 초기 시, 방정환 선생이 만든『어린이』지, 조선일보 등에 발표한 오장환 시인의 동시, 해방 후 중학교 5,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석탑의 노래 등 전시물로 시인의 문학세계를 폭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해설이 있는 시집코너에서는 영상으로 오장환의 대표시를 들을 수 있으며 영상실에서는 오장환 시인의 삶과 문학을 담은 다큐멘터리「시대의 증언자」를 상영하다. 관련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문학사랑방」에는 해금 이후 나온 논문자료 107편이 비치되어 있으며, 그의 시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료도 열람할 수 있다.
전시물 관람 중 오장환 시 「밤」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오장환의 초기 시는 휘문교지에 실린 아침과 화염으로 보고 있는데 올 1월 안성공립보통학교 교지『어대전』기념호가 발견되면서 오장환의 초기시는 아침보다 무려 5년이나 앞당기게 될 것 같다. 소화 3년(1928년) 발간한 이 문집에는 5년생 오장환과 박두진의 이름이 목차에 올라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대전은 히로히토의 일왕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아동문집으로 아직은 연구가 없지만 시대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오장환은 밤(栗)이라는 시를 썼는데 작품을 발표할 당시 나이가 만 10세다. 밤은 총 4연으로 되어 있고 10세의 어린이가 쓴 글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문학관 관계자에 의하면 문학관 뒷산의 밤나무는 베어내야 할지, 말지 논의가 있을 정도로 오래 묵었지만 밤이 많이 달려 가을이면 밤을 줍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용남이와 앵도나무」를 연상케 하는 앵두는 아직 그 열매를 그대로 달고 있다. 몇 개 따서 입에 넣자 입안을 도는 단맛과 신맛이 더위에 지친 나그네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준다.「전설」의 느티나무는 어린 시절의 딱 오장환이다. 채송아꽃, 봉숭아꽃이 자태를 뽐내고 조롱「박」은 담장을 넘는다. 목화밭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서로 먼저 꽃봉오리를 열겠다고 수군대는 소리라고 「아미산」에서 숨 가쁘게 달려오는 바람에게 전한다.
‘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하였던 그 노래는 어느새 풍경되어 문학관을 채운다.
회인(문학관)으로 가는 길
오장환문학관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 5길 12 에 있다. 서울에서 출발, 당진↔상주 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지금은 2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하지만 경유지가 되었던 충북도청이 있는 청주까지는 경부 또는 중부 고속도로를, 목적인인 회인까지는 지방도를 권하고 싶다.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은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구고 앉아 있다.
-도종환「해인으로 가는 길」부분-
오장환문학관은 2006년 9월에 개관을 하였다. 명예관장으로는 지금은 국회에 있는 도종환 시인으로 문학관 개관식 두어 달 전, 펴낸 시집의 제목이 공교롭게도 <해인으로 가는 길>이다.
문학관이 있는 회인을 시집 속의 해인으로 아는 이들도 속속 있다. 회인을, 해인으로 가고자 한다면, 옛길만큼 좋은 길이 없다. 혹여 그 길이 『해인』의 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장환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을 도로 명에는 회인면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회인향교’‘인산객사’‘사또내아’의 건물이, 문학관 뒷산에는 사직단이 그대로 있어 문학관 방문객에게 곧잘 옛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 시간의 다리를 건너게 한다.
오장환이 발행인으로 남만서고에서 1941년 미당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이 간행된다. 그 첫 장의 자화상에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하는 멋진 시 귀가 있는데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오장환이 운영하던 남만서점에서는 본인의 두 번째 시집 「헌사」를 비롯하여 「화사집, 김광균의 「와사등」, 세 권의 시집이 간행된다. 미당의 귀촉도가 발표되자 오장환은 1941년 춘추에 귀촉도(정주에게 주는 시)로 답 한다. 「헌사」 80권 한정본의 서명 글만 보아도 미당과 오장환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헌사」를 내면서‘시단의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찬사를 듣기도 하는데 천재시인 뒤에는 이곳 회인의 역할이 크다 할 수 있겠다. 회인팔경을 비롯하여 사직단과 향교 등은 시인에게 민족의식을 아낌없이 심어 주었기에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가장 빛나는 시인으로 기록되게 하지 않았을까. 회인의 그날의 아름다움은 풍경은 여전히 그의 시(詩)에서 한껏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료제공-오장환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