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의 장엄함
정 성 천
자고로 모든 동물들은 암수로 구별이 되고 그 구별의 척도는 생식기의 차이가 주가 되겠지만 해야 하는 역할도 또 하나의 구별척도가 된다고 할 것이다. 모든 동물들에게 암컷은 암컷대로의 역할이 있고 수컷은 수컷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고 이는 조물주의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그 구별의 경계가 모호해지더니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아예 자식을 만들고 낳는 일 말고는 그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자식 낳는 일까지도 인공의 수술을 가하여 남자의 몸에서 잉태와 출산을 해 보려는 시도가 행해진다고 들었다.
아무리 남녀의 하는 일에 경계가 허물어 졌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역할은 인간이라고 해서 동물과 다를 게 없다. 동물세계에서는 암컷의 기본적인 역할은 새끼를 낳는 일이요, 수컷의 기본적인 역할은 그 새끼들을 만드는 일 뿐 만아니라 그 들을 외부의 위험에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그 외 부수적인 역할이 많이 생겨났지만 인간도 이 동물적인 기본역할에 충실할 때 그 모습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수컷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남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브라질에서 해외 파견생활을 할 때 한국인동포가 운영하는 골프장엘 자주 다녔다. 그 골프장 주변에는 우리나라 판자촌과 비슷한 ‘빠벨라’라고 부르는 빈민촌이 많았다. 주말 새벽만 되면 그 골프장엔 캐디지원자들로 넘쳐 났다. 모두가 그 빈민촌에서 온 소년소녀들이었다. 그 중 일부만 일일캐디로 채용되어 우리나라 돈 오천원정도의 캐디피를 받고 일을 하게 된다.
한 번은 나에게 배정된 캐디가 여자아이였는데 아주 인물이 예쁜 메스티조 혼혈 소녀였다. 연약한 몸으로 무거운 캐디백을 메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지인의 손수레를 빌려와서 끌게 해주었다. 하지만 더 안쓰러운 일은 그 소녀나이는 17세이고 아이가 셋 딸린 엄마라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한창 꿈에 부풀어 아름답게 피어나야할 소녀가 인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시들어 가는 것 같은 안타까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동료캐디가 무심코 내뱉는 말에 나는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이 셋 모두가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함께 사귀다가 소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남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소녀 와 아이들을 보호해 주는 남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 셋을 그 소녀가 키운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혼모의 집이나 베이비 박스의 사연들을 들어 보면 별반 다를 게 없다. 특히나 이혼 시 자녀양육비의 부담책임을 약속해 놓고 이혼 후에는 콩 까먹은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 몰라라하는 이혼남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들어 보면 기본적인 수컷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 씁쓰레한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수컷이 수컷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요즈음의 세태에 정말로 수컷다운 모습을 보이는 동물이 있어 나의 가슴에 청량한 기운을 불어 넣어 준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집 토종 장닭이다. 장닭은 모습부터가 암탉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다. 검붉은 깃털과 머리의 벼슬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날개를 치며 고개를 빼고 우렁차게 울음을 울 때는 그 위엄이 최고조에 달한다. 오죽하면 귀신도 그 울음소리를 두려워한다고 하겠는가? 또 그 정력은 얼마나 장대하면 장닭 한 마리에 암탉 열다섯 마리가 적당하고 최소한 다섯 마리 이상은 되어야 장닭의 정력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장닭의 수컷다운 면모는 용모와 정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 하는 짓을 보면 과연 장닭이야 말로 진정한 수컷이라고 인정할만한 장엄함이 있다. 모이를 주면 암탉과 병아리들은 고개를 숙이고 먹는데 정신이 없지만 장닭은 바로 먹이를 먹지 않는다. 고개를 들고 먼저 사방주위를 경계한다. 혹시라도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식구들을 공격할 위험한 존재가 없는지 고개를 들고 세심히 살핀다. 풀어 놓은 병아리들에게 접근하던 고양이들이 장닭의 공격을 받아 혼비백산하고 달아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적도 있다.
한 번은 터 밭에서 잡은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를 닭장에 넣어 주고 지켜 본 일이 있었다. 주위 경계를 하고 난 장닭이 부리로 지렁이를 여러 토막을 낸 후 ‘꾸꾸’하고 암탉을 불러 먹이는데 놀라운 일은 다른 암탉은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하고 한 암탉에만 지렁이를 먹인다. 가만히 보니 그 암탉이 바로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이었다. 알을 품고 있어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암탉에게 지렁이를 먹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었다. 말 못하는 짐승의 짓이라 본능적인 일인지 몰라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봄이 되어 기온이 따뜻해지면 암탉들은 알을 품기 시작한다. 암탉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면 달걀을 두고 사람과 암탉은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암탉들은 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람손등을 부리로 쫓는 등 끝까지 버틴다. 그러다가 사람의 강압에 못 이겨 둥지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쫓겨 난 암탉은 장닭에게 또 한 번 호되게 당한다. 마치 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둥지를 쉽게 내어준 책임을 추궁하는 것 같았다.
병아리를 부화시키려고 달걀 10개를 한 둥지에 넣어 주었다. 여러 마리의 암탉들이 서로 경쟁을 하더니만 마침내 한 암탉이 주도적으로 알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암탉들도 자손을 퍼뜨리려는 본능 때문인지 알을 보태어 이틀 만에 품는 알이 15개로 늘어났다. 하는 수 없이 품는 알에는 표시를 해두고 표시되지 않은 새알들은 매일 수거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알을 꺼내 올 때는 암탉과 실랑이를 벌여야하고 쫓겨난 암탉은 장닭에게 호되게 당하는 일들이 더욱 심하게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날도 평소처럼 둥지에서 암탉을 쫓아내려고 암탉머리를 꼬챙이로 살짝 쳤지만 평소와는 달리 꿈쩍도 하지 않고 완강하게 버틴다. 할 수 없이 알을 꺼내려고 암탉을 살짝 밀쳐내니 암탉 날개 밑에 새까만 병아리가 한 마리 보인다. 병아리의 부화를 신기해하는 그 순간 무언가가 나의 등을 ‘후다다닥’타격함을 느꼈다. 놀라 뒤돌아보니 깃털을 한껏 세운 장닭이 나에게 사정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기세로 보아 목숨을 건 공격이었다. 장닭도 첫 병아리가 부화된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얼른 닭장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장닭의 그 용맹스러움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새끼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보다 수 십 배나 더 큰 인간에게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장닭의 그 처절한 공격은 나를 감동시켰다. 병아리가 다 부화될 때까지 닭장 근처에는 얼씬하지도 않았다.
장닭보다 못한 남자가 비일 비재하는 요즈음, 장닭의 그 용맹한 행위는 나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것 같은 통쾌함이 있다. 장닭이 장엄한 것은 장닭의 그 용모나 울음이나 그 왕성한 정력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 용맹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수컷은 모름지기 장엄해야한다. 모든 남자들은 장탉의 저 장엄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