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이나 관광을 통하여 돌이나 꽃, 또는 각종 기념물을 수집하지만 사진만큼 그때 그 장소와 그 경험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주는 기념품은 없을 것이다. 18세기부터 등장하는 산 그림과 스켓치는 1827년 닙스의 성공적인 사진 인화로 산악사진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등산과 사진의 역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발전을 동반해 왔다. 200년 전만 해도 산은 외경의 대상이고 신비스러운 신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의 결실로 영국과 유럽의 철학자와 과학자, 부유계급 등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탐험과 모험의 요구가 점차 증대했다.
몽블랑이 초등되면서 샤모니와 체르마트를 중심으로 한 알프스에서의 다양한 등산 경험은(많은 부분이 과학적인 탐사와 연결되었지만), 등산을 취미와 스포츠의 대상으로 일반화 시키게 된다.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 산이 주제로 등장했고 영국의 존 러스킨과 터너, 독일의 프리드리히는 알프스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그림들을 남겼다.
화가는 아니지만 출판사 직원으로 상업적인 등산서적의 발행을 위해 알프스에 파견된 에드워드 윔퍼는, 마터호른을 초등하고 많은 등산 삽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등산의 발전으로 많은 산악회를 조직했다. 1857년 최초의 산악단체인 영국의 알파인 클럽은 1890년 회원이 500명에 이르고 독일ㆍ오스트리아 클럽은 2만명, 프랑스는 5천명, 이탈리아는 4천명, 스위스는 3천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러한 양적인 증가는 등산 매뉴얼과 잡지에 그림과 삽화의 수요를 늘렸고, 콤프톤과 플라츠는 배경그림이 아닌 클라이밍 그림을 그리며 보다 사실적인 경험들을 표현했다.
이러한 사진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점차 산악 사진의 부흥을 불러왔다. 1844년 알프스 등반대의 마텐이 처음으로 산악사진을 발표했고, 1865년 <알파인 저널>에 융프라우의 사진이 실렸다. 같은 시기에 윔퍼의 산악 사진집이 출판되었고 1881년 <알파인 저널>과 1882년 독일ㆍ오스트리아, 1884년 이탈리아 산악회의 저널도 산악사진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영국의 알파인클럽은 전시회를 위해 회원들에게 산악사진을 독려했고 신입회원 입회 심사 시 사진 실력도 테스트했다.
1888년 미국의 이스트만이 코닥 핸드카메라를 개발하면서 사진 역사에 최고의 기술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등산사진은 풍경사진에서 클라이밍 사진으로 대체되었고 대중화와 상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유럽의 교통의 발달과 정치적 안정은 많은 해외원정을 가능케 했다. 윔퍼는 안데스 등반을 통하여 원정대 활성화에 기여했고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셀라는 마터호른 동계초등, 코카서스, 캉첸중가, 알래스카와 카라코람 등반을 하며 이 시대 최고의 산악사진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1900년까지 알프스의 주요 봉이 모두 등정되면서 보다 어려운 코스로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애쉴리와 조지 아브라함 형제는 록클라이밍 사진을 시도하는데,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의 표준이 되었다. 마닐라 로프, 긴 피켈, 징 박힌 등산화 등 등산과 사진기술의 발달은 마리오 피아센자에게 드라마틱한 클라이밍 사진을 남기게 했다.
또한 해외원정에 모험의 욕구를 분출하게 되면서 벨첸바흐, 헤크마이어, 코미치, 캐신 등이 활발한 등반활동을 했고 영국(에베레스트)과 독일(캉첸중가ㆍ낭가파르바트), 미국(K2)의 국가적인 경쟁으로 히말라야에서의 탐험에 불이 붙었다.
1932년 최초의 산악 상업잡지인 <마운티니어링 저널>이 창간되면서 산악인들은 그들의 드라마틱한 등반 상황과 경험들을 사진에 담아오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모험 저널리스트인 영국의 프랭크 스마이드는 1931년 카메트 초등과 1933년 에베레스트 8500m 지점에서의 촬영 등을 통하여 확고한 직업의식을 정립했다.
그는 사진과 등반 모두에 전념했지만 등반 진행에 더욱 비중을 두면서 보수적인 영국 산악계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크리스 보닝턴과 라인홀트 메스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ㆍ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산악부대의 창설과 나일론 로프, 앵글, 경량화 된 카라비나, 산소 호흡기 등의 개발과 유스호스텔의 증가는 등산인구를 엘리트 계층에서 돈 없고 젊은 학생과 노동자 계층으로 확산시키고 클럽 중심의 등산이 활성화 되었다. 상업적 등산학교와 협회도 증가하면서 안내산행과 숙박업, 장비업체의 발달은 등산을 전반적인 아웃도아 사업으로의 발달로 이끌었다.
이 시기에 많은 경이로운 등반이 이루어졌지만 등반기록보다는 등정에 집착하게 되어 산악사진은 과도기를 거치게 되었다. 밀너, 판틴, 마라이니, 워시번, 비숍 등이 산악 사진가로 활동했고 이탈리아의 테라즈는 클라이밍의 진수를 사진에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면서 산악사진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전후 중간 계층의 등산에 대한 선호는 많은 상업잡지에 전문적인 산악사진의 수요를 확대시켰고, 등산 저널리즘을 하나의 장르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클라이밍 자체가 사진에 적합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 광고와 마케팅에 등산의 이미지가 자주 채택되고 점차 비즈니스 영역으로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보닝턴은 히말라야에서의 위대한 등반 경험들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아 왔다. 디킨슨은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후 그의 탈진한 모습을 사진에 실어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고, 갈렌 로웰은 사진기술과 클라이밍 기술을 절묘한 이미지로 조합시키면서 풍부한 감성과 사진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현대의 산악사진은 오케스트라와 같이 철저히 연출되는 상업적인 사진보다는 등반 과정에 비중을 두는 작업이 되어야 기념품로서의 정신에 충실한 작품이 탄생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그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모험하는 클라이머의 영혼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근대의 산악 사진가들은 등반기록의 전달과 창작의 경계선에서 이미지 창출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등반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무시하고 영상 아티스트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산악인들은 새로운 대상지를 찾아 줄기차게 도전에 나서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산악인의 모험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어느 한 순간을 영원히 상기시키는, 산으로부터 얻는 최종 기념품으로서 산악사진은 그 역활을 다해야 한다.
< Souvenirs From High Places > 에서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