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상장의 뜻
교학상장은 스승과 제자가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런 해석에 반대한다. 나는 스승과 제자를 둘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것도 자기이고 배우는 것도 자기라고 생각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하는 모든 노력은 곧 교학상장의 과정이다.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고 자기가 자기에게 배운다. 자기 안의 부단한 대화와 연습 과정이 자기를 성장시킨다.
나는 타인을 가르치기 위해 배우는 것에 반대한다. 타인을 가르치기 위한 배움이 자기의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자기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그 안에 배움이 깨어나고 가르침이 살아난다. 지성과 실천이 삶과 함께 한다. 타인에 대한 가르침은 배움의 나눔이거나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가르침이 그 자체로 독립하는 순간 우리는 자율적 배움을 죽인다. 가르치지 마라. 오직 배우고 노력하라.
몸과 마음을 다함
박정희의 가장 악한 일 중 하나는 우리의 언어를 심하게 왜곡하고 뒤틀리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중학교 때까지 매주 월요일 운동장 아침 조회시간에 외우던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박정희 자신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 혈서로 썼던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지로(犬馬之勞)’의 다짐과 일치한다는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박정희는 전 국민을 자신의 아바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덕분에 ‘몸과 마음을 다하’는 ‘충성(忠誠)’이 참으로 더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다하’는 ‘충성’은 배움과 삶의 최고 방법이다. 조상들이 삶의 방편으로 삼았던 태도이다.
‘몸과 마음을 다하’는 ‘충성’ 몰입은 교육의 가장 좋은 방법이고, 사랑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공부도 그렇지만 사랑도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삶도 그렇다. 아마도 이것이 조상들이 살고자 했던 인생의 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생 최고의 기술을 사람과 공동체가 아닌 독재자과 국가폭력을 위해 쓰라고 박정희는 전 국민을 세뇌시켰던 것이다.
새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삶의 길을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