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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의 봄
博川 최정순
명지바람 나풀나풀 춤사위
새초롬히 버들가지 애무하는데
감자 고구마 어린 손 슬그머니 벌리네
미소로 정다웁게 재롱떠는 꽃길
봄 햇살 자박자박 까치걸음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날아들고
쇼윈도 책 찢어 마구 던진 모습에
창작의 무늬 쑥쑥 발돋움질
작가의 고뇌 반추하며 흩어져 있네
헤이리 봄의 향연
여기저기 꿈틀꿈틀 속살거리며
생명의 꽃 피우고 있더라.
위도의 꽃
博川 최정순
해무에 온몸 포박당한 격포항
잠시 갈 길 잃고 서성이다
핵 폐기물에 몸살 앓았다던
궁금하고 궁금하여 찾은 위도
허균의 이상세계 율도국
고슴도치 닮았다 위도蝟島라네
가파른 망월봉 비척비척 오르니
넓디넓은 해변 그림처럼 누워 있고
험준한 봉우리 내려가다 보니
자장율사 창건한 내원궁 내원암
나를 잠시 쉬어 가라 하네
암자 대청마루 앉아 눈길 멀리 던지니
망망한 푸른 물결 보며 퍼렇게 울다 지쳐
길마다 산등허리마다 꽃 피운 상사화
하얀 미소로 육지 향해 하늘거리며
포구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그리움 가득 안고 하얀 손짓하네.
봄꽃
博川 최정순
어린 별 종종종 내려와
눈물방울 흩뿌려지는 밤
닫혔던 꽃잎 살며시 열며
여명의 길 숨가쁘게 달려온
눈부신 햇살 가득 먹고
전신 불태우며 가냘픈 날갯짓
붉은 얼굴 가득 미소 물들이고
독보다 더 짙은 향기 품어
섬세한 미소로 아침 인사하며
활짝 웃는 너의 꽃다운 모습
호수 같은 그리움 밀어 올려
온몸으로 벌 나비 유혹하여
자연을 재창조하는 너는,
신의 축복 어린 선물이구나.
봄(1)
博川 최정순
저 멀리서 여명 기웃거리는
청갈치빛 유리창 활짝 여니
깊고 깊은 대지 자궁 속
겨우내 숨었던 양기 기지개 켜자
온몸으로 봄 부르며 다가온 밤비
옷자락 길게 끌고 간 자리엔
나뭇가지마다 생명 아롱아롱
비둘기 빗물에 세수하며
웃구구구구 노래하는데
황홀하게 활짝 웃는 햇살
개나리 진달래 살포시 내려앉고
깊은 계곡 얼음장 녹이며
저 먼 언덕에서
봄 개화開花하여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꽃무덤
博川 최정순
비 오면 비 와 울고
바람 불면 바람 불어
온몸 뒤채며 흔들리다
불타는 열병 소진 못해
탁탁, 희나리 튀는 듯
쓸쓸함 가슴 적시는 밤
님 향한 그리움
보름달처럼 휘황한데
꽃눈개비에 부서진
결별의 발자국 멀고 멀어
당신의 잔혹한 뒷모습
처연하다 못해 외로웁고
죽어 가는 모습으로
오늘도 몸부림치며 꽃보라
하롱하롱 분분히 흩날리다
동살 덮는 애절한 나의 꽃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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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의 꽃들
博川 최정순
미숙이 돈석이 나와 함께 살다
떠나 버린 텅 빈 전설 같은 집
장독대 주변 이들이들 핀 꽃들
어제의 향기 아련히 꿈틀거리고
돌배나무 가지 위 참새 기웃거리면
허리 허물어진 돌담 아래
사금파리 무덤에선 조무래기들
재잘거리며 튀어나온다
미숙이, 돈석이, 나
미숙이 족두리꽃 머리에 얹어
시집갈 준비하고
돈석이 분꽃 목에 걸어
님 맞을 준비하였는데
미숙이 십팔 세 폐병
순백합화로 고개 숙여 다시 피어나고
반백이 다 되도록 돈석이 시집 안 가
허리 굽은 순할미꽃 되었네
도깨비 불꽃으로 살다가는 나,
심심산천 시들지 않는 도라지 꽃
마음에 가득 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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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저수지
博川 최정순
설화산 허벅지 기산리 위
젖무덤 사이 작은 저수지
까까머리 단발머리
규섭이랑 춘심이랑 가재 다슬기 잡다
푸른 음모 우거진 수초 아래 더듬으면
송사리 피라미 참붕어 많기도 했지
매운탕 끓여 놓고 물수제비 뜨면
입 큰 개구리 깨금발로 걸어 나와
입 크게 벌리고 뱅글뱅글 함께 웃었지
우렁이 녀석 물방울 몽글몽글 만들면
쇠백로 눈길 피해 우렁이 잡아먹던
저수지 훼방쟁이 말썽쟁이 웅어
규섭이 한 손에 냉큼 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걀걀 웃었지
매운탕 먹고 장수잠자리 쫓으며 낮 보내고
밤이면 반딧불이 잡아
호박꽃에 가두고 마을 휘저었지
규섭인 판사 되던 해 등반 사고로 죽고
규섭이 좋아하던 춘심이
시집가서 한 달 만에
이 저수지 뛰어들었는데
그네들은 간 곳 없고.
저수지 담 아래
봉숭아꽃만 노을에 더 붉네.
산국화를 보며
博川 최정순
고향 그리워
인적 없는 산골짜기 찾아드니
너희들 무더기 져 황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구나
너의 얼굴 얼굴 속 드리운 그리운 흔적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얼굴들
아버지 밤나무 가지로
숟가락 만들어 줘 소꿉놀이하던 친구
어머니 헌옷가지 인형 만들어 줘
신랑 각시 놀이하던 저 세상 명구
구매박골 계곡 물 가둬
멱 감고 물장구치던 동무들
돌틈 엉금엉금 기어가는 앙증스런 가재 보며
개울물에 희희덕거리며 빨래하던 너희들은
모두 내 기억의 모퉁이로 돌아서고
산에 핀 국화에서
너희들을 찾고 그리는가.
하얀 카네이션
博川 최정순
자식 농사 소박하나 구순하여
아이들 명랑하고 씩씩하니
저승 가면 조상님 뵐 면목 선다며
서쪽 하늘 보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
아버지 낳으시고 아껴 준 어진 은혜
염치없는 핑계로 피하고 피하다
창졸지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니
아쉽고 그립기 그지없어라
목매어 불러도 대답 없는 북녘 고향
그리고 그리다 지친 한 많은 세월
가슴앓이 하던 아버지 가신 지 몇 년 지나
하늘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모으고 모아 어렵사리 시집 펴내니
북에서 온 혈육 언니 시집 보고
인연인지 기적인지 기별 닿아
어버이날 영전에 꽃 두 송이 바치니
부족하고 부족한 딸들의 회한
아버지 가슴처럼 숯덩이 같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며
딸들이 올린 하얀 카네이션 달고
아이처럼 밝게 활짝 웃고 계시네.
꽃불
博川 최정순
봄 오면 아름다운 꽃들 얼굴 내밀고
서로 반기며 눈웃음 짓지요
사랑스런 해맑은 미소로
봄버들 봄바람에 살랑거리면
하늘 어디선가 눈가 이슬 맺혀
북녘 바라보는 아버지
수없이 오가는 봄
아, 작별 인사 없이 남북으로 갈라져
부모 형제 그리며 산 모진 세월
그리움 꽃잎 되어
텅 빈 가슴에 겹겹이 내려
당신의 꽃무덤 적시니
아버지 꽃불로 환생하여
아지랑이 타고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네.
자유로에서
博川 최정순
자유로 달려
임진각 가는 길
평양 개성 77 표지판
언제부터 있었나
배꼽 걸려 숨통 끊긴
저 철책 꼬리 감추면
북으로 북으로 단숨에 달려
아버지 고향 박천 당도하여
혼이나마 해후하련만
말로만 자유로 가장자리엔
봄꽃 아우성치며 부서지는 임진강
속으로 울며 여울지는 피눈물은
고향 떠나 서럽게 살다간 아버지 통곡.
이름 없는 들꽃에게
博川 최정순
천둥 비바람과 싸우며
날밤 새워 낙화 위해 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너
독기 어린 향기 품고
찬 이슬에 고개 숙이다
서리 맞아 떨어진다고
가슴 뜯으며 울지 마라
누군가의 발길질
어느 누가 던진 돌
머리통 산산이 깨어져도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야생화
博川 최정순
멀고 깊은 산길
명지바람 흔들리는 잡목 사이
너 고개 숙여 수줍은 미소 짓는데
잠깐 고개 숙여
이름 없는 너를 보며
제자리 종종 돌다
황망히 네 자리 떠나며
등 돌려 뒤돌아보니
아주 오래전
알았던 사람이던가 싶어
가던 걸음 멈추고
쉬이 못 가네.
구름꽃
博川 최정순
하늘에 덩실덩실 떠 있는
터질 듯 부풀은 구름
타래마다 사랑 행복 희망 담고
하늘하늘 몽실몽실
날이면 날마다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다니다
억겁의 인연 찾아
오늘도 서로 어울리는데
저 하늘 집이던가 고향이던가.
청옥처럼 푸른 하늘의 하얀 꽃밭
해 서편 바다 빠질 무렵
붉은 구름꽃 활짝 만발한다.
백합(1)
博川 최정순
병상 누운 언니
족쇄 달린 걸음걸음
거북같이 더디 가는데
시절은 거침없이 내달려 초여름
언니가 마당 한켠 심어 놓았던 백합
이제 별처럼 도톰한 입술 내밀고
외줄기 순결한 향기 독하게 뿜어내네
탈북 길 올랐던 언니
이념은 사정없이 무너지고
붉은 눈물만 흘렸지
오늘도 언니의 백합
신부마냥 곱게 피어나는데
당신은,
하얀 날개 찢겨 결박당한 채
그늘 속에서 통곡하네.
백합(2)
博川 최정순
처녀처럼 순결한 영혼
순정한 사랑 밖에 몰라
하얀 눈물 흘리다
흘러가는 강물에
님 떠나보내고
흰 백합 시들어
향기 독기 되어 퍼지며
검은 눈물 흘리네.
모란
博川 최정순
태백산맥 준령 넘어
비탈길 따라 내려오던
뜨겁고 칼칼한 풍염風炎의 이향異香
대지 가슴 사무치게 붉어지며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는데
부질없이 붉어진 고개 떨구니
나 두고 가는 급한 바람
잠시 더 쉬어 가면 좋으련만.
민들레
博川 최정순
임진강변 철조망 날아가
싹 틔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 아니더라도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북녘 향해 북바라기하며
피어나는 외줄기 그리움
매일 새로이 꽃을 피우며
개화開花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잔잔히 미소 짓는
철조망의 민들레.
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외눈박이꽃
博川 최정순
겨울에 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는 꽃
충혈된 한쪽 눈 세상 응시하며
봄이 와 다시 꽃 피우기 위해
돌처럼 바싹 마른 가슴
청량리역 장승처럼 서 있다가
관절염 삐걱대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다리 끌고
꽃바람 허위허위 휘몰아치는
고원 태백 몸 내려놓으니
역전 옆 24시 찜질방
한 쪽 눈 반쯤 감은 도깨비 같은 영혼들
잠자리 찾기 위해 이리저리 유영하는데
외눈박이꽃,
천상의 희미한 별 바라보며
자신의 생살을 짓씹는다.
망향초(望鄕草)
博川 최정순
탈북 언니 작품 읽다보니
가슴만 답답하다.
하고 싶은 말 돌리고 돌리다 보니
도대체 무슨 말하려는지 알 수 없고
머리 속 안개만 자욱하다.
자유 찾아 아버지 찾아
돌고 돌아 건너 온 땅
아버지 이미 혼불되어 고향 갔고
언니는 관리대상 되어
자유가 자유를 구속하여
한맺힌 철조망만 부여잡고
망향의 꽃이 되어
다시 북녘 그리며 운다.
망향초(望鄕草)
博川 최정순
일죽 유토피아
아버지 안치하고
오는 길섶
모질고 척박한 땅
무더기 지어 피는
아버지 닮은 흰 망초 꽃
황금빛 놀에 환하게 웃고 있네.
누구를 탓하랴
그저 세월이 그랬던 것
너도 가족과 이별하고
바람결 묻어와
이 강산 수많은 사연 흩날리며
청천강서 설화산 거쳐
아버지 따라 일죽까지 오지 않았더냐.
순결한 학의 삶으로
길가에 조용히 누워
바람 따라 잔잔히 물결치며
미소 짓는 망초 꽃
흰옷 즐겨 입고 늘 웃으시던
아버지 닮았구나.
너를 망향초라 부르리라
군항제에 내리는 꽃비
博川 최정순
벚꽃 질 무렵
진해 군항제 오니
꽃비가 폭포로 쏟아지는데
생전에 함께 왔던 날도 그랬지요,
아버지.
꽃비에
당신 사랑의 편린들
번뜩거려 정겹게 보이네요,
아버지.
갑자기 부는 사나운 바람
꽃비는 강물 되어 흘러가고
당신의 모습도 멀리멀리 흘러가네요,
아버지.
금은화(金銀花)
博川 최정순
네 이름 곱구나.
덩굴식물 인동초(忍冬草)
청송(靑松) 타고 올라
노랗고 붉은 꽃 피우고
겨울 모진 눈보라
참고 견뎌
소나무와 푸르름 더하니
아버지 모습 아니던가.
첫 어버이날
아버지 추모관에서
어떻게 보내셨지
인동초 붙잡고 물어보네.
봉숭아꽃
博川 최정순
황금 사과 손댄 적 없어
나 건드리지 마
결백 주장하는 봉숭아꽃
담장 밑 작은 모습으로 펴
한여름 장맛비
핏빛으로 피고 지는데
아버지,
꽃잎 따 돌에 곱게 빻아
백반 섞어 내 열 손톱 친친
다음 날 풀면
빨간 단풍 곱게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
한의 피눈물 자국
결백 자국이었네.
양지꽃과 매화의 대화
博川 최정순
아버지 처음 세상 보고
울음 터트린 2월 탄생화 양지꽃
세상 어디나 뿌리 내리고
작고 노랗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웃으며
타인 마음 만져주는 꽃
우리 집 뒤란
아버지 나 닮았다며 좋아했던 매화
너도 매화처럼,
고결하고 결백하게 살라고 늘 일렀지
장에 간 양지꽃
사랑 담은 얼굴로
매화 달린 내 리본 사왔지.
빨간.
선인장 꽃 (1)
博川 최정순
사랑, 열정, 정열
너처럼 생명 질긴 풀도 드물 것
자갈밭 모래밭 바위틈 틈, 틈
작은 틈새만 있으면 뿌리 넣어 새순 틔운다.
..
선인장의 삶 아버지,
달포 내내 친구 되던 선인장 꽃
마지막 한 송이 남겨둘 즈음
울 안 물앵두 다다귀다다귀 시뻘겋게 절정 이루고
둥굴레꽃 별처럼 피어나
푸르른 5월을 노래한다.
선인장 꽃처럼
아버지 시들어 가는데
어머니와 나는,
선인장 가시에 찔린 아픔에
눈물 마를 날 없어
아버지 정지되어 가는 시간 속으로
함몰한다.
선인장 꽃 (2)
博川 최정순
아버지,
대수술 받고 누워 있자
어머니,
배 불쑥 나온 작은 항아리
선인장 심어 아버지 눈높이 두다
봄 되자,
타원형 납작한 잎사귀
선인장 붉은 꽃망울 몇 개 열리더니
나팔꽃처럼 아래로 고개 숙여 피어
나선형 이층 짓다.
어머니,
먼저 핀 꽃 지려면
막 피려고 몽우리 진 곳
아버지 쪽 돌려놓다
선인장 꽃 정면에서 보면
고개 숙여 별 감흥 없었는데
아버지 누워 있는 각도에서 확인하니
꽃의 아름다움 배가 된다
자식들 화분
아무 꽃이든 담겨 있으면 그만
어머니,
고개 숙여 핀 꽃으로
아버지,
무료함 달래주는 효과 생각해낸 거지
어떻게 알았을까,
어머니는,
선인장 생명력을!
아버지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