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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와 위치
이 마을은 조선조 말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에는 도지동(陶池洞)ㆍ수동리(水東里)ㆍ탑선동(塔仙洞) 등 3개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일제(日帝)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도지동의 '도'(陶)와, 수동리의 '수'(水)를 따서 '도수리'(陶水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퇴촌면 소재지인 광동리와 연접해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에 도수초등학교와 광수중학교가 있다.
마을의 문화유적
조선백자 도요지
이 마을에는 15~16세기에 조선백자(朝鮮白磁)를 굽던 도요지(陶窯趾)가 9개소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물을 보면, 청화백자ㆍ분청사기ㆍ철화백자 등 다양한 사기(砂器)를 굽던 가마터였다. 그 중 3개소는 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심우승(沈友勝)ㆍ심 액(沈 )의 묘
도수리 산70번지에는 심우승(沈友勝)의 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심우승은 조선 선조대(宣祖代)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진주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다녀왔다. 이후 승지(承旨), 호조참판(戶曹參判),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훈되고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심 액(沈 )의 묘도 나란히 있는데, 그는 효종대(孝宗代)의 文臣이며, 대사헌(大司憲)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순흥 안씨묘역
안향(安珦)의 7대손인 안근(安瑾)의 묘는 도수리 산72번지에 있는데,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이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하였고 그의 후손들의 묘가 같은 묘역(墓域)내에 있다.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묘
조선 세종대의 인물로 회천위(懷川尉) 황유(黃裕)의 묘와 그의 부인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묘가 도수리 산75번지에 있는데, 황유는 태종(太宗)의 사위이고, 숙안공주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누이이다.
도지동(陶池洞)
예전에 이 마을 앞에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연못가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어서 그 연못의 이름을 '도지'(陶池)라고 불렀는데,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광동리에서 88번 도로를 따라 천진암 방면으로 올라가다가 도수교(陶水橋)를 건너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집성촌이며, 도수1리이다.
수동리(水東里)-참샘이
조선조 초기부터 불려온 이름인데, 이 마을에 살던 김생원의 집 안마당에서 물이 솟아올라 샘을 파고 보니 그 물이 매우 차고 맑아서 '참샘'이라고 했으며, 이 마을을 '수동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수초등학교와 광수중학교가 이 마을에 있다. 도지동에서 남쪽으로 연해 있고, 농경지가 비교적 많아서 풍요로운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농경지에 많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의 집성촌이며, 심우승(沈友勝)의 묘가 이 마을에 있다.
도수2리이다.
삼백골(三白谷)
예전에 이 마을에 백(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세 사람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부유하게 살면서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인정이 넘쳐 존경을 받고 살았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삼백골'이 되었다고 한다.
88번 도로를 따라 양평방면으로 좌회전 하면서 처음 닿는 마을이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다. 도수3리이다.
탑선동(塔仙洞)-탑선이
조선조 초기에 이 마을에 탑이 있었는데, 그 부락에 살고 있는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이 탑 앞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백골에서 양평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조선백자(朝鮮白磁) 도요지(陶窯趾)가 8개소 발굴되었으며, 도수3리이다.
능안
참샘이(도수2리)의 심우승 묘 밑에 있는 골짜기인데, 심우승의 묘가 능(陵)과 같이 모셔져 있어 '능안'이라고 불러왔다.
기새울
도지동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부터 순흥 안씨의 묘를 관리하던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동동산
참샘이 마을에 있는데, 산이라기보다 조그마한 구릉인데 마치 물동이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곳에 개인 묘가 1기 있다.
된양지
도수3리에 있는데, 양지가 바르고 볕이 잘 들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골짜기가 가파르기 때문에 '된양지'가 되었다고 한다.
마산(馬山)
참샘이에 있는 산인데, 능선 모양이 말잔등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기장골(砂器匠谷)
도수3리의 된양지 옆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 사기장이(도공)들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랑방ㆍ학아동(學兒洞).
참샘이(도수2리)의 도수초등학교가 있는 자리이다. 예전에는 서당이 있었는데, 이 곳에 글공부하러 학동들이 모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한절
도지동(도수1리) 국사봉 밑에 예전에 3간 정도 되는 작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없고 이름만 남았다.
섬말
참샘골의 산 밑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참샘이 마을과 동떨어져있어 '섬말'이라고 불러왔다.
쇠메기-쇠뫼기
88번 도로를 따라 영동고개(염티고개)를 오르기 전에 있는 마을인데, 예전에는 이 곳에 풀이 많이 나서, 소먹이를 이 곳으로 베러왔다고 한다. '소의 먹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 '쇠메기-쇠뫼기'가 되었다.
오래실마을
도수2리의 있는 작은 부락인데, 이 곳은 한양 조씨(漢陽 趙氏)와 익산 임씨(益山 林氏)들이 세거(世居)하여 왔다.
지새울 마을
도지동(도수1리)에 있는 작은 마을로,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재각(齋閣)이 있고, 묘지기들이 살던 마을이다.
국사봉(國思峯)
도지동의 뒤에 있는 산인데, 도수리와 오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 봉우리이다.
이 곳에서 옛날 몰락하여 이곳에 와서 우거하던 선비들이 이 산에 모여 나라일을 걱정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퇴촌면의 면명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특히 태종(太宗)의 총애(寵愛)를 받았던 한산군(漢山君) 조영무(趙英茂)가 노약하여 정계(政界)를 은퇴하면서 광주(廣州)의 동쪽 마을인 광동리(光東里)로 와서 말년을 보내면서 호(號)를 '퇴촌(退村)'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의 호가 면명(面名)이 된 것이다. 또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의하면, 고려말에 왕(王)씨와 백(白)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의 상서(尙書)가 나라가 패망할 때를 당하여 함께 조정(朝廷)에서 물러나 이 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을 맞대고 이웃이 되어 살구나무를 수백 그루 심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마을 이름은 '상서동(尙書洞)' 또는 '행방(杏坊)'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상서(尙書 고려시대 정3품 문관벼슬)가 퇴촌하여 살았다고 하여 '퇴촌(退村)'이라는 고을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퇴촌면의 위치와 지형 지세
퇴촌면은 광주시청으로부터 약 8km 정도 동북방향에 위치하며, 경안천이 본 면내(面內)를 관통하여 팔당호(八堂湖)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앵자산(鶯子山)에서 발원하여 우산리(牛山里)ㆍ관음리(觀音里) 협곡을 거쳐 유입되는 우산천(牛山川)이 도수리(陶水里)ㆍ광동리(光東里)를 거쳐 팔당호로 흘러들어간다. 남으로 초월읍(草月面)의 무갑산(武甲山)과 동으로 앵자산(鶯子山)ㆍ우산(牛山)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동쪽으로 국사봉(國思峯)을 중심으로 양 날개를 편 듯 산자수려(山紫秀麗)한 고장이다. 동쪽은 여주군(驪州郡) 산북면(山北面)과 경계를 이루고, 동북방향으로는 영동고개를 넘어 양평군(楊平郡) 강하면(江下面), 서쪽은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상번천리(上樊川里)와 하번천리(下樊川里)를 경계로 하며, 남쪽은 광주시 초월읍 무갑리와 신월리(新月里)에 접하고, 또 실촌읍(實村面) 건업리(建業里)와는 앵자봉을 경계로 하고 있다. 북쪽은 광주시 남종면(南終面) 이석리(二石里) 그리고 하남시(河南市)와 접해 있다.
퇴촌면은 광주시의 특징인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곳이나, 농경지는 비교적 많아서, 조선시대의 둔전(屯田)이 정지리(亭支里)ㆍ광동리(光東里) 일대에 많이 있었다. 지금도 퇴촌면은 팔당호와 우산리 천진암(天眞庵) 계곡 등 수려한 자연경관이 좋아서 도시민들의 일일 휴양지로 각광 받고 있다.
우산리(牛山里)에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天眞庵)이 있어 천주교회에서는 이 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세계적인 대성당(大聖堂)을 건설 중에 있다. 퇴촌면은 중부면 상번천리에 있는 중부고속도로 경안 IC에서 나와 43번 국도에서 42번 국도로 들어서서 도마리(道馬里)를 거쳐 팔당댐을 건너 서울~홍천간 6번 국도와 닿는 도로와 88번 도로가 도마리(道馬里)에서 광동리를 거쳐 영동리(嶺東里)를 지나 양평군(楊平郡) 강하면으로 통하며, 광동리에서 정지리(亭支里)ㆍ원당리(元堂里)를 지나 초월읍 신월리(新月里)ㆍ선동리(仙東里)ㆍ늑현리(勒峴里)를 거쳐 실촌읍 곤지암리(昆池岩里)로 통하는 308번 지방도가 있다. 광동리에서 조선시대 왕실백자 도요지(陶窯趾)이며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있던 남종면(南終面)으로 통하는 337번 지방도가 개설되어 있다.
*퇴촌면의 행정구역과 연혁
퇴촌면의 행정구역은 조선조 광무8년(1904)에는 도마동(道馬洞)ㆍ과학동(過鶴洞)ㆍ삼정동(三政洞)ㆍ족자동(簇子洞)ㆍ석림동(石林洞)ㆍ석호동(石湖洞)ㆍ배알미동(拜謁尾洞)ㆍ금사동(金沙洞)ㆍ오리동(梧里洞)ㆍ동대동(東垈洞)ㆍ지위동(支渭洞)ㆍ정자동(亭子洞)ㆍ지위동(支渭洞)ㆍ광복동(光福洞)ㆍ도지동(陶池洞)ㆍ수동리(水東里)ㆍ탑선동(塔仙洞)ㆍ상관음동(上觀音洞)ㆍ하관음동(下觀音洞)ㆍ하우산동(下牛山洞)ㆍ상우산동(上牛山洞)ㆍ영동리(嶺東里) 등 22개 동리였으나, 일제(日帝)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3개 리ㆍ동으로 축소하였다.
도마리(道馬里)-도마동을 도마리로 고쳤다.
삼성리(三成里)-과학동ㆍ삼정동ㆍ족자동을 합침.
이석리(二石里)-석림동과 석호동을 합침
배알미동(拜謁尾洞)- 동부면(東部面)으로 편입함.
금사리(金沙里)- 금사동을 금사리로 고쳤다.
오리(梧里)-오리동을 오리로 고쳤다.
광동리(光東里)-광복동과 동대리를 합침
정지리(亭支里)-지위동과 정자동을 합침
도수리(陶水里)-도지동ㆍ수동리ㆍ탑선동을 합침
관음리(觀音里)-상관음리와 하관음리를 합침
우산리(牛山里)- 상우산리와 하우산리를 합침
영동리(嶺東里)-영동리를 그대로 둠.
그리고 草月面에 속해 있던 원당리(元堂里)와 무수리(無愁里)를 편입하여 퇴촌면의 행정구역으로 삼았다.
면(面) 행정의 시작은 1912년 관내 이석리(二石里)의 개인가옥에서 집무하다가 광동리로 면사무소(面事務所)를 옮겨 현재도 면사무소가 광동리에 있다.
1956년에는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동년 8월 8일에 면장과 면의원선거가 있었는데, 초대 민선 면장에 한이석(韓理錫)이 당선되었으며, 아울러 면의회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의 장 이철규(李喆珪) 퇴촌면 오리
부의장 안건영(安建英) 도수리
의 원 안호송(安浩松) 도수리
김창식(金昌植) 관음리
최성익(崔成翊) 도마리
임인식(林仁植) 광동리
김진영(金鎭永) 금사리
윤인섭(尹仁燮) 관음리
김만복(金晩福) 원당리
안동수(安東洙) 도수리
강대억(姜大億) 영동리
1972년 팔당댐이 건설되어 광주시 남종면이 수몰(水沒)되는 곳이 많아짐에 따라 1973년 7월 행정구역(行政區域)이 개편되어 퇴촌면 금사리(金沙里)ㆍ삼성리(三成里)ㆍ이석리(二石里)가 남종면으로 편입되었고, 퇴촌면은 광동리(光東里)ㆍ관음리(觀音里)ㆍ우산리(牛山里)ㆍ영동리(嶺東里)ㆍ도수리(陶水里)ㆍ오리(梧里)ㆍ도마리(道馬里)ㆍ무수리(無愁里)ㆍ원당리(元堂里)ㆍ정지리(亭支里) 등 10개의 법정리(法定里)를 갖게 되었다.
팔당댐이 생기면서 광동리가 많은 면적이 수몰(水沒)되어 지금의 위치로 이주(移住)하게 되었고, 아울러 퇴촌면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을 뿐 아니라, 상수원보호구역(上水源保護區域)이며, 전 지역이 또한 팔당호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 1권역으로 되어 있어 자연(自然)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퇴촌면의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도수초교), 중학교 1개교(광수중)가 있다. 우산리에는 도수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학생수의 부족으로 폐교(閉校)되었고, 지금은 이 지역(地域)의 아동들이 모두 도수초등학교로 다니고 있다. 우산리에는 청소년수련원이 도립(道立)으로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여타 수련원들도 산재(散在)해 있다.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아서 정지리(亭支里) 시설영농단지(施設營農團地)에서는 토마토를 주로 생산하며, 해마다 토마토 축제(祝祭)를 거시적(擧市的)으로 열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퇴촌면에 둔전(屯田)이 많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수어청(守禦廳) 군량미(軍糧米)를 이 곳에서 많이 공급한 기록이 있다.
성씨(姓氏)의 분포상황을 보면, 오리ㆍ도수리ㆍ정지리에 순흥 안씨(順興 安氏)와 정지리의 남원 양씨(南原 梁氏)와 청주 한씨(淸州 韓氏), 광동리 관음리의 익산 임씨(益山 林氏), 도수리의 순흥 안씨(順興 安氏)ㆍ한양 조씨(漢陽 趙氏), 그리고 영동리의 충주 지씨(忠州 池氏), 도마리의 삭령 최씨(朔寧 崔氏), 원당리의 함양 박씨(咸陽 朴氏)가 퇴촌면의 대성(大姓)이다.
퇴촌면의 문화유적(文化遺蹟)
선사시대유적
퇴촌면은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마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이 증명되었다.
조선백자도요지
오리(梧里)에서는 고려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남종면 분원리에 있었던 관계로 퇴촌면에는 조선백자 도요지(陶窯地)가 60여 개소나 발견되었는데, 주로 도마리와 관음리, 그리고 우산리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조선백자 주산지의 한 곳으로 보아도 된다.
선현들의 묘
예전부터 퇴촌면은 산세(山勢)가 좋아,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묘소(墓所)가 많다. 도마리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33호인 조선 세종(世宗)대에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많은 집현전(集賢殿) 학자이며, 정치가인 문정공(文靖公)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의 묘가 있고, 영동리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인 조선 인조(仁祖)대에 영의정(領議政)이며, 조선 중기의 한문학(漢文學) 4대가의 한 분인 문정공(文貞公)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퇴촌(退村)이라는 면명(面名)을 갖게 한 한산군(漢山君) 조영무(趙英茂)의 묘가 광동리에 있고, 도수리(陶水里)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진주사(秦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서 공을 세우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한 청계부원군(淸溪府院君) 심우승(沈友勝)과 그 후손들의 묘가 있다. 도마리에는 조선 중종(中宗)대에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안당(安瑭)의 묘가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역사인물들의 묘가 있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우산리에 있는 천진암(天眞庵)은 한국 천주교(天主敎)의 발상지(發祥地)이며, 성지(聖地)로서 많은 천주교 성인(聖人)들의 묘소가 있고, 백년대계로 성당(聖堂)을 건설하고 있으며, 지금도 참배객(參拜客)이 줄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