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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긴 여로
김일중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간단한 단기 선교 가는데 거창한 말씀으로 서두를 장식하는 것이 좀 어색하지만, 교회학교 고등부 부감인 나는 연초부터 베트남을 생각했다. 몇 십 년 전에 읽었던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이라는 소설을 감명 깊게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 전 일이지만.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이 931번의 침공을 당했지만 침략 전쟁에 참가한 것은 단 한 번, '월남 전쟁'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베트남에 대해서 사죄하고 회개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나라가 근대화에 성공한 계기를 새마을 운동으로 꼽지만, 그 이면에는 월남전에 참가함으로 인한 반사 이익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고 들었다. 일본이 1945년 패망한 후, 육이오 민족상잔으로 인한 반사 이익 때문에 경제가 부흥했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베트남에 감사해야하고 보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일 개 국민으로서 할 일이 무엇일까, 내 위치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우리 교회 학교에서 '해외 단기 선교' 얘기가 나돌기 시작하자, 나는 과감하게 전도사님께 '우리 고등부는 베트남으로 갑시다.' 라고 건의 했다.
전도사님은 이 건의를 수용하셨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 선교 대회' 기간에 '김남균 선교사님'을 우리 '고등부'에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다가 작년에 '베트남 단기 선교'를 다녀왔던 '아동 1ㆍ2부'의 '최지원' 선생님이 또 지원하셔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팀장 선출에 있어서도 부감인 내가 회계를 맡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직 고등학교 영어 교사고, 기도 많이 하시고 영성이 탁월하신 장경원 선생님을 팀장으로 추대 했는데, 선선히 받아들이셨다.
한 때는 지원자가 17명까지 되었으나 가장 적절한 인원, 13명으로 압축되었다. 선교회비는 1인당 100만 원으로 했는데, 내가 무심코 한 말이 그대로 확정되었고, 팀장인 장경원 선생님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인원 선별, 선교회비 사용 방법을 결정하게 했다. 학부모가 억지로 보내려 했던 학생이 포기하게 된 것, 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 꿈을 접으려 했던 학생을 팀장이 지원하여 꿈을 이루었던 것, 지원은 했지만 꿈을 통해 못 가게 막는 바람에 포기한 교사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고 은혜라고 확신했다. 출발 일자가 가까워질수록 내 자신에게도 사탄의 방해가 침입해 왔다. 갑자기 관절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몸살을 앓기도 했다. 지천명 오십 나이에 체력적인 부담이 생겼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나를 오십 노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꾸준히 헬스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관리해 왔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청년들이나 다름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나라 단기선교단 23명이 피납되는 사건이 터졌다. 어쩌면 우리도 저런 상황을 겪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지만 이럴 때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진행해 나갔다.
비행기 티켓팅은 내가 맡아서 진행했다. 우리 교회 이은상 안수집사님이 여행사를 운영하셔서 그 분에게 의뢰를 했다. 그 분은 우리가 출발하기 하루 전인 주일 점심 때 쯤에 인터넷 티켓 확인서를 가져 오셨다.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포기한 사람 이름이 두 명이나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가야될 두 사람이 빠진 것이다. 그런데다가 휴일, 또는 근무 시간 외에는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우리가 월요일(2007. 8. 13.) 저녁 8시10분에 출발 예정이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끊임없는 사탄의 방해가 틈탔다. 아직도 포기한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 가게 되었는지 미스터리다. 출발 당일 오전에 나는 안절부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시가 넘어서 여행사 이은상 안수집사님께 연락 했더니 출근하고 있다고 그랬다. 그러나 내 성미대로 할 수 없었다. 11시 반이 넘어서 연락이 왔다. 예약 사항을 내 이메일로 보내 왔다. 그제 서야 안도의 한 숨을 쉴 수 있었다. 오후 2시까지 교회에 집합하라고 팀원들에게 공지하고 공항까지 갈 대형버스를 대기 시켰으나 팀장이 늦게 나왔다. 팀장은 팀장 대로 생각이 있어 오후 3시에 모이라고 얘기 했다고 한다. 아차, 싶었다. 내가 팀장이 아니지. 어제 저녁 늦게까지 꾸려 놓았던 15개의 박스 꾸러미를 팀원 두서너 명과 대기 중인 차에 옮겼다. 운전 기사는 약속한 시간 보다 너무 늦다고 불평했다.
한 시간 조금 넘어 공항에 도착했고,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단체 예약표를 가지고 단체 항공권을 발급 받은 후 짐을 부치는 창구로 이동했다. 그리고 비행기 탑승을 위한 플랫폼으로 들어가기 위해 검열을 받았다. 시간 여유가 좀 있어서 저녁 식사를 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비가 끊임없이 내렸다. 1시간 정도 이륙이 지연된 다음 호치민을 향해 출발했다. 4시간 정도의 비행 시간 이었지만 나에게는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무릎이 쑤시고 어떤 고도에서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가 아프고 먹먹해 졌다. 출발은 1시간 지연됐지만, 도착은 정상적인 시간에 도착된 것 같았다.
호치민 외곽의 허름하고 작은 공항은 그런 대로 소박하고 조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입국 관련 서류를 작성 했고, 여행 목적으로 베트남에 왔다고 기록했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찾는 곳으로 이동 했다. 그 때 우리 보다 짐이 많은 다른 교회 선교팀도 같은 비행기에 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주현이 여행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 주현이는 어쩔 줄 모르고 눈물만 흘렸다. 영어에 능통한 장팀장님이 공항 관계자들과 장 시간 얘기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연락처를 남기고 1시간 정도 지체한 다음 공항 건물을 빠져 나왔다. 김남균 선교사님 부부와 현지인 전도사님 부부 그리고 세 분 정도 더 나와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부랴부랴 베트남 특유의 다인승 택시를 타고 시내 '게스트 하우스'라는 조그만 호텔로 이동했다. 서너 명 씩 분산해서 방으로 이동 했다.
그래도 호텔이라 에어콘이 가동되었다. 그러나 옷장은 썩은 냄새가 나서 사용할 수 없었다. 여장을 풀고, 3층에 있는 제일 넓은 방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선교사님 말씀은 이삭의 잉태와 세례 요한의 잉태에 관한 것이 었다. 간단한 예배가 끝나고 장팀장님이 중요한 말을 꺼냈다. 자신이 지금 임신 16주 째라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섭리하심에 놀라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40대 중반의 장팀장님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섭리에 경외의 소름이 돋는다며 팔을 내 보이셨다.
다음 날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선교사님의 본거지 '영산 제자 훈련 학교'로 갔다. 4층 건물을 임대해 쓰고 있으며, 더 크고 넓은 건물을 구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기도 중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모인 곳은 4층 대강당 이었는데, 말이 대강당이지 다섯 평 남짓되는 좁은 성전 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베트남 청년(남녀)들이 제자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줄잡아 20명 정도 되는 베트남 젊은 형제 자매들과 상견례를 나눴다. 그리고 선교사님을 모시고 간단한 예배를 드렸고, 컴퓨터 구입 헌금과 특별 헌금 등을 선교사님께 드렸다. 알락미와 돼지 고기로 만든 식사, 후식으로는 베트남 특유의 열대 과일이 나왔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는 우리팀과 베트남 현지 형제 자매들과 자유스럽게 교제하고 찬양하고 율동하며 한데 어울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 선교사님 계획에 따라 네 개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까마오, 질린, 하오장, 긴장. 편도로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되는 곳이 까마오라고 말씀하셨다. 까마오는 8시간 정도 걸리고 다른 지역은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13명을 4개 조로 나누어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질린 지역에 좀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고 선교사님이 말씀하셔서 그 팀에 4명을 배정하기로 하고 조를 구성하기로 했다. 조장은 전도사님, 나와 장팀장님 그리고 부팀장인 최지원 선생님으로 정하고 조원들을 구성해 봤다. 순간적으로 나는 제일 멀다는 까마오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마오는 명랑하고 인상 좋은 하오의 고향이었다. 현지인 팀장은 까존으로서 신앙심이 두텁고 찬양에 달란트가 있는 청년이었다. 물론 기타도 잘 다루고 '영산 제자 훈련 학교'에서 제대로 훈련 받은 간사다.
우리팀은 일단 학생회장 최은혜와 박승재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까마오팀은 우리 셋과 까존, 하오 합해서 5명으로 구성 되었다. 저녁때 모든 사람이 모였을 때 선교사님께서 최종적으로 팀을 확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문제는 우리 까마오 팀에 은혜 혼자 여자라는 점이 좀 걸렸는데, 긴장팀에는 공교롭게 남자가 아무도 없었다. 은혜의 제안으로 긴장팀의 수연이가 우리팀으로 오고 승재가 긴장팀으로 가는 것으로 최종 확정했다. 사실은 나와 은혜는 차멀미를 하는 체질 이었는데, 이것 저것 계산할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여행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만찬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만찬이 되었다. 선교사님과 현지 형제 자매들이 준비 했었다.
그 건물 옥상에 상을 차렸는데 닭고기 요리, 야채, 빵 그리고 시원한 과일 주스에 한국 쌀로 지은 밥이 정말 푸짐했고 맛있었다. 문제는 식사 전부터 날씨가 흐렸고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다. 현지 전도사님의 식기도가 있은 다음에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성격 깔끔한? 나와 승재는 좀 걱정이 되었다. 비가 많이 쏟아지면 그릇 하나씩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자고 여유있게 말은 했지만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승재는 자꾸 부감님 비오면 어떡해요, 하면서 나를 쳐다 봤다. 이때 현지인 전도사님께서 부정확한 한국말로 '하나님 비 오지 않게 해주세요' 라며 크게 외치며 기도 했다. 사실 그 상황에서 비가 많이 쏟아진다면 엉망되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음식을 너무 많이 차려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눈치를 살피며 음식을 먹었다. 놀랍게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천둥 번개가 쳤지만 식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 식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저녁 10시 쯤에 게스트 하우스로 우리 한국인 팀들은 다시 돌아왔고 나와 전도사님은 별도로 선교사님을 따라 시장에 들러 과일의 왕, 두리안(샤우리안)을 사가지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는데 그 지독한 구린내 때문에 다들 먹지 못하고 나와 전도사님 그리고 장팀장님만 조금 먹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6시에서 9시 사이에 각 팀별로 게스트하우스를 출발했다. 우리 까마오팀도 8시 쯤 까존, 하오와 합류하여 15인승쯤 되어 보이는 승합차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이동 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길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길 자체야 2차선으로 열악했지만 남국의 경치를 만끽하기에 알맞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 되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황톳물같이 흐리고 넓은 강을 건너는 데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를 타기도 했다. 우리는 까마오가 육지고 산골 정도로 상상했다. 점심 때가 되어 잠깐 정차한 다음 점심을 먹었는데 나는 별로 못느꼈지만 은혜와 수연이는 음식이 입에 안 맞아 별로 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도 가도 까마오는 나오지 않았다. 도로 사정도 갈수록 안 좋아졌다. 그러나 우리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까존 때문이었다. 까존은 끊임없이 한국 말을 물어 보고 한국 찬양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나와 수연이는 열심히 가르쳐 주고 찬양을 불러줬다. 까존의 꿈은 한국말을 열심히 배워 한국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즐겁고 감사하고 은혜의 시간이었다.
정말 '까마득하오'의 준말 같은 까마오에 오후 5시 무렵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곳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까마오 시를 벗어나 외곽 지역으로 나왔다. 그리고 일종의 시외 버스를 기다렸다. 20분 정도 지나자 15인 승 정도 되는 허름한 차가 왔다. 차비를 계산하면서 그 차를 탔다. 낯 모르는 베트남 사람들이 동승해 있었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는 예상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입장 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정도 갔을까? 다른 허름한 차로 갈아타라는 것이다. 가도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길이었다. 또 한 시간 정도 갔는데, 한 12승 정도 되어 보이는 정말 폐차 직전의 차로 갈아타게 되었다. 그런데 차에 탄 인원은 20명 정도 되었다. 강물 가에 지어진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떤 곳은 수상 가옥도 보였다. 하오에게 지금 우리가 가는 곳도 수상 가옥이냐고 물어 봤는데, 그냥 웃기만 했다.
또 한 시간 정도 차로 달렸는데 드디어 종점이 나왔다. 어느 강가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한 떼거리의 오토바이 몰이꾼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들하고는 전혀 무관할 거라 생각하며 무시하고 시장을 관통해 강가로 나갔다. 아, 이제 강만 건너면 되는구나 하고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 곳의 배들은 카누 모양의 허름한 모터 보트였다. 많이 타 봐야 7~8명 정도 탈수 있는 길쭉한 배였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 탔을 때 정말 위험했다. 날이 어두워져 빨리 배를 타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하오와 뱃사공의 얘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뱃사공의 개인 사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땅거미가 깔려 오는 하구에서 우리는 정처없는 배를 타야 했다. 은혜는 배를 타자마자 '부감님 기도 해요' 하면서 비명을 지르다시피 말했다. 배가 강을 건너게 아니라 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형국이었다. 불빛이라고는 후레쉬 하나에 의존하며 카누 모터보트는 밤 강 길을 헤쳐 나갔다. 40분! 이 때처럼 절박하게 기도하고 찬양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강 폭이 7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카누는 멈추었고 나는 운임을 계산 했다. 그 곳은 작은 부두였고 마당이었고 집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집은 그 마을의 가게였고 가장 좋은 집 중의 하나였다. 그 집에는 과부가 된 하오의 이모가 딸, 아들 두 자녀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방 하나 응접실 하나 있는 방에서 여장을 풀고 선물로 가지고 간 한국산 정수기를 설치했다. 이 때 차분하고 섬세한 성격의 은혜가 잘 조립하여 설치에 성공하고 물을 담아 놓았다. 그리고 간단한 식사 대접을 받았다. 식후에는 강에 바로 인접한 좁은 마당으로 나와서 그 곳에 있던 식탁에 둘러 앉아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까존이 기타 연주를 잘하기 때문에 정말 은혜가 넘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아홉 시가 넘어서자 우리는 동네가 떠내려갈 정도로 큰소리로 통성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열 시가 가까워지자 까존이 이 곳 사람들은 일찍 자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작은 소리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10시 반 쯤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세면장에 가서 간단하게 씻었는데. 세면장은 실내에 있었고 문은 허름한 천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미리 채워 둔 큰 물통의 물을 사용하게 되어있었고 변기는 없었고 한 쪽 귀퉁이를 경사지게 만든 다음 구멍을 뚫어 바깥 도랑으로 흘러가게 해 놓았는데, 이것 또한 그 마을에서는 최고급 화장실이었다. 비누, 치약, 칫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곳 사람들은 전혀 지저분하다거나 혐오스럽다거나 냄새가 난다거나 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날씬하고 옷맵시가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어쨌든 우리는 카오 이모가 응접실에 설치해준 모기장 안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만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나는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의 평소 취침 환경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우리는 5시경에 일어났다. 우리 일정은 이 날 저녁 5시 반까지 그 강가 시장이 있는 일종의 터미널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새벽에 닭 우는 소리는 내가 어렸을 적 고향에 살 때 그 소리와 같았다. 참 정다운 닭 울음 소리였다. 우리는 모기장과 이불을 갠 다음, 아침 예배를 드렸다.
그 곳 사람들은 일찍 자는 대신 일찍 일어났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우리는 함께 찬양을 불렀다. 8시 쯤 되었을 때, 카누를 타고 등교하는 어린이들이 보였다. 우리는 실컷 찬양을 부르다가 하오의 이모가 요리한 닭고기, 생선 절임 등으로 아침을 먹었다. 특히 그들은 얼음 과일 쥬스를 자주 먹는데, 나의 취향과 맞아서 정말이지 엄청나게 마셨다. 특히 야자 열매에서 나오는 물은 독특하지는 않지만 그 은근한 맛이 아주 좋았다. 특히 하오가 직접 따와 꼭지 부분을 칼로 잘라 구멍을 내어 직접 따라 야자 물 맛은 정말 일품 이었다. 그 곳은 일종의 동네 구멍 가게였기에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가게 물건이라야 별 것 없었지만 특히 커누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기 때문에 거기의 동력원인 휘발유가 제일 많이 팔리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난 다음 모든 일정을 현지인 팀장인 까존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까존과 하오 그리고 우리 셋은 7~8미터 폭의 강을 카누로 건너 이웃집으로 갔는 데 그 집도 하오의 친척이라고 했다. 그 곳에는 바나나, 야자, 사탕수수 등 과수원이 꾀 넓어 보였다. 하오는 작두처럼 생긴 긴 칼을 가져와 사탕수수를 베낸 다음 껍질을 베끼고 토막을 내 먹어 보라고 권했다. 은혜와 수연이는 비위에 안 맞는 지 먹질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적에 사탕수수 대나 옥수수 대를 먹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것은 진짜 사탕수수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고향에서 먹었던 수수대나 옥수수대 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고 시원했다.
우리는 서서히 하오의 친척집 방문을 시작했다. 그 곳은 집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이웃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집에 갔을 때 수연이와 은혜가 기겁을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그게 우리 나라의 소 한 마리 키우는 것과 같아 보였다.
그 집에 노처녀가 있었는데 한국어 공부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노트에 예수 사랑이라고 써 주고 그림도 그려 줬다. 우리는 거기서 기도해 준 다음, 좀 잘 사는 친척 집으로 이동 했는 데 그 곳은 카누를 타고 갔다. 그 곳에는 여주인과 아주 깜찍하게 생긴 10대 딸은 있었으나 남주인이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베이스 캠프인 이모집 가게로 돌아왔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시 그 집으로 갔다. 남주인이 와 있었다. 우리는 속에 바나나를 넣은 튀김을 먹었다. 내 입맛에는 잘 맞았다. 여전히 은혜와 수연이는 입에 안 맞는 모양이다. 거기를 떠나기 전에 빙 둘러 손을 잡고 뜨겁게 기도해 주었다. 그들은 전혀 거부하지 않았고 정말 우호적이었다. 다시 카누를 타고 베이스 캠프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오후 세시 가까이 되었다. 우리는 여장을 꾸려서 그 집을 떠났다. 과부로 사는 하오의 이모에게 30만동 정도 숙박비 조로 드렸는데 말은 안통하지만 감사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는 카누를 타고 시장 터미널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것은 큰 오산 이었다. 까존의 스케줄은 그게 아니었다. 카누를 타고 터미널로 가는 도중에 잠깐 내려 하오의 다른 친척 집에 들렀다. 마치 수제비 같은 음식이 나왔는데, 최고급 대추야자 속살을 긁어 내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내 입에는 참 잘 맞았다.
그러다 까존이 핸드폰이 된다며 김남균 선교사님과 통화하도록 했다. 사실은 까존의 핸드폰 고장으로 오전 내내 선교사님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호치민 본부의 선교사님은 걱정하고 많이 기도했다고 하셨다. 다른 지역 역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다고 전해 주셨고, 특히 경진이가 먹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셨다.
체격이 좋은 수연이는 특히 애들을 잘 돌보는 달란트가 있어서 현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까존의 지시에 따라 전 가족들과 손잡고 기도를 해 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또 하오의 다른 친척집에 도보로 찾아갔다. 거기서는 좀 특별한 음식을 대접 받았다. 거기서는 아주 특별한 과자가 나온 것이다. 맛있게 먹고 기도해 주고 마지막 가정을 향해 카누를 탔다. 여전히 은혜와 수연이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허기져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좀 엉뚱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하오의 친구 집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말하자면 저녁 식사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주꾸미와 새우가 나왔다. 은혜와 수연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 때 시간이 오후 네 시가 좀 지났을 때인데 우기여서 그런지 비가 오락 가락하였다. 비가 심하게 오면 카누를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너무 뻔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출발하는 다섯 시가 되자 신기하게도 빗줄기가 약해졌다. 일단 카누를 타고 시장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30분 경이었다. 차량은 간발의 차로 끊긴 상태 였다. 우리가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오토바이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연이가 베트남에 왔을 때, 수많은 자전거 오토바이 행렬을 보고 아, 오토바이 한 번 타 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꿈은 이루어졌다.
우리는 각자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꿈은 어려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중고 오토바이에 헬멧, 안경 등 보호 장구 하나 없었다. 그리고 면허증이나 있을 까 싶은 어중이 떠중이 운전자들. 결코 순탄치 않은 도로 사정, 예측불허의 일기.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연이 오토바이가 몇 백 미터 가지 못해서 고장이 났다. 다른 오토바이로 바꿔 탔다. 그나마 일찍 고장이 나서 다행이었다. 까존, 은혜, 수연이 우리 넷은 때 아닌 오토바이 레이스를 하게 되었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우리의 사정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어 보였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때지어 가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운전자는 십대 후반의 좀 가냘프다 싶은 청년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포장도로로 갈 때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꾸불꾸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운전자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자기 뒷 주머니에서 때묻은 모자 하나 꺼내 썼을 뿐이었다. 나는 빗발과 엄청난 속력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었다. 공포의 레이스 였다.
이 때 나는 기도했다. 베트남에 대해서 사죄하고 회개하며 나를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일생일대의 가장 절박한 기도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언뜻언뜻 들었다.
그런 가운데 다행스럽고 아찔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나라 읍내같은 어느 시골길을 지나다가 오토바이 바퀴에 펑크가 난 것이다. 만일 산길에서 그것도 저녁때 펑크가 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운전자 청년은 안절부절 하면서 그 시장 본부에서 새로운 오토바이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통신 수단도 원활하지 않고 나 또한 핸드폰도 없었기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청년 운전자는 할 수 없이 그 오토바이를 끌고 일종의 자전거포로 들어갔다. 그런데 돈이 없는 모양이다. 거기서 좀 시간을 끌다가 내 돈 5천 동을 주고 펑크를 때웠다. 유년 시절 시골 생각이 났다. 바퀴 속의 고무 튜브를 꺼내 펑크 난 부위를 찾아 사포로 잘 간 다음 접착제를 바르고 둥그런 고무 조각을 붙였다. 끝으로 튜브를 물 속에 집어 넣어 공기가 새는 지 확인 했다. 좀 엉뚱한 생각이지만 80킬로 가까운 체중을 그 오토바이가 몇 번이나 태워 봤을까? 문제가 생길 소지가 충분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그렇게 초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비교적 편안했다.
한편 까존, 은혜, 수연이는 까마오에 가까이 오면서 조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걱정하며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 일행을 만났을 때 까존은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현지 간사로서의 그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까마오 시내 공용 터미널로 또 오토바이 레이스하듯 달려갔다.
나는 무사히 공용 터미널에 도착했다. 일행 중 제일 먼저 도착한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다른 터미널로 간 것이었다. 그 청년 운전자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다른 오토바이가 오더니 나를 태우고 우리 일행과 합류시켜 주었다.
저녁 8시 쯤, 봉고차 수준의 미니 고속버스를 타고 호치민을 향해 까마오에서 출발했다. 길고 지루하고 불편한 여행 이었다. 특히 우리들 중에 차멀미에 제일 강한 수연이가 의외로 차멀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새벽 한 시 경, 호치민 게스트 하우스 호텔에 도착했다. 긴장팀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장경원 팀장님은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우리 나라 모기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베트남 모기에도 전혀 물리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모기 물리지 않는 체질이고 출국하기 전에 수정과를 많이 먹어 둬서 그런지 투명 모기같은 베트남 모기에 거의 물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장경원 팀장님의 경우는 나 보다 차원 높은 그 분의 보호하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적은 계속 일어났다. 주현이 가방이 돌아 온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다른 한국 선교팀이 착오로 주현이 여행 가방을 가져간 것이다. 그래서 여행 가방을 공항으로 가져갔고, 공항에서는 우리가 적어준 연락처를 통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다음날 호치민 시내 한 한국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김남균 선교사님 주제로 팀별 보고회를 가졌다. 어느 한 팀 고생하지 않은 팀 없었고, 어느 한 팀 기적을 체험하지 않은 팀 없었고, 누구 하나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 없었다.
보고회를 마치고 시내 유명 백화점에 들러 간단한 쇼핑을 한 다음 오후 세 시에 게스트 하우스로 이동해서 짐을 챙겨서 베트남 순복음 교회를 향했다. 그 곳에 도착한 다음 근처 한국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먹고 베트남 순복음 교회 금요철야예배를 드렸다. 장경원 팀장님이 특별히 준비한 헌금 50만 원을 목사님께 드렸다. 후문에 의하면 그 곳 목사님이 무척 감격해 하셨다고 한다.
철야예배를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다시 선교사님 일행들과 만나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공금과 각자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모아 선교사님께 드렸다.
다음날 아침(2007. 8. 18.)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미리 예약된 관광 버스를 타고 교회에 들러 간단한 감사 기도회를 끝으로 우리의 은혜로 긴 여로는 막을 내렸다.
단 한 번의 '단기 선교'로 나의 베트남에 대한 회개와 보상과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다. 나의 비전은, 퇴직 후 베트남에 1개 이상의 교회를 세우고 1년이면 거기서 6 개월 이상 보내며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 후 김남균 선교사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진 나무판 액자를 선물 받았다.
'WALK IN LOVE VIETNAM'
첫댓글 사도행전의 여정, 은혜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이 보잘 것 없고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