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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만 헌트 “세상의 빛”
"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 홀만 헌트 Holman Hunt 1827-1910 홀만 헌트 그림의 배경과 메시지에 대한 묵상
에릭 헤이든 (Erick Hay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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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
홀만 헌트 Holman Hunt
1854년, 젊은 홀만 헌트가 “세상의 빛”이라는 놀라운 그림을 전시 했을 때 예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 그림은 기존의 신앙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세계로부터 비판과 동경을 모두 받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스킨(Ruskin)은 “이 시대 혹은 그 어떤 시대에서도 가장 귀중한 성스러운 작품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20년간, 사진가들과 조각가들은 “세상의 빛”을 수없이 본떴지만, 원작품은 옥스퍼드의 쿰(Combe)이라는 사람이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쿰이 세상을 떠나자, 그 그림은 옥스퍼드대학교 키블칼리지 (Keble College)에 기증되었다. 그러나 홀만 헌트는 키블칼리지가 자신의 그림을 소유하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같은 주제로 다시 한 번 그림을 그려서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1854년의 것보다 두 배 큰 새로운 작품이 1904년에 전시되었다. 그 작품은 전 세계를 돌며 전시회를 가졌고 마침내 런던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athedral)에 걸리게 되었다. 오늘날도 그곳에서 이 그림을 볼 수 있다. 1854년의 그림은 현재 키블칼리지에서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오래된 또 하나의 작품은 맨체스터 시티 아트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분명 홀만 헌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개개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 밖에 서 계신 것을 보여 주려고 의도했다. 그 문은 아마 여태껏 열린 적이 없을 것이다. 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고 문 손잡이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노크를 듣고 그 문을 열고서 - 바깥 거칠고 어두운 세상을 인도해주는 상징적으로 랜턴을 들고 있는 - ‘세상의 빛’이신 그분을 믿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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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중반, 세 명의 젊은 화가들이 모여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했다. 그들은 당시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회화형식에 반발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이 아닌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그리스도는 화려한 의상이 아닌 평범한 옷을 입고 있다.
라파엘 전파를 결성한 세 명 중 하나가 홀만 헌트이다. 그는 캔버스에 적합한 의복과 패션을 연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수차례 방문하였다.
“세상의 빛”은 아마도 홀만 헌트의 가잘 잘 알려진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스타일로 보자면 라파엘 전파의 것은 아니다. 그는 왕의 의복을 입은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그의 어머니가 아끼는 테이블보를 모델에게 두르고는 그린 것이다. 사실 모델이 둘 있었는데 구세주의 머리카락을 표현하기 위한 여성모델, 그리고 얼굴을 표현할 남성모델이었다. 금속랜턴은 직접 디자인한 것이고 쉽게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호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촛불에 의지하여 밤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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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동안 헌트는 불가지론(agnosticism)을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뛰어난 그림을 보고, 놀랐다.
오직 두 개의 원본만이 영국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 것은 1853년, 옥스퍼드에서 인쇄업을 하는 토마스 쿰(Thomas Combe)이 400기니에 구입했다. 그는 라파엘 전파의 잘 알려진 후원자였다. 1872년 토마스 쿰의 죽음 이후 그 그림은 옥스퍼드 키블칼리지(Keble College)에 기증되었다. 그 그림은 처음에는 1892년 키블칼리지 도서관에 걸려 있었으며 이후 1892년 사이드채플(The Side Chapel)로 옮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그림은 손상이 되기 시작하였고 헌트는 무상으로 보수하였다.
첫 작품을 마치고 25년 후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헌트의 시력이 약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그림은 1853년 원본보다 네 배 더 컸다. 예전 그의 학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작품을 전 세계를 돌며 전시해서 믿지 않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설교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어느 사람이 그 그림을 사게 되었다. 3년의 작업 끝에 그 구매자는 적정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도록 색깔을 재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이 작품은 유래 없이 제작되고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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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은 수천 마일을 여행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만 인구의 4/5가 넘는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았고 많은 관람객이 그 그림을 위하여 수백 마일을 여행했다. 마침내 그 그림은 1904년 런던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athedral)에 걸렸다. 그 곳에 두는 예배 때 (봉헌예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제는 늙고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헌트가 cathedral weeping을 인도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세인트 폴 성당에서 걸려 있으며, 1853년 원본은 아직 옥스퍼드 키블칼리지 사이드채플에 걸려 있다.
흥미로운 그 이전의 “세상의 빛”은 맨체스터, 시티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헌트의 라파엘 전파 동료인 F. G. 스티븐의 작품이다. 그는 헌트의 키블칼리지 (1853) 오리지날 작업을 위한 초기 스케치를 기초하여 그림을 그렸고 3년 후인 1856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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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신약,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구절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친숙한 구절을 바탕으로 사도 요한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와 관계가 멀어진 교회에 대해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 개인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문을 열고 다시 인정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홀만 헌트는 복음적 감각을 사용했는데, 즉 그리스도가 개개인의 마음 또는 삶의 문 밖에 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 그림과 계시록 3장 20절을 통해서 해가 갈수록 소년 소녀를 포함한 모든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에 영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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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만 헌트 그림의 자세한 부분은 모두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세주의 용모를 먼저 하나하나 자세히 보고 다음에 주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세주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헌트의 그림에서 랜턴을 든 인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들고 있는 물건에 대해 먼저 주위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머리의 가시관
홀만 헌트는 분명 팔레스타인에 대한 조사를 잘 했다. 그는 영국의 산사나무(hawthorn) 울타리에 있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도, 정원에 우거진 찔레로 만든 가시관을 그린 것도 아니다. 그의 가시는 병사들이 막사의 화로에 불을 붙이기 위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팔레스타인의 가시나무의 가시는 3-4인치(8-10cm)에 달한다. 그것들이 꼬이고 엉켜 예수의 머리에 놓일 거친 가시관으로 준비된다. 아니다! 단지 머리에 ‘얹는 것(placed)’이 아니라 가시관 원래의 의미는, 각각의 가시로 피를 흘리도록 ‘그 자리에 단단히 (눌러) 씌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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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박힌 손
구세주의 양 손은 나무 십자가에 두 팔을 벌려 못 박혔다. 넓게 벌린 팔은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품으시려는 뜻을 상징한다.
“주님은 저를 얼마나 사랑하세요?” 한 사람이 꿈에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는 그의 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이만큼” 그리고는 죽으셨다.
Was it the nails o Saviour
that bound Thee to the tree?
nay, twas Thine everlasting love,
Thy love for me, for me
오, 구세주여 못이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까?
아니, 주님의 영원한 사랑,
나를, 나를 위한 당신의 사랑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Katherine A.M. Kelly
Give me a sight o Saviour 2절)
방향을 돌린 발
홀만 헌트는 예수의 발을 문을 향하게 그린 것이라 마치 구세주가 떠날 준비가 된 것처럼 방향을 돌린 채 서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한 동안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충분히 기다렸다. 아제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홀만 헌트는 성경의 강조점을 알았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6:3)”,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오늘,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으면...(시편 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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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의복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 대제사장은 온 세상을 위해 생물로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다. 그분의 희생제사는 구약에서처럼 매일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모두를 위한 (once-and-for-all)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제사장은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로 서 있는 중보자 또는 대변인(go-between)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디모데전서 2:5-6)”
사랑의 눈
홀만 헌트는 당신이 어디에 서서 그 그림을 바라보더라도 예수의 눈이 당신을 향하여 바라보도록 그림을 그렸다. 세인트 폴 성당이나 옥스퍼드 키블칼리지에서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예수의 사랑의 눈이 따라가는 듯 보인다. 죽어가는 강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을 바라 보면서 말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누가복음 24:32).” 그에 앞서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그 사랑의 눈을 보았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looked upon)(누가복음 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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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눈이 어찌나 사랑으로 빛나는지" (역주-아가서 4:1 Today's English Version (TEV)) 아가서에서 그 연인에게 한 말이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마음 세 곳 모두
나를 위해 갈보리에서 못 박히셨네.
그리고 여기 지금 그 분께
나의 손과 발, 마음을 제물로 드립니다.
His hands and feet and heart, all three,
were pierced for me on Calvary;
and here and now, to Him I bring
my hands, feet, heart, an offering
Clyde McLennan - His hands were pierced
배경
헌트의 그림에서 구세주가 서 있는 장면의 배경은 생생한 세부묘사로 가득하다. 또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첫 번째로
생명 없는 현관문
그리스도가 두드리고 있는 문은 죽은 잡초와 아이비 덩굴로 덮혀 있고 경첩(hinge)은 녹슬어 있다. 마당에는 섞은 열매들이 보인다. 그 문은 너무나 오랫동안 잠겨 사용되지 않았다. 사도바울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에베소서 2:1)로 묘사했던 것처럼 생명 없는 출입문을 의미한다. 로마서에서 그는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23)이라고 썼다. 그리스도 없는 삶은 전혀 생명이 없다.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고 건강하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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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없는 문
홀만 헌트는 문 바깥쪽에 걸쇠나 빗장, 손잡이가 없이 그렸다. 만약 왕이며 제사장이신 예수가 맘만 먹는 다면 사람의 마음 혹은 삶 속으로 휙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잠언 23장 26절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다오.” 성경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 강조한다. 우리 삶의 문은 우리 안에 회개와 믿음의 빗장과 자물쇠를 사용하여 안쪽으로 열린다.
불 밝힌 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선포하셨다. 그의 그림에서 홀만 헌트는 그리스도를 등불을 든, 자신을 밝히고, 용모, 문으로 난 길, 앞의 길을 밝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영적인 어두움에 사는 자들의 삶으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의 빛을 넘치게 하길 기다리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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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지어다!(Here I am!), 내가 문 밖에 서서 (Leaving Bible에는 시제를 (완료진행으로 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서 있었다.)I have been standing.”) 두드리노니 (문자적으로는 “내가 계속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먹는다’는 것은 식사(dine)를 뜻하며 저녁에 하는 그 날의 주된 식사를 가리킨다. 홀만 헌트는 그가 팔레스타인에 방문했을 때 그와 같은 식사에 참여 했을지 모른다. 그 시간은 가족이 모여 즐거움을 나누는 때이다.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는 “하나님 나라는 잔치이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세상의 빛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그 때가 잔치 또는 결혼 피로연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들어 갈 수도 있다(maybe)”가 아니라 “들어가겠다(I will come in)”이라고 하신 것을 주목하라. 그것은 문명 그분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결코 깨뜨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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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 성당을 방문한 여행객 무리 중에 한 젊은가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안내원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노크를 하고 계시는데 아무도 그 문을 열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 사람들은 뒷짐지고(out-at-the-back) 있었겠지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실 때 뒤로 물러나 있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가. 몇몇은 돈을 모으느라, 몇몇은 인생을 즐기느라, 또 누군가는 세상에서 제 갈길 가느라 부르심에 머뭇거리는 것이다. 우리의 주위를 빼앗는 모든 것들이 있어서 우리는 구세주가 문 두드리는 것을 듣지 못한다. 오래 전 왕이 듣고 응답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을 새기자.
“나의 사랑하는 자는 그의 손을 문에 두었으며
나느 그가 가까이 있는 것에 두근 거렸다.
나는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나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내 사랑하는 자의 문을 열었다.
허나 그는 이미 가버렸네.
얼마나 내가 그의 목소리 듣기 원했는지!
나는 그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고
그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네.”
솔로몬의 노래 5:4-6 (굿 뉴스 바이블 (GN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