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관덕로 |
관덕로 거리를 다리 걷어붙인 한 사나이가 걸어오고 있다.
세워져 있는 지프 한 대, 우생당책방과 남도치과, 국제미싱사와 나포리미싱사,
이런 간판들이 보이고 제주여행사의 간판도 눈에 뛴다. 길은 아직 2차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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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제주시가 전경 |
지금 KAL호텔이 있는 쪽에서 내려다본 1970년대의 제주 시가지 모습이다.
왼쪽에 규모가 비슷한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고 시내 요소요소에 개발의 기운이 들어차있다.
길도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넓게 빼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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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문천 하류에서의 멸치잡이 |
여름날 병문천 하류에서 젊은이들이 그물로 밀려온 멸치떼를 잡고 있다.
재 깊숙이 까지 멸치떼가 밀려 오는 일은 과거에는 흔했었다.
그 하류에는 멱감는 아이들이 떼지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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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미인들 |
제1회 탐라미인 선발대회에서 영예롭게 선발된 탐라미인과 준탐라미인이다.
이 때 탐라미인으로 선발된 사람은 高麗珍씨인데 그녀는 나중 아나운서로 중앙에서 활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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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제 날의 백록담 |
화창한 철쭉제 날 백록담에 운집한 인파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백록담을 훼손시켰으니 오늘날 입산통제를 해야 할 정도로 황폐해진 것은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철쭉보다는 사람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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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대학생 적설기 등반 |
제주대학이 주최가 되어 제1회 전국 남녀대학생 적설기 한라산 등반대회가 열리고 있다.
출발에 앞서 관덕정 앞에서 식이 거행되고 있는 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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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천의 복개 |
냇가에 모여 살던 무허가 주택들이 철거되고 산지천이 복개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시멘트 기둥들이 막 세워지고 있는데,
이제 이걸 헐어내고 재개발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세월이 여류한다는 말은 실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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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서문로 |
상가가 줄지어 서있는 서문로에 차와 사람들이 엉키어 있다.
이 때 이미 도로 사정은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약방과 건재사, 당구장들도 들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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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읍 중심지의 전기 점화식 |
애월리 중심가에서의 전기 점화가 되던 날이다.
오색 깃발이 날리고 아치에 전구도 매달려 있다.
"하나 둘 셋 하면 스위치를 누르십시오" ,
신호를 기다리는 표정이 진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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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로의 포장 준공 |
동문로에 경사가 겹쳤다.
가고가 확장 포장되고 하수도시설도 이루어졌다.
이걸 축하하는 식이 열리는 모양이다.
오가는 자전거, 이 무렵의 주 서민 교통수단인 것 같다.<白鷺會>의 천막이 한결 시원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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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썰어 말리기 |
산방산 부근의 밭에서 고구마를 기계로 썰어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얗게 마르는 고구마, 이것들은 주로 주정의 원료로 쓰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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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에 해저수도 |
비양도에 수도 가설을 위한 해저수도를 매설하고 있다.
섬주민들의 작은 배들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비양도 기슭의 납작한 자붕틀, 미양도는 마치 기계충 오른 아이 머리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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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통수식 |
쇠파이프를 통하여 수돗물이 나온다.
한 평생 물허벅을 지노라 등이 굽은 할머니가 컵에 물을 받아 마신다.
물맛과 감회가 어떨까. 좋은 세상 왔다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나 없이 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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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서귀간 횡단도로 개통 |
5·16쿠데타 이후에 제주의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것은 한라산 동녘 기슭을 관통하여
첫 번째 횡단도로가 빼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로써 제주가 명실공히 1일생활권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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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배경으로 한 제주시가지 전경 |
三姓穴 서쪽편 언덕에서 내려다본 제주 시가지의 전경이다.
바다가 병풍처럼 둘려 있고 그 안에 제주시가지가 담겨 있다.
오른손편 지금의 KAL호텔 자리에 있는 건물은 제주여고 교사이다.
이 부근에 아직 시가지 조성이 안돼 있던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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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두동 포구의 물맞이 |
과거 제주시 도두동 포구가의 물맞이터이다.
그 당시에도 1등의 수질. 시멘트로 물줄기가 세게하고 본격적으로 물맞는 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제 제주에서도 이런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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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포구와 연북정 |
돛을 내리고 포구에 정박한 배가 마냥 한가롭다.
그너머로 멀리 연북정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초가에 섞인 함석지붕, 동네 사람 몇이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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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과 성산포 |
일출봉의서녘 기슭에 성산포 마을이 조성되기 시작 할 무렵이다.
공장으로 보이는 집 몇 채, 거기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로 보아 탁주공장이나 패류가공공장이 아니었을까.
수매밑 포구에 떠 있는 배 두어 척, 이때 만해도 성산포는 매우 한적한 어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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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문내 하류의 빨래터 |
병문내 하류의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이 세답이 한창이다.
하얀 옷이 아낙네들이 바닥의 검은 바위들로 하여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빨래감은 구덕에 담아 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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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행렬 |
만장과 명정을 앞세우고 상여가 지나갈 참이다.
남녀 조문객들, 이웃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서서 나가는 상여를 지켜보고 있다.
전봇대와 초가 등으로 미뤄 일제시대쯤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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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측우소와 산지물 |
비탈 꼭대기에 측후소의 첨탑, 맞은편에 소나무 한 그루가 대조적이다.
비탈 중간쯤에 빨래를 넌 초가와 인입전주가 보이고 아래쪽에 산지냇가의 샘터가 보인다.
양손에 물통을 든 바지게꾼과 물 긷는 여인의 뒷모습, 그리고 앉아있는 댕기머리 처녀,
당시의 한 풍속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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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훈장과 학동들 |
일제시대가 되면서 그들은 한때 개량서당을 운영한적이 있었다.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훈장에 학동들은 이미 거의가 단발을 했으며 입성도 양복을 입은 아이가 있다.
신발은 짚신과 고무신, 나막신까지 한데 섞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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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떠있는 해녀들 |
등대기를 드러낸 채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족새눈을 쓴 해녀들이 바다로 나가고 있다.
빗창을 든 해녀도 있어 다소 조작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넘실거리는 물이랑이 효과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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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행차 |
예복을 갖추어 입고 백마를 탄 신랑이 앞장서고 새각시의 가마가 뒤따랐다.
그 뒤로 말 탄 상객들이 뒤따르는 이 결혼 행차는 막 동네로 들어서고 있는데 정황을 미뤄 보아
신랑이 색시 집에 가서 색시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참인 것 같다.
이런 결혼 풍습은 제주만의 독특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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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로의 변해가는 모습 |
일제식민지 당시 변해가는 관덕로 부근의 모습이다.
고층집이 생기고, 간판과 전봇대들이 늘고, 함석으로 된 연통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남자와 어린이들로부터 검은색 옷을 입기 시작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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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영림서겸 제주 산림보호구 |
일제식민지시대가 되면서 그들은 한라산의 서나무를 베어내어 표고 재배를 시작했다.
영림서에서 키워낸 삼나무와 소나무의 묘목으로 식목도 했다.
그들은 한라산의 나무들을 자원으로 보았기에 퍽 중요시했는데 이 건물은 그 관리와 행정을 담당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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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
마치 잘 사는 부자의 살림집같은 이 집은 그러나<관음사>란 제목이 붙어 있다.
낮은 지붕, 바깥의 유리문, 벽은 백회로 단장을 하였다.
뒷뜰의 나무들이 아직 애나무들인 점을 보아 당시 이 부근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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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시가지와 문섬 |
일제 식민지시대인 1928년 당시의 서귀포 시가지 전경이다.
집들이 건성드믓 있고 새섬 너머에 문섬이 스름하게 누워 있다.
집들은 크고 함석지붕들이어서 신흥 시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른손 편에 그 유명했던<벼락맞은 소낭>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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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측우소 언덕에서 조감한 제주읍 전경 |
지금의 제주측후소 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일제시 제주읍의 전경이다.
자세히 보면 큰길 가의 집들부터 기와나 함석으로 지붕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길가에 드문드문 전봇대, 멀리 끝부분에 해안과 수평선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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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봉 쪽에서 찍은 제주읍의 전경 |
정리되지 않은 산지내 건너 제주읍의 시가지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그 때는 관덕정이 단연 두드러졌던 건물로 뚜렷한 지붕이 중심부에 보인다.
안온한 해촌의 정경인데 관덕정에서 동회하던 신작로가 그래도 뚜렷하게 뻗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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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 건설 이전의 산지포 주변 |
제주항 건설 이저의 산지포구 주변의 모습이다.
돌로 축장을 한 포구 안에 작은 배가 들어와 있고, 사람들이 작업을 한다.
멀리 탑동의 해안이 뻗어 있고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산만하다. 아득히 제주읍내의 모습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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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 오일장의 그릇시장 |
시장에도 개화의 물결이 많이 들어와 있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두루마기나 오바 위에 도리우찌 모자가 갓 쓴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
그릇시장에 나온 물건도 사기그릇들에 구리주전자들도 보인다.
칠성로 입구쪽에서 서쪽을 향해 찍은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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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마당의 제주읍 오일장 |
관덕정 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찍은 것이다.
정면에 잠방이 위에 도리우찌를 쓴 사내가 사진 찍는 것을 의식한 듯 웃고 있다.
모인 사람들의 숫자로 보아 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광장의 양쪽에 전봇대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전기 가설이 된 후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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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의 제주도청 |
이제부터 사진의 일부는 1929년 조선총독부 발행의<생활상태조사>보고서에 실린 것들이다.
이 무렵에 찍은<제주도청>. 정문 입구 정면과 청사 모습이 보인다.
정문과 벽에, 그리고 인도의 양쪽에 백회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양쪽에 거창하게 광고판이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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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령리 해안의 어구 보관 |
바닷가에 나무로 사귀에 기둥을 세워 소위 상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그물 등 어구의 가리를 쌓아 놓았다.
상자리 위에 어구를 쌓은 것은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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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마당에서의 세콜방애 |
세콜방애 고들베 지엉 저녁이나 밝은 때 허라"는 구절의 민요가락이 있는데 이여인들이 지금 세콜방애를 찧고 있다.
민요에 맞춰 세 사람이 번갈아 방아를 찧어 나가는 것이다. 손발이 잘 맞아야 잘 찧게 된 방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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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구덕 |
지금 40∼50대 이상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서 이런<애기구덕>이라는 이 고장 특유의 요람에 누워자랐던 추억이 있다.
대로 짠 이 구덕은 통의 중심쯤에 그물을 엮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기저귀를 깔고 아기를 눕혔다.
그리고 이 요람을 흔들며 자장가를 불렀다. 이요람은 심지어 밭이나 어디나 지고 다니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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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농가의 부녀자들 |
당초 붙어 있던 제목은<가래리 농가의 부인>이다. 가래리는 과거 서귀포시 江汀洞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모습 역시 제주도 전역에서 과거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이 아랫도리를 벗은 두아이를 함께 업은 모습이 이채롭다. 또 아기 업은 소녀는 맨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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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정방폭포 |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것으로 유명한 정방폭포, 그하얀 물줄기가 외롭게 보인다.
절벽 위의 나무들이 아직 그리 크지 않았던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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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고을 농부의 풍속 |
단산으로 보이는 산 기슭밭 가운데를 중년의 두 농부가 짐을 지고 지나가고 있다.
흰 바지 저고리에 털벙거지를 쓴 앞장선 사람은 지게 위에 멱서리,
그 위에 쇠스랑을 얹고 있고 갈잠방이 적삼에 대패랭이 차림의 뒤엣 사람 역시 지게 위에 돗거름으로 보이는 짐을 지고 있다.
보리라도 갈러 가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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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 10명 |
오조리 여인 10명을 표본추출하여 사진을 찍은 일제는 다시 제주 해녀 10인을 추출하여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손을 모아 쥐거나 엉거주춤한 자세, 이 여자들에게는 일률적으로 수건을 씌워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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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의 테우와 배들 |
추자도의 해안 바닥에 테우와 어선들이 세워져 있다.
일제의 관헌들로 보이는 제복의 사내들이 서 있는 모습들로 보아 이 사진 역시 조사 과정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포구는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천연조건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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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우와 돛배 |
어로수단인 테우와 돛배가 만조의 연안에 한가로이 떠 쉬고 있다.
연안 자갈돌들로 보아 추자의 신양리쯤으로 추정된다.
식민지시대가 되면서 일본의 잠수기선들이 우리연안에 자주 출몰했던 것으로 미뤄 이런 열악한 수단을 역이용했을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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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기슭의 동네 |
추자섬 기슭의 동네 납작납작 엎드린 초가들이 이야기라도 나눌 듯이 정답다.
갯바닥에 작은 배 몇 척이 보이고 아직 포구는 정지되지 못했던 것 같다. 전형적 옛날 어촌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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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동의 삼사석비 |
역시 삼성신화와 연관되어 세 신인이 활을 쏘을때 과녘이 되었다는 돌이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상투를 틀고 이마를 질끈 동인 원주민 사내가 가슴을 풀어 헤치고 의연히 서있는 모습이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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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평리의 혼인지 |
삼성혈과 연관되어 세 신인이 벽랑국에서 떠온 공주들을 맞아 혼인을 치루었다는 성산읍 온평리의 혼인지이다.
아득히 뒤로<大水山峰>이 보이고 바위너설 위의 바닥에 물이 고여 혼인지를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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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섬과 용머리의 연대 |
산방산 기슭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득히 바다 위에 형제섬이 떠 있고
용머리코지(곶)가 섬 쪽을 향해 미련한 짐승의 머리처럼 내밀어져 있다.
지금의 하멜표류기념비가 있는 위치에는 연대의 모습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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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과 성문 어귀의 석무인 |
지금 우리가 돌하르방이라고 부르는 성문 어귀의이 석상들을 일본인들은<石武人>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이표기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양쪽 두 기씩 네 기의 돌하르방이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두려움이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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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을 밟고 선 순사들 |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그해 10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이래 1914년 일본은 조선의 토지 면적을 파악하기 위하여
세부측량을 실시하였는데 제주는 그 처음 표본지역이 되었다.
이 사진은 그러니까 당시 일제의 관헌들에 의해 찍어진 것인 듯하다.
1915년말 우도, 가파도를 제외한 제주 전지역이 측량 완료되고 1916년 1월 4일에는 토지 소유자와 지적도가 고시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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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의 조사 |
일제 제복의 사내들이 당시로서는 시내 외곽에 위치한 삼성혈을 조사하고 있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찬세 순사가 각기 세 혈의 입구를 밟고 서 있다.
구멍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함으로도 보이지만 그 보다 이렇듯 숨구멍을 틀어막겠다는
상징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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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주군 애월성지 |
지금 애월리 바닷가, 애월초등학교 자리의 애월성지이다.
건물은 지금은 많이 변해버린 옛 관아 건물인 듯한데 일제시 한때는 일본군 고급장교가 주둔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오른손 편으로 애월마을의 집들이 보이는데 이 지역 역시 너무 많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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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내와 망루 |
산지내 위에 원형다리모형은<북수구>이다.
아득히 원경으로 보이는 망루는 지금의 제주측후소 부근에 있었던 쾌승정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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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천의 세월 |
산지천의 하류인 듯한 곳에 세월이 놓여 있고, 이 다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저쪽 냇가를 끼고 나있는 길, 그 길가의 높직한 돌담이 눈길을 끈다. 산지내의 물은 풍성하고,
맑으며 그 건너 나즉나즉 엎드린 초가들이 안개에 쌓여 환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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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현단 부근의 제주성 |
옛날<소래기동산; 과거 제주영락교회 자리>쪽에서 제주성의 동남단 단애를 원경으로 찍은 것이다.
山地川상류의 험준했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이 내의 중심에는 낮은 안경교가 놓여 있는게 보인다.
지금은 완전히 시가지화한 이 일대는 변화의 무상함을 잘 말해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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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마당에서의 한판 입춘굿놀이 |
1910년대까지도 입춘 무렵에 도내 무당들이 우두머리,
즉 <도황수>를 뽑는 입춘굿놀이는 해마다 있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황수는 춤도 잘 출 뿐더러 사설도 정확하게 읊어 모든 무당들의 수장이 되었던 사람인데,
제주에서 마지막 뽑혔던 도황수는 성산읍 신풍리의 洪梅花씨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중아파출소 옆쯤의 누대에 구경꾼들이 잔뜩 올라가 있고 가면무를 추는 남녀 무당 다섯이 춤사위가 한창 신이 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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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부인들의 풍속 |
돌담장과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옆모습과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다.
한 여자는 통이 깊은 구덕을 지고 있고 한 여자는 부려놓은 채 짐질 때 받치는 누비등받이 만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물질이라도 나가던 모양새다. |
제주도의 민요로,
섬사람의 낭만과 애수가 어리어 있는 노래입니다.
장단은 굿거리장단입니다. | |
첫댓글 고향분들 감회가 새롭겠네요 이제는 전국 어딜가도 옛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소중한 자료입니다. 감사드리고요..
장호대형~ 우리 어렸을 때, 눈에 익었던 풍경들 너무도 그리운 어린 시절이네요. 이제는 다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속에만 남아있지요. 우리가 가고 나면 제주의 옛날 추억을 누가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세대에는 전설로 남겠지요...흐흑, 슬퍼질려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