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암서원(近嵒書院)
본 서원書院은 처음 1551년(명종明宗6)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선생이 세운 18서당의 하나인 영빈서당이 그 모태로 고노古老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현촌縣村 천변창사남川邊倉舍南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산양창의 남쪽 10리 지점에 해당되는 지점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 고장 출신으로 甲子士禍에 피화되어 해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우임寓菴 홍언충洪彦忠선생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겠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활재活齋 이구李榘가 계사癸巳년 4월에 상주목사에게 정문呈文을 올리고 이어 갑진甲辰년 7월에 부사를 역임한 전명룡全命龍이 다시 정문呈文을 올려 관의 승인을 받아 1665년(현종6)을사乙巳에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여 향현사鄕賢祠가 되었으며 그 후 4년 뒤인 1669년(현종顯宗10) 을유己酉에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을 주벽主壁으로 봉안奉安하고 예조의 허가를 받아 서원書院으로 승원陞院하였다.
1702년(숙종28)에는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두 선생을 추배하고 1786(정조10) 병오丙午에 활재 이구活齋 李榘, 식산 이만부湜山 李萬敷,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세 분 선생을 배향하여 7현사가 되었으며 묘호는 경모사景慕祠, 원호院號는 근암近嵒이다. 근암서당近嵒書堂의 현액現額 글씨는 장문당藏文堂 원진해元震海(1594-1651)의 글씨인데 서원으로 승원陞院 하면서 “원院”자를 조시호曺時虎가 고쳤다고 한다.
흥교당興敎堂과 주일재主一齋의 글씨는 상주목사를 역임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龍의 글씨이고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岺이 지나다 이곳에 들러 지은 시판의 글씨는 교관 신명전敎官 申命傳의 글씨이며 지원루知遠樓 욕인재欲仁齋 유의재喩義齋의 현액懸額은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백녹동학규白鹿洞學規와 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는 처사 오상원處士 吳尙遠의 글씨이다. 1870년(고종高宗7)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고 다시 복원하였다.
(현現 근암서원近嵒書院 현액懸額은 1982년 중건 때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의 14대손인 처사 성암 이원기處士 星庵 李源箕선생이 썼고 2011년 중건 때 탁본하여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암 이원기 처사의 14세 때 쓴 글씨라고도 전한다)
* 연표
- 1551년(명종5) - 영천 신잠 목사가 영빈서당을 세움)
(1544년(중종39) 근암서당 창건)
- 1653년(효종4) -
4월에 활재 이구 등 사림에서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는 향현사 건립을
상주목사에게 청원
- 1664년(현종5) -
부사를 지낸 전명룡 등이 다시 정문을 올려 관의 승인으로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는 향현사 건립승인
- 1665년(현종6) -
우암 홍언충을 배향
- 1669년(현종10) -
한음 이덕형을 주벽으로 봉안하여 예조의 승인을 받아 서원으로 승원
- 1702년(숙종28) -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두분을 추배
- 1786년(정조10) -
활재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의 세분 선생을 추배하여
배향선현은 7현이 되었다
- 1870년(고종7) -
서원 훼철毁撤令에 의해 훼철毁撤
* 아쉽게도 문경에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없고 모든 서원은 서원 훼철령毁撤令에 의해
모두 훼철毁撤
근암서원 배향 선현 近嵒書院 配享先賢 칠현사적 七賢事蹟
1. 우암 홍언충寓庵 洪彦忠 1473(成宗 4 癸巳) - 1508(中宗 3 戊辰)
자는 직경直卿, 호는 우암寓庵이며 본관本貫은 부계缶溪(缶林)이고, 대제학大提學과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의 아들이다. 1495년(연산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해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 4)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03년(연산 9) 교리가 되고, 갑자사화에 연루連累되어 해도로 유배되고 중종반정으로 푸려났으나 이후 벼슬을 하지 않았다.
후진을 양성하다 36세에 돌아가셨다. 저서로는 자만사自挽辭가 있다.
2.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년(明宗 16 신축辛丑) - 1613년(光海君 5 계축癸丑)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이며 본관本貫은 광주廣州로 이민성李敏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로 어린나이에 양사언과 막연한 사이였다.
1580년(선조 13)19세 때 경진 별시문과 을과1위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이어 박사 대사간 대사성 대제학 한성판윤 사도(경기 황해 평안 함경도) 도체찰사 영의정을 지냈다.
광해군의 등극하여 영의정에 재기용 되었으나 1613년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다.
퇴계의 학문을 잇는 남인이며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명분을 숭상하여 국난을 당하였을 때
구국의 공을 세웠다.
22대 까지 종통宗統이 적장손으로 양자 없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가문으로 전해지고. 오성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그와의 사이에는 야담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한음집漢陰集이 전한다.
"지유국이 불지유신 知有國而 不知有身"
한은漢陰 이덕형李德馨은
1561년 (명종16년) 출생
1613년 (광해군 5년) 작고.
1580년 (선조 13년) 19세 때 경진별시문과을과1위로 급제.
1591년 대제학 (31세) 문형(文衡 홍문관 예문관 양과 대제학)
1597년 우의정 (37세)
1602년 좌의정 (41세)
1603년 영의정 (42세) 3번역임.
ㅇ 광주이씨는 조선조에 정승 5인, 문형 2인, 청백리 5인, 공신 11인. 문과합격 191인.
ㅇ 경주이씨는 조선조에 상신 8인, 대제학 3인, 공신 10인.
* 이항복 선생은 이덕형선생에게
"성인은 살아서는 그 뜻을 빼앗지 못하고 죽어서는 그 이름을 빼앗지 못하는구나"하였다.
* 사가독서賜暇讀書란?
조선시대 유망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게 한 제도.
1420년(세종 2) 3월에 세종이 집현전 학사 중에서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유급휴가를 주고 연구에 전념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최초 선발은 1426년에 있었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했으나 집에서는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고 하여 1442년부터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했다. 때문에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도 불렀다. 사육신 사건으로 집현전이 폐지되어 한때 중단되었으나 성종이 부활시켜 홍문관의 젊은 학사 중에서 선발하여 독서하게 했다. 동시에 용산에 있던 폐사를 수리하여 독서당으로 삼았다. 1517년(중종 12)에는 두모포豆毛捕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16세기까지는 사가독서제가 활발히 운영되었다. 1528년에는 독서당 규칙을 만들어 계절마다 읽은 책의 목록을 보고하고, 월별·주별로 제술시험을 보아 불합격하면 퇴거시키게 했다. 왕들은 때로 술과 악樂, 물품을 내려 격려했다. 그러나 인조 이후에는 침체하여 명맥만 유지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사가독서 기간은 1~3개월이었으나 개월을 한정하지 않고 '장가'長暇를 주기도 했다. 선발인원이나 시기는 특별히 정해놓지 않았다. 최고 12명을 2번으로 나누어 독서당에 상근시킨 적도 있었으나 보통 3~6명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총인원은 1426~1773년(영조 49)까지 320명이다. 사가독서에 뽑힌 자를 사가문신이라고 불렀는데 상당한 영예로 간주되었다. 역대의 사가문신에는 남수문南秀文·신숙주申叔舟·김안국金安國 이이李珥·이민구李敏求 등 학문이 뛰어난 문신이 많다.
3.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 1540 (중종 35) - 1594 (선조 27)
자는 임부任父 호는 사담沙潭이며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김범金範의 아들이다. 157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 사인舍人이 되고 1590년 전한典翰이 되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는 보은에서 창의하여 600여명의 의병을 규합糾合하여 충복군忠復軍을 편성하여 공을 세웠다.
주서절요. 근사록. 소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1594년(갑오)에 돌아가셨다.
4.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1621년 (광해군 13 辛酉) - 1678년 (숙종 4 戊午)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아버지는 대사간 호鎬이다. 어려서 정경세鄭經世에게 배웠다. 1654년(효종 5) 진사가 되었으며, 그해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설서·전적·정언을 거치면서 경연經筵에서 〈주례〉를 강학하기도 했으나, 효종에게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가 서인의 배척을 받아 고산 찰방으로 좌천되었고, 다음해 파직당했다. 1658년 경성판관으로 재임시에는 부세를 줄이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일으켰다. 다음해 제1차 예송禮訟 때 송시열宋時烈의 기년복론朞年服論을 공격하고 윤휴尹鑴 의 3년 복론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자 1660년 황간 黃澗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유배에서 풀렸으나 복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삼택재를 짓고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자 관직에 복귀하여 병조좌랑·사간을 역임했다. 58세 때 돌아가셨다.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저서로木齋集이 있고 편서로 주역구결, 의례고증,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 휘찬여사彙纂麗史,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해동성원海東姓苑, 경서해의經書解義 등이 있다.
5. 활재 이구活齋 李榘 1613년 (광해군 5 癸丑) - 1654년 (효종 5 甲午)
자는 대방大方이요 호는 활재活齋이며 본관本貫은 전주全州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8세손이며 공조정랑工曹正郞 광흡光洽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제가백가서를 탐독하였다.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홍호 권근 등과 교류하였으며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을 따랐으며 퇴계의 문하중 병파인 류승룡의 학통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가 추진될 때 유직 등 영남유생 900여명의 반대소를 올릴 때 반대소를 지어 올렸다.
이이李珥의 학설을 비롯하여 서경덕 육구연 진흥장 왕수인 장자와 불교를 모두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며 특히 영남학파 형성에 있어 이理의 초월적 실재성을 강조하여 주리적이기론主理的理氣論을 발전하게 하였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42세에 돌아 가셨다.
6.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1664년 (顯宗 5 甲辰)- 1732 (英祖 8 癸丑)
詩 - 구름은 지나가는 것일 뿐
太陽中天 而片雲過之(태양중천 이편운과지)
태양은 저 높은 하늘에 있고 조각구름은 그저 지나갈 뿐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옥沃의 아들이다. 누대累代로 한양에 살다가 상주尙州로 이거移居 하였으며 일찍이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1729년(영조5)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堤에 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사퇴辭退하고 후진양성後進養成과 풍속교화風俗敎化 저술활동著述活動을 하였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정시한丁時翰의 입문이며 권상일權相一 이제李栽 신유한申維翰 권이진權以鎭 이익李翼 등과 유교하였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기氣는 이理를 따라서 동하고 생성 되며 이는 기를 따라 드러난다고 하여 이것은 이가 운동과 생성의 원인이 되지만 현상에 있어서는 기의 작용을 중시하였다. 서예書藝에도 뛰어난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만년 에는 역학易學에 전념하였다.
정주학을 탐구하고 혁혁한 집안이면서도 분화를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역통易統, 대상편람大象便覽, 사서강목四書講目, 등이 있으며 식산 이만부 전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제로 지정되어있다. 68세에 돌아가셨다.
식산 이만부 선생 묘비는 임금이(英祖) 내렸다하며 묘비에는 徵士 식산 이선생 지묘
“徵 士 息 山 李 先 生 之 墓“로 기록되어 있다.
* 天雲精舍 란.
* 징徵 성成이니 징사는 1. “학문을 이룬 선비”
2.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던 선비”라는 뜻.
*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처사處士는 남명 조식이며
가장 유명한 징사徵士는 명재 윤중 이라 한다.
7. 청대 권상일 淸臺 權相一1679년 (肅宗 5 己未) - 1759년 (英祖 35 己卯)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권구權丘의 증손이며 권심權深의 아들이다. 이구李榘와 이제李栽 이만부李萬敷의 학풍을 존성하였으며 퇴계退溪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하여는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분리하여 이理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 되고 기氣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된다고 하였다.
1710년(숙종肅宗 36 경인庚寅)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 정자로부터 이의 홍문관 부제학 한성좌윤지중추부사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80세에 기사소耆社所에 입入하여 천수 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 하였다.
竭誠纂修 功存闡義 一十六字 以代鐵券
(갈성찬수 공존천의 일십육자 이대철권)
(편찬의 높은 공이 세상에 빛나니 16글자를 내려 기리고자 한다)는 뜻
퇴계선생退溪先生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였다.
저서로는 근사록집해 등 여러권을 남겼으며 80세에 돌아가셨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 참고사항
1. 서원의 규모
1982년 복건 4동 340평 -유림에서
2011년 중건 10동 1,146평 - 문경시
2. 편액관계
ㅇ 지원누知遠樓 - 원대한 꿈을 가지라는 의미 2층 누각에 8작 지붕.
식산 이만부가 썼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음.
현재의 것은 2011년 중건 때 농곡 조용철聾谷 趙庸澈이 썼다.
ㅇ 욕인재欲仁齋 - 근암서원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 공간 (동쪽)
ㅇ 유의재喩義齋 - 근암서원 유생들이 기거하덩 기숙 공간 (서쪽)
식산 이만부가 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것은 2011년 중건 때
경암 김호식이 썼다.
ㅇ 근암서원近嵒書院 -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강학 공간.
서원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2칸 반 팔작지붕 겹처마로 되어있다.
처음 서당 때 장문당 원진해(1594 - 1651)썼고 승원 후에는 당堂자를 원院자로
조시호가 개서했다. 그러나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것은 1982년 중건 때 퇴계 14대 직계손인 진성眞成 이원기李源箕가 썼다. (14세 때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ㅇ 전교당典敎堂 - 강당 내 동편에 있는 방으로서 행사시 원장 및 헌관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
ㅇ 주일재主一齋 - 서당 때 선원 김상용(1561 - 1637)이 상주 목사 때 전서로 썼다.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의 전교당典敎堂과 흥교당興敎堂은 2011년 중건 때 심정 황규욱이 썼다.
ㅇ 경현사景賢祠 - 7현을 배향하는 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겹처마로 되어있다.
ㅇ 전사청典祀廳 - 제례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는 곳. 사당 옆에 있으며 향교, 서원, 문묘가 일치하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구성 되어 있다.
ㅇ 내삼문內三門 - 사당 영역과 강당 영역을 구분하는 문.
ㅇ 제영題詠 - 서당書堂 때 백담百潭 구봉령具鳳齡이 읊었다.
* 제영 - 시를 짓고 읊음. 또는 시가詩歌.
● [유교는 일상생활을 가장 합리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영위하기위한 실천지침]
○ 향사의례享祀儀禮
■ 배향위차配享位次
서원과 향교는 모두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중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지만 향교가 국가가 주도하는 유교지식을 전파하고 사회교화를 이루는 형태인 반면 서원은 사족세력들이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면서 그들 스스로가 교육과 교화를 행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기존의 훈구·척신들에 의한 무분별한 청치 운영에 불만을 느끼고 자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구체화시킨 사람이 바로 중중때의 조광조이며 그는 자신들 즉 사림세력들의 선배 도학자의 각 지방 향교에서의 배향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기묘사화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노력과 더불어 실질적인 사원건립운동도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 할 수 있는 백운동 서원이 1543년(중종 38)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백운동 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으로 이름이 더욱 높습니다. 이러한 백운동서원의 사액서원화는 당시 서원건립운동을 주도했던 이황의 상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서원의 사액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 지방에는 국가가 설립한 향교라는 중등기관이 버젓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림들의 의해 또 다른 중등기관이 세워지고 나라에서 그것을 인정했다는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던 재지사족들의 이해와 요구가 어느정도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서원의 수가 16세기 후반 사림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급증하여 17세에 200여개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16세기 이후의 정치운영의 방식인 붕당론의 활성화와도 관계가 있는데요, 붕당 자체가 학파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기 때문에 자파 세력을 확대해 가기 위해 성리학 이론을 열심히 연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붕당이란 말자체가 ‘여론정치’ 당시로는 공론이라고 한 것임으로 중앙 정치문제에 대한 향촌 사림의 일차적 여론 결집의 장이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서원의 여러 역할들과 더불어 서원은 교육과 제향 기능의 중심이 되었는데 교육부분에서는 관학과 달리 각 서원마다 자율적인 교육내용과 방법을 채택했는데 대개 이황이 이산원규(伊山院規)에 제시한 틀을 따랐다고 한다. 교육방법은 주로 사원 자체의 규율과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강의평가는 아주 철저해 요즘 대학의 강의평가와 유사해 흥미롭다. 즉 원생들의 평가는 대통, 통, 약통, 조통, 불통의 5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생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고 학업성적과 독서지침을 마련하는 생활기록부도 있었다고 한다. 서원은 또한 제향기능도 교육기능 못지않게 중시되었는데 선현에 배향하는 그 절차에서부터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배향인물은 주로 유교적 윤리로서 모범이 되는 인물을 배향했다. 그러나 붕당의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에 이르러서는 각 문중이나 학파의 스승으로 그 배향인물이 한정되어 향촌사회의 교화와는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이러한 서원의 복합적인 기능이 뒤에 가서는 오히려 많은 폐단을 낳았는데 서원의 폐단은 17세기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조선후기 정치운영의 원리는 붕당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대중의 공론이 의리와 명분이라는 잣대에 의해 평가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상호 붕당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극한 대립을 보이게 되고 이것이 향촌사회에서의 사원의 남설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각 가문은 동족의식을 세 확장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여 자기 가문의 조상들을 서원에 배향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서원의 배향기준은 아무런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했으며 더욱이 재지지주출신의 서원설립자인 사족세력들은 수령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의 휘하에 있는 농민들의 군역을 회피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등 서원의 공적인 역할을 소멸되고 단지 문중의 배향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문중서원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영조대인 1741년에는 173개에 달하는 서원을 철폐하기도 했는데 그 뒤 서원의 남설은 줄어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재지 사족들간의 붕당의 불일치에 따른 지역의 분할과 조선후기 사회변동과 맞물려 향촌사회에 사족들의 지위가 약화·축소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육을 누가 백년지대계라고 했던가요? 교육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는 역사적 사실... 이런 사실이 요즘 들어 너무 뼈저리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조선시대 공무원의 꿈을 품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 향교
향교는 고려 인종 때 군현제를 바탕위에서 국가가 지방교육기관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유교가 정치
념의 역할을 상당 부분 맡았고, 고려시기에도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지방에 유교이념을 침투시킬 의도로 향교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향교는 私學12도 등의 사학에 밀려 크게 저조했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는 縣단위 이상의 지역에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하고 종6품의 敎授나 종9품의 訓徒를 파견해 향교의 교육·문화적 기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 중앙파견의 교관이 폐지되고 지방 향반으로 구성된 교임들로 대체되었는데 이들은 향교운영에서 관의 간섭을 배제하고 각종 제례를 주도하고 향소임원의 선출과 수령의 통치를 자문하등 지방양반세력의 대변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향교의 학생을 교생이라 하였는데 교생은 신분에 따라 액내 교생(額內校生:정원내 교생)과 서얼과 평민은 액외 교생(額外校生:정원외 교생)으로 구분되고 이들은 신분에 따라 공부하는 장소와 내용, 재래에서의 역할을 달리 하였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들을 모시고 받드는 공간과 교육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봉사(奉祀)의 기능은 대성전(大聖殿)에서, 후자의 교육 기능은 명륜당에서 각각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향교의 기능은 신분제의 변동과 양반사족의 이해관계 앞에서 그 교육적 기반이 흔들리게되고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의 발달로 점차 위축되어 가고 있는데 이는 16세기 사람세력의 약진과 양반중심의 신분제가 자리잡으면서 교생으로 입학하면 군역이 면제되는 특권을 이용해 부유한 양인들의 병역기피처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향교의 학생인 교생의 수가 정원을 초과하여 향교의 교육기능은 마비되고 이를 기반으로 생원·진사로 진출하는 양인들이 증가하자 이럼 점들을 싫어하는 양반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향교를 기피하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관학교육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노력 또한 교육기관 본연의 모습으로 환원 시키려는 의도보다 제례행사를 강화하여 사회 변동에 대응하여 기존의 사회체제를 유지할 목적으로 예속과 교육을 더욱 강조함으로 오히려 향교의 기능을 더욱더 축소시켜버리고 말았다.
결국 향교는 조선후기에 들어 정부의 지방통치의 장으로 양반들의 회합과 관의 부당한 간섭에 대항하여 통문을 돌리고 유회를 열어 자신들의 신분적 이해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갔으나 이러한 두 이유로 인해 결국 鄕校는 더 이상 교육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교생의 사회적인 지위도 떨어지면서 새로 생기기 시작한 서원이 향교의 기능을 대신해 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