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다(2023) / 김민홍 제6시집(8)
67) 목욕탕에서
세상의 옷을 벗어 버리니
홀가분합니까?
누런 팔찌와
목걸이를 벗진 못했군요
당신 성기 속에 들어있는 것도
혹시 금덩이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지요
세상의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만 목욕하러 옵니다
떼밀어 주는 아저씨만
속옷을 입고 있는 목욕탕
68) 지나간다
버스가 지나간다
사람이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간다
난 여기 이 자리 그대로 있는데
버스가 다가간다
사람이 다가간다
시간이 다가간다
난 거기 그 자리 여전히 있는데
지나가며 날 힐끗 쳐다보는 버스
지나가며 날 슬쩍 훔쳐보는 사람
슬그머니 날 스치는 시간
그 자리에서 내가 힐끔 쳐다본 버스
그 자리에서 내가 힐끔 훔쳐본 사람
그 자리에서 내가 외면한 시간
난 어디도 가지 않는다
난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난
어디에도 없다
69. 고양이
내가 즐겨 읽는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 여사께서도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자신의 시집을
정성스럽게 출간해 주던 시인이며,
출판사를 운영하던 크리니츠키씨 부부의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일화를 남겼지
교사 시절
교무실 내 옆자리 젊은 여선생님은
고양이 목각인형을 책상 위에 잔뜩 세워놓았지
난 고양이에 별 관심이 없네
1924년경 발표한 이장희 시인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는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수업을 하곤 했지만.
모두 까마득한 기억들이야
그런데 며칠 전
함께 사는 늙은 고양이가 곡기를 끊어
출근도 하지 않고 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좀 황당했어
치매까지 앓다 죽은 우리 집 노견(老犬)이
생각났지, 그렇다고 출근까지 안 하고 돌보아주진
못했어, 그런 생각조차 못 했지
어머니께서 위독하실 때도
나는 일하러 가야 했었어
물론, 외할머니께서 잠시 곁에 계셨고
임종은 지켰지만
70. 흘러간 노래 1
오늘도 나는 흘러간 노래의
악보를 외우고 있다,
점점 더 외워지지 않는
외국어 가사들, 막상 외운다 한들
꼭 불러보겠다는 말은 아니다
혹시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
노래 속 소환되는 그 시절,
어김없이 탈색되는, 그 시간을 더듬는다
오늘도 나는 흘러간 노래를
되풀이 듣고 있다,
흘러간 곳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일까?
이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잘 할 수 있는 걸 해야 할 때라고,
명인 반열에 오른 기타리스트의
스치듯 한 혼잣말이 종종 떠오른다,
그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네이버, 오늘의 운세
"가는 세월 잡지 말고, 오는 세월 막지 말라"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없구나!
다만 오늘은 어김없이 2023년
4월 19일이라는 것
71. 흘러간 노래 2
흘러간 노래가 익숙하다면
당신은 늙었다
불과 이삼 년 전 사진 속의
얼굴이 젊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늙었다
그런 당신은 정녕
젊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저 혈기로 생을 소모했을 뿐,
혹시 이 말에 화가 난다면
당신은 덜 늙었다
흘러간 노래에 익숙한 내 귀도
내 목소리도 늙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72. 시들해진다는 것
굶주림과 병마에 찌든 아프리카 오지
아이의 두려운 눈빛을 클로즈업한
유니세프 광고에 끌려
협소한 내 통장에서 몇 푼 안 되는
월정액이 빠져나간 지
십수 년
요즘 광고는 연출된
슬픈 눈들이 너무 많아
슬그머니 채널을 돌리곤 하지,
죄의식과 슬픔도 함께
이런 시들함이 정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왜,
그대 전화 속의
시들해진 목소리는
갈수록 깊은 쓸쓸함으로 읽히는지!
73. 냉소冷笑
평소 무표정한 그가 가끔 짓는 미소가
냉소로 읽히지만, 못 본척하지,
고의성은 없어 보이기에.
그가 살아낸 생이 만들어 준 듯한
무표정과 냉소,
그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지,
'한계'를
'팔자'라고 읽으면 그가 조롱하겠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미소와
눈빛이 차갑게 보일 때
등줄기가 서늘했지,
그도 분명 내 속에 사는 냉소를
나보다 먼저
알아차린 게 틀림없어.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웃을 일이 없어도 자꾸 웃으라고 한
그녀의 마음이 고마워서
사진 찍힐 때만이라도 웃으려 애써보지만
십중팔구는 우울한 눈빛으로 찍히는
나의 초상
내 속에 사는 어떤 어둠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냉소로 읽히는 걸까?
다시 등줄기가 서늘했지
74. 말쟁이
아무리 반복 연습해도
오독이나 오타는 집요하게 날 물어뜯고
손가락은 버벅거려
에러가 난다. 에러는 외국어야
우리말로는 '조심하지 않아 그르치는 일'이지.
그런데 '실수'와 '에러'는 왜 느낌이 다를까.
평생 에러에 시달리다 지친 피아니스트가 있었어.
그는 항상 크든 작든 콩쿠르만 나가면 떨어졌지.
'콩쿠르'도 외국어, 한자어로는 '경연(競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연주보다 작곡을 택했어.
음 이탈조차 코드로 그려내는 작곡가.
그리고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지.
그가 누구냐고?
오래전 스치듯 들은 얘기라 희미해졌어.
아니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산다는 것 자체가 에러투성이인데,
너무 닥달하지 말게, 몸 다친다네,
물론 마음은 더 다치지! 하지만.
에러가 있어서 생은 완벽한 거야!
라고, 너는 말하고 싶지?
이 말쟁이야!
75. 통화
"내가 대체 뭘 좋아하는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언지
잘 모르겠어요"
신문기자로 정년을 마친 후배의
뜬금없는 전화
얼마 안 되는 연금은
조울증을 앓으며 혼자 살고 있는
큰딸에게 주기로 했다고,
아무래도 잘못 살아온 것 같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들렸다.
나는
평생 사랑받고 싶었지만
방법이 거칠었고,
공짜로 얻으려고 했고,
여전히 서툴다고 대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