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이스라엘에 머물러도 될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예정대로 여리고에서 마사다로 향했다. 성지는 아니지만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유대인들이 3년을 어떻게 이 요새에서 견뎠을지 직접 보고 싶었다.
사해를 내려다보며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다. 높이가 450m, 남북 길이는 620m, 둘레 1,300m, 평균 너비는 120m정도의 마름모꼴이라는데 약간의 경사가 있는 평지였다.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처럼 마사다는 천혜의 지형이었다. 적이 쳐들어오면 마사다에서는 사방을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적들은 접근조차 어려워 보였다.
이곳엔 원래 헤롯왕의 궁전이 있었는데, 로마의 침략으로 유대인 천 여 명이 최후의 항전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헤롯왕은 빗물을 받을 수 있는 물 저장고를 만들어 우기마다 수만 리터의 물을 모았다. 저장고에는 약 750만 리터를 모을 수 있었다. 덕분에 목욕탕, 사우나를 이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식량 또한 수십 년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저장했고, 평평한 땅에 농사까지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둘기 집을 만들어 육류 섭취를 했으며, 배설물로는 연료나 거름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온다.
로마군들은 50도가 넘는 더위와, 홍수를 일으키는 우기의 집중호우, 강풍으로 무척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식량,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으니 마사다를 바라보는 마음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은 서쪽 벼랑 끝에 흙과 돌로 성채를 쌓았다. 마사다에서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성채는 높아져만 갔다. 로마군은 투석기로 20-30kg 돌을 날렸다. 버텨오던 마사다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로마군에게 목숨을 잃는 게 두려웠다. 산다고 해도 로마군의 노예가 되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마사다 유대인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로마군이 당도했을 때는 1000여명의 주검뿐이었다고 한다. AD70년에 유대 왕국은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마사다는 여전히 뜨겁고, 건조했지만 무너진 담과 터들이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못 다한 이야기들, 곳곳에 묻혀 있는 이야기들이 흙먼지로 부옇게 일고 있었다.
잠깐동안 영상을 관람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걸어 올라올 수 있는 길(뱀길)도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잔도 같은 다리를 건너 마다사 안으로 들어간다.
물 저장고
비둘기를 키우던 곳
기둥만 남은 궁궐터라고...
마사다 건너편, 지층이 아름답다.
내려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