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홍양호의 소귀당 ①
난가(爛柯)의 시간
화영지(花影池) 거북바위에 새긴 윷판
조장빈 / 산악문화연구소
화영지 거북바위와 윷판문양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1767년 취촌(醉村) 이집(李㙫, 1664~1733)의 손자 이은(李溵)으로부터 분산설(分山說)을 받아 소유권을 이전받았다. 이후 1777년 관직에서 물러나 교외에 거처하면서, 우이동 묘막의 외사(外舍)로 일곱 칸짜리 소귀당(小歸堂)을 건립하였다. 냇가에는 '겸산(兼山)'이라 편액을 건 작은 누각을 세웠으며, 화영지(花影池)와 수재정(水哉亭)을 지었다. 아울러 일찍이 조부 홍중성(洪重聖, 1668~1735)이 유람하여 알게 된 만경폭(萬景瀑)을 제1곡으로 삼고, 재간정(在澗亭)까지 이르는 우이구곡(九曲)을 설정하였다.
홍양호의 손자 홍경모는 어린 시절(8세) 봄가을로 할아버지를 따라 우이동을 찾았다. 할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벼루와 책상을 받들었고, 밖으로 나갈 때는 지팡이와 신발을 챙겨 모시며 날마다 산빛과 샘물 소리 사이를 거닐고 노닐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홍경모는 쇠락하고 낡은 집과 연못을 수리하고 물길을 새로 내었다. 그리고 신선의 거처와도 같은 겸산루에서 화영지의 화초와 물고기를 바라보며 ‘호접몽(胡蝶夢)’의 자연합일을 누렸다.
“아침저녁으로 겸산루에서 쉬며 바라보고 즐겼다. 즐거움이 지극하면 문득 지팡이를 짚고 못 사방을 배회하였다. 큰 바위 하나가 못가에 서려 있는데, 머리를 못으로 숙이고 있어 마치 엎드린 거북이 같았다. 그 등에는 기괘(棋罫)를 새겨두었다. 가끔 시골 노인과 바둑돌을 놓으면 그 소리가 딱딱 울려 퍼지며 개울물 소리와 화음을 이루었다. 차를 몇 잔 마시고 갈홍(葛洪)의 ‘으슥한 골짜기가 시원하여 바람 소리가 맑디맑구나. 신선의 집은 영원하리니 꽃과 나무도 길이 무성하리.’라는 구절을 외웠다. 이어 베개를 베고 눕다가 지겨우면 잠을 잤다. 이에 흉중에 아무런 사념이 없어 가슴이 맑아지니, 장자(莊子)가 말한 ‘내가 나를 잊었다[吾喪我]’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조선 후기 사회가 지향하던 이상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5폭에 그려진 ‘기괘(棋罫)’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이녕(李寧)의
팔경(八景)에 이어 설정된 괴산 선유구곡(仙遊九曲)의 제7곡 기국암(基局岩)과 제8곡 귀암(龜岩)
겸산루 마루 앞 화영지 가에는 “머리를 못으로 숙이고 있어 마치 엎드린 거북이 같은데 등에는 기괘(棋罫)를 새겼다(頭入于池如伏龜。背刻棋罫。)”라는 기록처럼 등에 기괘를 새긴 거북바위(石龜)가 있었다. 지금도 겸산루 터에는 거북 형상의 너럭바위가 놓여 있다. 돌뿌리가 깊어 외부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기반암으로 보인다. 이 돌거북은 자연석을 인위적으로 가공하여 거북 머리 형태로 만든 흔적이 선명해, 화영지 조영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등에는 윷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홍경모는 〈화영지기(花影池記)〉에서 이를 ‘기괘(棋罫)’로 기록했다.
‘난가(爛柯) 고사’로 알려진 중국 남북조 시대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를 보면 “수많은 동자가 바둑(棋)을 두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見數童子, 棋而歌)”라 하여 ‘기(棋)’로 기록하고 있다. 국내 문헌에서 ‘기(棋)’는 주로 바둑과 장기를 뜻하지만, 중국에서는 여러 형태의 고누놀이를 모두 ‘○기(棋)’라고 불렀다. 이처럼 초기에는 나무로 만든 말판 놀이를 총칭하던 ‘기(棋)’라는 표현이, 후대 조선 시대나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 가장 성행하고 예술로 대접받던 '바둑(圍棋)'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어진 것이다. 화영지 거북바위의 윷판은 그 크기가 손바닥 정도로 작아 실제 오락을 즐겼다기보다는, 난가 고사의 신선 세계를 상징하기 위해 전래의 윷판 문양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홍양호는 우이동에 소귀당을 짓고 우이구곡을 경영하였지만, 그의 본래 거처는 도성의 사의당(四宜堂)이었다. 사의당 남쪽 마당에도 돌거북이 하나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조각이 기이하고 정교하여 비늘과 갑옷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등에는 일영(日影)과 24방위를 새겼다(石龜一在南庭。雕刻奇巧。鱗甲皆動。背刻日影及二十四方位。)”고 한다. 그는 〈석구연구(石龜聯句)〉에서 “등에는 해그림자를 새겨 시각을 점친다(背刻日影以占時辰。)”라고 하였고, 또 “하늘의 시간(天時)을 너의 등판에 맡겼으니, 표(시계바늘)를 꽂아 날씨와 시각을 시험하노라(天時付爾脊, 揷表驗陰晴。)”라고 읊었다. 이를 통해 사의당의 돌거북 등에는 방위와 시간을 나타내는 해시계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의당 돌거북에 새겨진 문양의 형태는 지금 전하지 않지만, 돌에 새겼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밀한 시침선보다는 화영지의 윷판 문양처럼 단순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해시계(이집트) / 해시계 잔편(신라 6-7세기) / 평면해시계(조선) / 도제 거북이 모양 해시계(조선) / 해시계(조선) /
화영지 돌거북의 윷판 문양 - 출처: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 위키백과
신라의 해시계 잔편이나 조선의 평면해시계 도상의 선을 점으로 단순화하면 화영지 돌거북의 윷판 문양과 유사하다. 방형의 돌에 새긴 평면해시계에는
12시각선과 '동서남북'이 표시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영침(影針)을 꽂는 구멍이 남아 있다.
우이동 소귀당과 도성 훈도방 진고개의 사의당에 각각 놓였던 두 개의 거북바위와 윷판 문양.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난가(爛柯)의 시간”을 상징하고, 다른 하나는 도회지 생활을 위한 현실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였다. 홍양호와 그의 손자 홍경모는 관직을 내려놓고 우이동으로 돌아와, 그토록 그리던 동천(洞天)의 주인이 되어 전원을 꾸미고 구곡을 경영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소귀당의 자취라고는 몇 점 남은 괴석과 이 거북바위뿐이며, 구곡은 주변 경관이 너무 많이 변해 그 위치조차 찾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홍양호가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구곡을 거닐었던 그때처럼, 두 사람은 지금도 신선을 기다리는 바윗길인 ‘후선등(候仙磴)’을 올라 천관암 위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달 이 돌거북을 찾아 잠시 거북 등에 걸터앉아 쉬면서, 홍경모가 후선등을 지나 천관암에 올랐던 옛길을 떠올려 보았다. 오르는 길가에 법화사의 오래된 목련은 소리 없이 피고 지는데, 필자가 천관암 너머 계곡을 가기 위해 이 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40여 년이 지났다. 엊그제 일처럼 선한데 지나간 세월이 아득하다. 발길을 돌려 길을 내려오는 길, 문득 우이동 계곡에는 지금도 거북 등 위로 '난가의 시간'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주석 및 참조〕
1. 전통적인 윷판은 중앙의 방(北極星)을 중심으로 28개의 말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방을 제외한 24개의 말밭은 24절기(혹은 24방위)를 상징한다. 풍수지리나 동양 천문학에서 기본이 되는 이십사산(二十四山) 및 24방위는 십간(갑을병정경신임계) 중 8글자와 십이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글자, 팔괘(건곤간손) 4글자를 조합해 360도를 15도씩 24개로 나눈 것이다. 이렇듯 윷판은 방위와 시간을 나타내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 문화재청, 2020
2. 장장식, 「한국과 몽골의 판놀이 연구-고누형 판놀이를 중심으로-」, 비교민속학회, 2009
3. 『관암전서(冠巖全書)』,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자료 좋습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