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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만나다
이승훈
1. 아상을 버려라
내가 자아 찾기에 실패하고, 자아 소멸, 혹은 ‘자아는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자아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유에 도달한 것은 초기의 자아 찾기가 ‘나-너-그’라는 인칭 변화를 통해 수행되면서 후기구조주의 철학과 만난 게 동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중기에 해당하는 자아 소멸의 단계는 시쓰기를 구성하는 자아-대상-언어의 세 요소에서 자아와 대상이 소멸하고 언어만 남는 시쓰기, 이른바 ‘언어가 쓴다’는 명제를 낳는다. ‘언어가 쓴다’는 것은 부르주아적 주체든 뭐든 아무튼 자아가 소멸한 시쓰기, 창조 주체로서의 내가 사라진 시쓰기이고, 그것은 시인의 주관, 곧 정서, 상상력, 이성 등에 의해 대상을 지배하는 근대 서정시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시적 인습, 장르, 문학의 제도성에 대한 해체를 노린다.
그러나 나는 이 무렵 자아가 없다는 생각을 어디까지나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 언어학 혹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깨닫는다. 주로 방브니스트, 데리다, 라캉, 바르트의 이론이다. 자아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할 때 자아가 탄생하고, 따라서 말, 언어가 없다면 자아가 없다. 그리고 말을 할 때 말하는 나(언술 행위의 주체)와 말 속의 나(언술 내용의 주체)가 태어나고, 그런 점에서 나는 두 개의 나 사이에 있고, 나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렇게 자아가 없다는 사유에 도달하고도 내가 계속 불안, 우울, 광기에 시달린 점이고, 정효구 교수는 내가 이런 심적 상태에서 표류하는 건 이런 깨달음이 언어학을 매개로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른 지적이다. 왜냐하면 자아 소멸, 주체 소멸을 주장하면서도 내가 자아로부터 완전한 자유나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매개로 했기 때문이고, 그건 이론이고 따라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우연히 불교, 그것도 선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나로서는 너무 늦은 법연法緣이다. 나는 1990년대 초 어느 봄날 진주 장모님 49재 때 아내가 모는 승용차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진주로 내려간다. 49재는 하동 지나 쌍계사 가는 지리산 입구에 있던 작은 암자에서 지내기로 되었다. 현재는 칠불사로 부르지만 당시엔 칠불암으로 불렀다. 봄날 오전 암자로 가던 하동 국도엔 하얀 벚꽃이 피고 햇살은 따뜻했지만 나는 계속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다. 미운 사람들도 많고 사는 데 다소 지친 상태였다. 언덕 위 작은 암자 법당에서 가사 입은 여러 스님들이 독송을 하고 법당 마루엔 봄날 오전 고운 해살이 비치고 있었다.
내 앞엔 노란 표지의 책자가 놓여 있지만 나는 별로 관심도 없고 이상한 잡념과 망상에 시달린다. 스님들 독송이 끝나고 앞에 놓인 책자에 잠시 눈길을 준다. 노란 표지에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되어 있다. 무심히 책장을 넘긴다. 우연히 넘긴 부분이 ‘대승정종분’이고 눈에 띤 건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를 갖는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라는 부처님 말씀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충격을 받는다.
그렇지 않은가? 30년 넘게 자아를 찾아 헤매고 마침내 자아도 없다는 사유에 도달했지만 부처님은 그런 자아는 처음부터 없고 자아는 하나의 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동안 나는 자아라는 생각, 헛것, 환상을 찾아 헤맨 셈이다. 실체, 본질, 기원으로서의 자아를 가정하고 그런 자아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그런 자아가 언어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자아 소멸을 주장했지만 그동안의 사유는 출발부터 잘못 되었다. 나는 ‘금강경’과의 이런 만남을 ‘금강경 충격’이라고 부른다. 我相은 我想이고 我像이다. 나라는 형상, 모습은 나의 생각이 만든 것이고 생각이 만든 것은 이미지, 환상, 헛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 이미지도 헛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상을 버려야 한다. 나를 찾지 말고 나를 버려라! 그러기 위해선 생각을 버려야 하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때 깨달은 내용이다.
‘금강金剛’은 어떤 물건도 능히 깨트릴 수 있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하고, ‘반야般若’는 깨달음의 지혜, 곧 세속적인 분별을 떠난 맑은 지혜, 일체가 인연이고 空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혜를 뜻하고, ‘바라밀다波羅密多’는 ‘저 언덕에 이른다到彼岸’는 뜻, 곧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들의 세계(이 언덕)에서 반야의 지혜를 깨닫고 부처님의 세계(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부처님佛은 깨달음을 뜻하므로 결국 반야바라밀다는 반야에 의한 깨달음의 세계를 뜻한다. 깨달으면 이 언덕이 바로 저 언덕이 된다. ‘경經’은 부처님이 말씀한 진리.
나는 우연히 ‘금강경’을 만났고, 그때 처음 펼친 부분이 ‘대승정종분’이고 거기서 보살, 곧 깨달은 중생覺有情으로 살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은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곧 나라는 상, 남과 차별을 두는 인간이라는 상, 괴로운 것을 피하고 즐거운 것을 탐내는 중생이라는 상, 오래 산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과 만나면서 사유의 전환이 오고 그후 無我, 無住, 不二, 中道, 空 같은 개념들이 나의 사유를 지배한다.
시집 ‘인생’ (민음사, 2002)이 아공 사상을 강조한다면, ‘비누’(고요아침, 2004)는 법공 사상을 강조하고, 이런 사유를 나는 시론 ‘비대상에서 선까지’(작가세계, 2005, 봄), 박찬일과의 대담 ‘자아 찾기의 긴 여정’(현대시, 2002, 11, 이승훈의 문학탐색, 재수록), 이재훈과의 대담 ‘비대상에서 선까지’(시와 세계, 2004, 겨울, 앞의 책 재수록)에서 밝힌다.
결국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없고, 인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고, 그러므로 空이다. 그러나 이 공으로서의 자아는 유/무를 초월하는 자아이고, 따라서 있으며 동시에 없고, 없으며 동시에 있다. 나는 ‘대상론’에서 ‘반야심경’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금강경’에서 만난 ‘아상을 버리라’는 부처님 말씀은 ‘자아는 없다’, 곧 자아를 구성하는 몸(색)과 마음(수상행식), 이른바 오온五蘊이 공하다는 무아 사상과 통한다.
나는 지금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위암이 재발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건 5월 24일 월요일. 난 흐린 오후 세면도구, 슬리퍼, ‘지리산 스님 이야기’ 한 권 들고 아내가 모는 차를 타고 세브란스병원 14층에 입원했다. 처음 위암으로 입원한 건 3년 전 겨울 저녁. 그때 위암 절제 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재발했기 때문이다. 환자복 입고 입원실 14층 서향 창가에 서서 흐린 저녁 하늘 바라보고 다음 날 다시 수술하고, 팔에 링거 주사 꽂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퇴원한 건 어제 5월 28일 금요일 오후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아파트 마당엔 고운 햇살만 내린다. 갑자기 쓸쓸하다. 모두가 업이다. 내가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 위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6월엔 대장암 초기로 다시 입원을 하고 또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모두 받아드리자.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이고 병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반야심경’은 나, 자아에는 고정된 실체, 본질, 자성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空이고, 공은 자아가 인연의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야 지혜는 자아가 자성이 없는 공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분별, 사량, 알음알이를 떠나야 하고, 순진한 아이들의 청정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반야 지혜는 지식, 머리와는 관계없기 때문이고 머리로 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선은 깨달음과 미혹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경지다. 香谷 스님은 열반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무사람은 고개 위에서 옥피리 불고
돌계집은 시냇가에서 춤을 춘다
木人嶺上吹玉笛
石女溪邊亦作舞
나무사람은 나무와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고 돌계집 역시 돌과 여자의 경계가 해체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대상에 대한 분별을 여위고(언어소멸), 자아에 자성이 없는(자아소멸) 경지를 노래한다. 자아소멸, 무아, 곧 ‘자아는 없다’는 문제를 선종의 시각, 특히 반야의 시각에서 살피기로 한다. ‘반야심경-공중무색’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이런 까닭에 공 속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고, 빛 소리 냄새 맛 촉 법도 없고, 안계 내지 무의식계도 없다.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자아를 구성하는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모든 현상이 공하다. 그러므로 공 속에는 오온(색수상행식)도 없고, 육근(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육경(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육식(안이비설신의)도 없고, 따라서 18계(안이비설의)도 없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오온이 공하다는 말과 통한다. 자아는 고정된 실체, 본질, 자성이 없고 모두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공하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구성하는 몸(색))도 없고 마음 혹은 정신작용(수상행식)도 없다.
몸(색)은 지수화풍, 곧 흙 물 불 공기 네 가지 물질이 인연으로 만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마음(수상행식)은 이런 몸이 밖의 사물들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자아를 구성하는 색수상행식(오온)이 없으므로, 외부와 만나는 자아의 토대인 육근(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육근이 육경을 받아드려 의식하는 12處도 없고, 육근과 육경이 서로 얽히는 12入도 없고, 육근이 육경을 받아드려 육식(안이비설신의)이 생기므로 이 세계는 육근-육경-육식이 화합하는 18계지만, 육식도 없으므로 18계도 없다. 결국 세계(18계)가 없는 것은 모두 자아의 실체 없음(공)을 동기로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아 없음, 곧 무아, 자아공에 대한 인식이다. 다시 생각하자. 자아는 몸(색)과 마음(수상행식)으로 구성된다. 나는 ‘나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나의 몸’은 어디 있는가? 나의 몸은 뼈, 피, 열, 호흡으로 구성된다. 앞에서 지수화풍 4대, 곧 흙 물 불 바람에 대해 말했지만 이 네 요소는 어디까지나 요소일 뿐이지 말 그대로 나의 몸이 흙 물 불 바람으로 구성된다는 말은 아니다. 화학 용어로 말하면 원소에 해당한다. 따라서 견고한 것(흙), 축축한 것(물), 뜨거운 것(불), 흐르는 것(바람)을 뜻하고, 그런 점에서 나의 몸은 흙(뼈), 물(피), 불(열), 바람(호흡)으로 구성된다.
원각경 보안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나의 몸은 흙 물 불 바람 4대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머리카락, 털, 손톱, 치아, 가죽, 살, 근육, 뼈 등으로 이루어진 더러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침, 콧물, 고름, 피, 진액, 점액, 가래, 눈물, 호르몬, 대소변은 모두 물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작용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이런 네 가지 요소가 각각 분리되면 지금의 허망한 몸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라. 이 몸은 결국 실체가 없고, 화합해서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니 참으로 환상이나 허깨비 같다.’(원각경, 신규탁 역, 깃발, 2009, 34-35)
한편 나의 몸이 존재하는 것은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쪼이고 숨을 쉬기 때문이다. 아니 밥만 먹는 게 아니라 감자, 우유, 빵, 소고기, 물고기, 배추, 무 등을 먹는다. 그러나 밥의 경우에만 한정해도 밥을 먹는 건 쌀과 불을 먹는 것이고, 다시 벼를 먹는 것이고, 벼는 흙, 물, 햇빛, 비, 바람, 공기를 먹고 자라니까 결국 우리는 밥이 아니라 흙, 물, 햇빛, 비, 바람, 공기를 먹는다. 그러니까 밥에도 고유한 실체는 없고 흙 물 불 바람 4대가 인연에 의해 모인 물질이고, 이 밥을 먹고 유지되는 나의 몸도 그렇다. 요컨대 나의 몸에는 나의 것이 하나도 없고, 지수화풍 네 요소의 화합이 있을 뿐이다. 또한 이런 몸은 세월이 지나면 늙고 쇠약해지고 병이 들고 사라진다.
2. 마음도 없다
이런 몸(색)이 감각에 의해 바깥 대상을 수용하고(受), 마음에 형상을 떠올리고(想),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行), 이 모든 것을 안다(識). 예컨대 내가 편의점 앞을 지나갈 때 플라스틱 의자가 눈에 띤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감각(눈)에 의해 바깥 대상(의자)을 수용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의자를 보며 슬픔을 느낄 수 도 있고, 혹은 더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감각에 의한 수용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 감정을 내포한다.
나는 이렇게 수용된 것을 마음 속에 이미지로 떠올린다(想). 곧 감각의 대상을 ‘저건 파란 플라스틱 의자야’라고 지각한다. 受가 감각과 느낌의 세계라면 想은 지각perception의 세계이다. 곧 감각 대상(覺)을 아는 것(知), 자기대로 정리하는 것이고, 이런 지각은 언어를 수반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의지와 표상의 세계라고 한 바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想은 그가 말하는 표상과 유사한 개념이다. 표상은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된 세계이고, 지각 역시 覺(이미지, 감각)과 知(언어)가 결합된 말이다.
내가 想을 너무 분석적으로 해석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想은 마음(心)에 떠오르는 형상(相)을 뜻하고, 그러므로 감각으로 수용된 것을 이미지로 떠올리고 아는 것. 시간의 차원에선 이런 표상작용은 감각-지각의 순서가 된다. 따라서 감각으로 수용한 것을 기억에 의해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언어로 정리하는 단계다.
내가 受와 想에 대해 이렇게 분석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처음 불경에서 색수상행식 오온을 읽을 때 이 부분에서 많은 혼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서양의 논리에 의하면 수와 상에 해당하는 별도의 용어가 없고, 모두 지각perception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감각과 지각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감각적 수용이 이미 지각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의자를 보면 보면서(감각)가 이미 의자라는 것을 안다(지각).
한편 내가 전공으로 하는 시론의 경우에는 감각과 지각이 아니라 지각과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시적 이미지는 心像으로 번역되고, 이 말은 인간의 정신에 재현되는 형상을 뜻한다. 그리고 이 재현 양상은 육체적 지각을 통하는 경우와, 육체적 지각을 통하지 않는 경우로 양분된다. 전자의 경우 이미지는 직접 육체적 지각을 반영하고, 후자의 경우 이미지는 육체적 지각을 반영하지 않는다. 좀더 부연하자.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면 우리 정신 속에는 그 나무의 모습이 재현된다. 그러나 나무를 바라보지 않을 때에도 우리 정신 속에는 어떤 나무의 모습이 재현될 수 있다. 언젠가 보았지만 지금은 없는 나무를 기억하거나, 잡다한 지각들을 상상력에 의해 결합할 때, 혹은 꿈 속에 어떤 나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그렇다. 다 같이 정신 속에 산출되는 나무의 모습이지만, 하나는 육체적 지각을 동반하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 지각을 동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에는 육체적 지각이 그대로 반영되지만, 다른 하나에는 육체적 지각이 반영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전자는 지각과 관계되고, 후자는 상상력이나 환상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지각과 관계되든 상상력이나 환상과 관계되든 이미지는 모두 ‘정신 속에 기록되는 감각적 모습’이라는 공통점을 띤다. (이승훈, 시론, 개정판, 태학사, 2005, 192)
시적 이미지는 정신(마음)에 재현되는 형상(상)이라는 점에서 想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형상화 이전의 단계인 지각은 受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受가 이미지(감각적 수용)이고 想이 지각에 해당한다. 시론에서는 지각-이미지의 과정이고 불교에서는 이미지-지각의 과정이다. 용어의 혼란이 오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시론에서 이미지는 육체적 지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와 기억, 상상력, 환상에 의해 재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모두 ‘정신 속에 기록되는 감각적 형상’, 곧 정신(마음)에 기록되는 형상(상)이고, 따라서 想에 해당한다. 이미지는 지각된 것을 언어에 의해 마음에 형상화, 이미지화한 것이다.
따라서 지각-이미지(시론)에서 말하는 지각은 감각적 수용, 곧 감각에 해당하고, 이미지는 마음에 떠오르는 형상으로 지각과 이미지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이미지(受)-지각(想)에서 말하는 지각은 이미지에 언어가 개입되어 생각으로 나가고, 따라서 이미지와 지각이 분리된다. 쉽게 생각하자. ‘시린 겨울 하늘’(시적 이미지)은 겨울 하늘을 보고(지각) ‘시리다’는 느낌을 구체화하고 이미지로 만든다. (촉각적 이미지). 그러므로 지각과 이미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나는 ‘플라스틱 의자’를 보고, 어떤 느낌을 갖고(이미지), 다음 ‘저건 플라스틱 의자야’라고 생각한다.(지각) 그런 점에서 이미지와 지각아 분리된다.
시적 이미지는 受와 想이 분리되지 않고, 불교의 경우에는 분리되고, 혹은 시적 이미지는 受에 포함되고, 불교는 이런 이미지(受)를 언어로 의식화한다.(想) 물론 시론의 경우 시적 이미지는 감각(수)과 지각(상)을 직접 반영하는 경우와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기억, 상상력, 환상을 매개로 하는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홍정식 교수가 受(감각)를 印象작용, 想(지각)을 表象작용으로 해석한 것은 도움이 된다. 감각과 지각이라는 용어가 혼란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인상과 표상 혹은 形象이라는 용어를 쓰면 용어 상의 혼란이 덜 하기 때문이다. 인상은 외계의 자극이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 육체에 찍히는 것, 곧 감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고, 표상은 이렇게 수용된 것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뜻이고, 형상은 상(이미지)을 만든다는 뜻이다.
다시 회상하자. 나는 편의점 앞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보고(受), ‘저기 파란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있군’하며 그 형상을 마음 속에 떠올린다.(想) 의자를 보는 것은 외계의 자극이 육체(눈)에 영형을 주는 것(인상)이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인상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표상)이고, 이미지는 인상을 형상화하는 것(형상)이다.
다음은 行이다. 행은 간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 행은 육체적 움직임이 아니라 정신, 마음의 움직임을 뜻하고, 그런 점에서 행은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의지는 행동을 수반한다. 정신 작용을 강조하면 행은 의지, 추리, 기억, 상상의 세계가 되고, 이런 정신작용, 특히 의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김명우 교수는 이 행을 충동impulse로 번역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고, 충동은 그가 말하는 의지가 충동과 통한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주관적 인식의 틀, 곧 시간, 공간, 인과율 등의 형식에 의해 구성된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세계는 주관의 표상이다. 그러나 칸트가 세계의 본질인 物 자체를 인식할 없다고 주장함에 반해 그는 이 세계의 내적 본질, 곧 물 자체를 의지로 간주하고, 따라서 세계는 의지의 개별화이고, 의지의 표상이 된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 곧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삶에의 의지이다. 따라서 세계는 이런 의지, 충동, 맹목적 힘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행은 의지의 세계이고, 의지는 맹목적인 힘이기 때문에 충동과 결합된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이 세계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에 의하며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의지, 욕구, 충동을 끊어야 하고, 행복은 의지가 부정되고 현상 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열반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의 부정적 허무주의는 불교와 만난다. 이런 문제, 곧 행과 불교의 관계는 뒤에 가서 다시 살필 예정이다. 한편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은 니체에 의해 긍정적 니힐리즘으로 발전적으로 계승된다.
이런 논리, 곧 세계가 의지의 표상이라는 논리에 의하면 무엇을 기억하고, 추리하고, 상상하는 것도 의지, 충동의 산물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세계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세계를 세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객체로 표상되는 이른바 세계像이다.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표상(이미지)이 되고, 이런 표상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산물과 통한다.
그러나 의지는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行은 의지, 충동이라는 정신작용과 동시에 육체적 운동, 움직임을 뜻한다. 그러니까 ‘저기 의자가 있군’ 생각하고 (상), ‘의자를 향해 간다’.(행) 이유는 무엇인가? 앉고 싶기 때문이다.(의지) 너무 오래 걸어 피로하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쉬고 싶은 건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떠오르고, 이런 충동(의지)에 의해 나는 움직인다.(행동) 이런 의지와 행동은 모두 쓰러지지 않고 살려는 노력을 암시한다.
3. 아는 만큼 보인다
마지막으로 識이다. 식은 受에 의해 수용된 대상을 대상으로 분병하게 판별하는 것, 말하자면 意識하는 것. 영어로는 의식consciousness에 해당한다. 의식은 나/너, 주체/객체를 나누어 판별하고 대립적으로 인식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대상은 주체와 대립되는 객체로 인식된다. 그러나 식이 수상행식의 마지막에 온다는 것을 강조하면 식은 수(감각, 느낌)-상(표상)-행(의지, 행동)을 스스로 주체가 되어 판단하고 종합해서 아는 행위가 된다. 대상(수)에만 한정하면 의자는 나와 대립되는 사물로 인식되고, 따라서 나는 주체가 되어 의자를 하나의 객체로 인식한다. 따라서 나(주체)와 의자(객체) 사이엔 거리가 유지되고, 둘은 대립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식은 수-상-행 전체를 인식하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식에 의해 나는 대상을 보고 대상을 생각하고 대상을 향해 가는 행위를 인식한다.
그러나 ‘대상론’에서도 말했듯이 불교에선 식, 의식 두 가지 용어가 사용된다. 식은 오온에 나오고 의식은 六識, 곧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한다. 세계는 육근-육경-육식의 화합으로 18계가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외부와 만나는 자아의 토대인 육근과 그 대상인 육경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이 12처에 인식을 담당하는 육식이 결합되어 존재한다.의자의 경우 눈으로 의자를 보고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눈과 의자만 있다면 우리는 의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식이 개입되어야 그것이 의자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눈(안근)-의자(색경)-마음(안식) 세 요소가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식이 없다면 대상을 볼 수 없고, 식의 범위만큼 대상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의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의자를 본다. 의자가 무엇인지 모르면 의자가 안 보인다. 책상, 의자, 벽이 있는 경우 책상, 의자, 벽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세 대상을 보는 것이지, 세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책을 읽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영어책을 읽는 경우 낱말의 뜻, 문장 구조를 모르면 읽을 수 없고, 아는 만큼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경우도 내가 아는 사람만 보이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식은 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안식이다. 눈이 안다는 말이다. 머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눈이 안다. 눈(안근)은 의자(색경)를 보고 의자를 안다.(안식) 어떻게 머리가 아니라 눈이 아는가? 아니 어떻게 눈, 귀, 코, 혀, 몸이 알고 이렇게 아는 것을 아는가? 어떻게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가능하고 이런 식을 아는 의식이 가능한가?
의식은 육식의 마지막에 해당하고, 따라서 안이비설신 다섯 가지 식을 종합해서 아는 것을 뜻하고, 육근과 관련하면 육근의 마지막 의근에 대응한다. 의근은 다섯 가지 감각기능을 종합하는 몸의 기능이고, 의식은 이에 대응하는 마음의 기능이다. 유식론에서는 이 여섯째 식(6식)에 해당하는 의식 외에 말나식(7식), 아뢰야식(8식)에 대해 말한다. 의식(6식)은 의근에 의지해 모든 현상을 인식하고 추리하는 마음이고, 말나식(7식)은 자아를 분별하고, 따라서 자아/타자의 분별이 나타나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이고, 아뢰야식(8식)은 모든 현상이 전개되는 근본 마음이다. 그러니까 유식론의 경우 의식은 말나식의 산물이다. 주체 혹은 자아가 먼저 성립하고(말나식) 그후 자아가 대상을 분별하고 판별하고 인식한다.(의식)
그런 점에서 전의식(안이비설신), 이른바 전5식은 의식(6식)의 산물이고, 의식은 말나식(7식)의 산물이고, 말나식은 아뢰야식(8식)의 산물이다. 아뢰야식
은 모든 현상이 전개되는 근본 마음, 모든 현상을 전재하고 생기하는 종자이다. 유식론이 강조하는 것은 唯識無境, 곧 마음이 있을 뿐 대상의 세계는 없다는 주장이다. 아뢰야식은 마음의 뿌리에 해당하고, 이 뿌리, 혹은 종자는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에 가깝고, 이 종자가 자아를 분별하고,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말나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런 자아/타자의 분별을 토대로 현상을 인식하고 추리하는 마음(의식)이 전개된다. 그러니까 의식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이성적 능력도 아니고, 교육을 통해 획득되는 이성적 능력도 아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된 마음의 종자를 근원으로 하는 인식 능력이다. 그런 능력이 있으므로 눈도 알고 귀도 안다.
그러나 반야 사상의 경우 의식 작용, 곧 식은 어디까지나 색수상행식 오온의 마지막에 해당하고, 의근-의경-의식 세 요소 가운데 하나다. 내가 유식론을 참고한 것은 의식이 안이비설신 5식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눈, 귀, 코, 혀, 몸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나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다. 쉽게 말하면 이런 5식은 육감sense이나 직관에 가깝고 의식은 consciousness에 가깝다.
이제까지 자아를 구성하는 오온, 곧 몸(색)과 마음(수상행식)에 대해 말한 것은 ‘자아는 없다’는 명제를 선불교의 시각에서 해석하기 위해서다. 다시 생각하자. 과연 자아는 존재하는가? 먼저 몸(색)의 경우 몸의 고정된 실체는 없고, 이른바 4대의 인연 화합에 지나지 않고, 또 시간적으로 계속 변한다. 이런 몸이 마음과 만나기 때문에 마음 역시 실체가 없다. 수(감각, 느낌)-상(표상)-행(의지, 행동)-식(의식) 모두가 허망한 작용일 뿐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은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의 마음은 이미 갔기 때문에 없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현재의 마음 역시 없다. 그러므로 없는 마음, 곧 무심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이 무심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서나 작용한다. 내가 걷는 것, 밥 먹는 것 모두 이런 마음의 작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무심이 번뇌 망상을 벗어날 때 드러나는 청정심이고 불성이다.
4. 자아는 공이다
그러므로 선이 강조하는 것은 허망한 망념을 버리고 眞心 혹은 자성 청정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수행 혹은 마음 닦기가 노리는 것이 그렇고 깨달음의 세계가 그렇다. 보되 봄이 없고, 느끼되 느낌이 없고, 헛된 상, 이미지를 버려야 하고, 움직이되 움직임이 없고, 무엇보다 무엇을 하려는 의지를 버려야 하고, 이렇게 수-상-행을 버릴 때 마침내 의식도 소멸한다. 따라서 의자를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고, 파란 의자라는 이미지도 없고, 그 의자를 향한 의지도 없고, 그러므로 의자에 앉아도 앉아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른바 무념 무상 무주이다. 그렇다면 몸은? 이런 수-상-행-식의 마음 작용이 없으므로 몸 역시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중도, 불이다.
번뇌 망상은 육근이 육경과 만나고 거기 육식이 개입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육식은 마음의 작용이고, 이 마음의 작용이 망상이므로 망상에서 벗어날 때 이 마음은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 마음이고, 고요한 마음이고, 이것이 자성 청정심이고 불성이다. 깨달음은 비로 이것, 곧 본래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자아를 깨치고 다시 태어남이다. 아니 다시 태어남이 아니라 본래 지니고 있던 불성, 청정심을 드러내면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분별을 버리라는 말은 수-상-행-식에서 벗어나라는 말이고, 그때 만물은 평등하고 고요하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 이런 뜻이다. 텅 빈 맑은 거울(청정심)은 분별하지 않고 오는 것을 모두 비치지만 이런 대상(이미지)들에 대한 집착이 없다.
한편 맑은 거울에 나타나는 대상들은 움직이고 변하고 소멸하지만 거울은 그대로 있다. 이런 거울 속 이미지들은 꿈 속의 풍경과 같다. 꿈 속에서 나는 괴롭고 기쁘고 누구와 싸우고 쫓긴다. 그러나 꿈을 깨면 아무 일도 없다. 사는 건 꿈과 같다. 그렇게 허망하고 속절없고 뿌리가 없고 고유한 실체가 없고 본질이 없고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는 거울에 비치는 영상, 이미지, 헛것, 환상이고 허깨비와 같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일체 현상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라. 一切有爲法 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인연으로 생겨서 나타나고 변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다. 이 꿈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수-상-행-식을 버리고 참 마음, 참 나를 만나고, 이때 몸(색)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몸(색)이 이렇듯이 마음(수상행식) 역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요컨대 자아를 구성하는 몸(색)과 마음(수상행식) 모두 색즉시공이지만 공은 색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공즉시색이다.
그러니까 자아가 공이라는 말은 나의 몸과 마음에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공) 이 공이 또한 나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색에서 공을 읽고 거꾸로 공에서 색을 읽어야 한다. 색에서 공을 읽는 것은 자아가 인연의 화합이고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것.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자아에는 변하는 것도 없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고, 시작과 끝도 없다. 그러나 이런 공의 세계는 다시 색의 세계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아는, 지금 여기 있는 나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계속 변하고 움직인다.
과연 움직이는가? 모든 현상은 본래 고요하고 평등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오고 감, 나고 죽음, 생과 사가 없다. 아니 오고 감이 있기 때문에, 오면 가고 가면 오기 때문에 오고 감이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그렇다. 아뇩다라(無上)의 진리는 이 세상엔 높은 것이 없기 때문에 낮은 것도 없다는 진리이고, 삼먁(正等)의 진리는 모두 같다는 진리이고, 삼보리(正覺)는 바른 깨달음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음으로 오고 감이 없고, 한편 ‘나’의 입장에선 ‘너’가 오지만 ‘너’의 입장에선 ‘나’가 간다. 온다는 것은 무엇이고,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반야 사상이 강조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색은 대승 불교의 진리론에 의하면 속제俗諦에 속하고 공은 진제眞諦에 속한다. 속제는 언어나 사유로 구성된 진리, 진제는 언어나 개념으로 구성되기 전의 진리를 뜻한다. 그러나 화엄 사상에 의하면 존재 혹은 현상은 변계소집성(공)-의타기성(가유)-원성실성(진공묘유)로 드러난다. 변계소집성은 모든 현상이 공이라는 것, 의타기성은 이런 공의 세계가 인연 따라 존재한다는 것, 원성실성은 공과 假有가 중도의 관계로 드러난다는 것. 그러므로 진공묘유는 공도 아니고 가유도 아닌비공비무의 중도를 암시한다.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공묘유
공 가유 (세 요소는 삼각형으로 표시)
색에서 공을 읽고 공에서 색을 읽는다는 것,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표면적으로는 색과 공 두 요소를 강조하기 때문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 색은 속제, 공은 진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반야 사상이 강조하는 것은 이 두 요소의 중도, 불이 관계이다. 화엄 사상은 이런 중도, 불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선종이 화엄종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공-가유-진공의 논리는 이질적인 논리가 아니다. 이런 문맥에서 ‘자아는 공이다’는 명제를 다시 해석하면 자아는 자성이 없는 공이다. 그러나 이런 공으로서의 자아는, 나는, 우리는 인연 따라 여기 한국에 임시 존재하는 假有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는 공과 가유의 중도로 드러나고, 따라서 妙有이고 이렇게 공도 아니고 가유도 아닌 묘유가 참된 공, 진공이다. 공과 색의 논리로 말하면 공과 색의 중도가 묘유에 해당한다.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중도
공 색 (세 요소 삼각형 표시)
한편 대승 불교의 한 파인 천태종은 이런 진리 이론을 변형시켜 이른바 3諦 개념을 강조한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고 정과 혜의 조화를 지향하고 諸法實相論을 주장한다. 내가 천태 사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런 실상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천태종이 강조하는 세 가지 진리 개념도 크게 보면 화엄 사상이 강조하는 공-가유-진공묘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천태종은 전통적인 진리 이론, 곧 속제와 진제 개념을 변형시켜 이른바 3諦 개념, 곧 空諦, 假諦, 中道第一義諦를 주장한다. 공제는 언어나 사유가 없는 진리, 가제는 언어나 사유에 의해 임시로 설비된 假設로서의 진리, 중도제일의제는 이런 空과 假를 초월하여 모든 현상의 실상을 드러낸 진리이다. 천태종은 3觀 수행에 의해 3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한다. 화엄 사상이 강조하는 공-가유-진공묘유나 천태 사상이 강조하는 공-가-진공묘유나 크게 보면 비슷한 논리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반야 사상이 강조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공-색-중도의 체계로 읽을 때 이해가 쉽다는 입장이고, 이런 체계는 화엄 사상과 천태 사상을 차용하고 거기 의존한다. 따라서 선종과 화엄 혹은 천태 사상의 회통을 지향한다. 문제는 다시 ‘자아는 공이다’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오온이 공이고, 따라서 자아를 구성하는 몸(색)과 마음(수상행식)이 공이고, 둘의 관계 역시 공이라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모든 현상이 공이므로 오온도 없고, 육근 육경 육식도 없다.
요컨대 자아가 없다는 말은 말 그대로 없음이 아니라 색즉시공 공증시색이라는 뜻. 쉽게 말하면 현상 자체에는 실체가 없고(공), 실체가 없는 것이 눈에 보인다(색)는 뜻이다. 색에서 공을 읽는 것이 큰 반야(지혜)라면 공으로 색을 읽는 것은 자비이다. 나는 이런 관계를 공-가-중도의 논리로 읽은 셈이다. 지금 여기 앉아 글을 쓰는 나는 실체가 없는 공이고, 이 공이 눈에 보이므로 색이지만 이 색은 假有이고 가짜, 환상, 꿈과 같다. 그러므로 공도 아니고 가유도 아닌, 공과 색을 초월하는 중도의 존재가 진정한 나이다.
卽非의 논리에 의하면 중도는 空卽非空 色卽非色이다. 공은 공이면서 공이 아니고, 색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일체 분별을 초월하는 이런 자아가 眞我이고 이런 참 자아의 마음이 眞心이다. 진심이 보리, 깨달음이고(반야경), 법계이고(화엄경), 여래이고(금강경), 열반이고(반야경), 여여이고, 법신이고, 진여이고(기신론), 불성이고(열반경), 여래장이고(승만경), 원각이고 자성 청정심이고 평상심이다.
그러므로 참된 자아는 오온을 중심으로 하면 몸(색)과 마음(수상행식)의 관계에서 먼저 마음을 버릴 때 드러난다. 감각, 느낌, 지각, 의지, 의식을 버려야 한다. 말하자면 눈으로 소리를 듣고(觀音). 귀로 사물을 보아야 한다. 보되 보는 것이 없고 듣되 듣는 것이 없어야 한다. 눈이 뚫리고 귀가 뚫린다는 말이 그렇다. 수상행식은 망념이고 먼지이고 이 망념 먼지가 사라질 때 진심, 청정심, 맑은 거울이 된다. 한편 육근-육경-육식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육식을 버려야 하고, 이때 자아(육근)는 그저 있을 뿐이고, 대상(육경)도 그저 있을 뿐이다. 그저 있는 자아는 분별, 의식, 사량이 없기 때문에 자아와 대상, 주체와 객체, 나와 우주의 경계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지이다.
■ 평론 부문 수상소감
불교와의 인연이 고마울 뿐이다
현대불교문학상을 받게 되어 기쁘다. 추운 겨울이 계속된다. 어제도 춥고 오늘도 춥고 내일도 추울 것이다. 추운 지상에서 글 한 줄 쓰며 살아온 소생에게 이 상은 따뜻한 햇볕과 같다. 불교와의 인연은 1990년대 초 지리산 입구 칠불암에서 우연히 만난 ‘금강경’이 동기가 된다. 늦은 법연法緣이다. 그동안 자아를 찾아 헤매던 나에게 ‘아상을 버려라’ 하시던 부처님 말씀은 충격이었다. 하얀 벚꽃이 핀 봄날이었다.
그 후 부처님 말씀은 내 사유를 지배하고 시쓰기와 시론에도 보이지 않게 스며든다. 졸서 ‘영도의 시쓰기’는 이런 사유를 토대로 자아도 없고 대상도 없고 마침내 언어도 없는, 그러니까 쓰는 행위만 남은 시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영도의 사유는 사유의 영도다. 과연 무엇이 있는가? 결국 50년 시 인생은 영도와 만난다. 내가 어디 있고 대상이 어디 있고 언어가 어디 있는가? 모두가 상相일 뿐이다.
‘불교문예’ 편집부로부터 수상소식과 함께 평론 한 편과 약력을 먼저 보내고 수상소감은 좀 늦어도 된다는 말씀을 듣고, 평론 한 편을 고르고 약력을 쓰고, 내친 김에 수상소감을 쓴다. 좀 늦게 써도 되지만 이렇게 서둘러 소감을 쓰는 건 강박증 때문이다. 이 놈의 강박증이 문제다. 그러나 어쩌랴. 이젠 이런 병도 친구라고 생각하며 산다.
오늘도 난 할 말이 없고, 제대로 보이는 게 없고, 말하자면 인생이 없고, 내가 없고, 사상도 없다. 이게 내 사상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난 아는 것도 별로 없다. 언제 미칠지 모르는 불안과 강박증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그동안 글을 썼지만 이젠 모두가 친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학은 안에 사막을 간직한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이 쓸쓸한 길 위에서 좋은 일 한번 한 적이 없는 사람이 큰 상을 받아 부끄러울 뿐이다.
끝으로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온 곳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르는 떠돌이 시인, 자폐증에 시달리는 늙은 교수를 불자로 받아주신 설악무산 큰스님께 감사드린다.
이승훈李昇薰/ 아호 이강怡江, 법호 방장方丈. 1963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사물A』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비누』 『이것은 시가 아니다』 『화두』 『이승훈시전집』 등, 시론집 『시론』 『모더니즘시론』 『포스트모더니즘시론』 『한국모더니즘시사』 『한국현대시론사』 『정신분석시론』 『선과 기호학』 『선과 하이데거』 『영도의 시쓰기』 등 70권 펴냄.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 평론 부문 심사평/ 최동호
나를 찾는 불이의 사유와 비평적 전환
-이승훈의 비평적 성과에 대하여
최동호
1942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한 이승훈은 1963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초기부터 시창작만이 아니라 비평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와 비평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문인이 되었다. 그의 비평은 대체로 그 자신의 시를 옹호하고 개진하기 위해 시도되었으며 시 쓰기와 비평의 동일시가 잘 허용되지 않는 우리 문단에서 그는 예외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그는 이상의 해체시 계열의 비평을 이어받아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을 발전시켰으며 자신의 비대상의 시론을 독자적으로 구축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대변자가 되었다.
자아-대상-언어로 구축된 그의 비평적 인식의 틀은 1990년을 넘어서면서 커다란 전환의 계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그가 금강경을 읽고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자아부정의 세계를 접했기 때문인데 자아가 없다는 부정의 명제에 접하기 전 그의 비평은 자아를 찾기 위한 명제로서 자아를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적 전환은 크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비평은 금강경을 통해 결정적으로 전환하여 그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자아-대상-언어 모두가 소멸한 다음의 시쓰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번에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비평집 『영도의 시쓰기』(푸른 사상,2012)는 자아-대상-언어 모두가 소멸한 상황 하에서 시쓰기만 존재하는 행위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목표도 의도도 대상도 없는 시쓰기’는 영도의 사유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부정된 상황에서 행위만 존재하는 사유이다. 이승훈은 그것을 ‘영도의 시쓰기’라고 명명했다. 서구적 지성과 발상을 부정하고 불교의 선적 사유를 수용한 그의 비평은 오롯이 불교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동서의 차이를 넘어서는 비평적 노력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자아와 대상의 구분에서 차별성을 버리고 불이의 시학에 도달한 그의 비평은 종전에 김춘수가 언어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전개한 무의미시론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며 매우 이채로운 성과라고 할 것이다.
심사위원회는 비평가로서 2013년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이 그 자신의 비평적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물론 우리 문학의 확대와 심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승훈 선생의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더욱 커다란 시인이자 비평가로 성장하여 우리 문단의 미래를 빛나게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