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원작이 영화만 못하다는 말들을 한다. 영화 <웨이 백>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정된 시공간에 원작을 제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웨이 백>처럼 방대한 대자연을 무대로 한 영화는 더욱이.
작년 봄이었던가 싶다. <얼어붙은 눈물>을 읽고 오늘날의 우리 산악인들이 너무 편하게 산에 다니는 건 아니냐는 투의 말을 이곳 게시판에 올렸었는데, 그 후 몇몇 지인들도 이 책을 구해 읽었다고 한다. 그들 중엔 용이도 있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상황에 늘 궁금해 했었던 그였기에 8천 미터 봉 등반은, 그것도 칠십 여 년 전에 행한 주인공들의 활약에 비하면 세발의 피 정도 되지 않을까, 라고 한 내 말에 그가 혹했던 것 같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너무 나약하게 살아가는 건 아닐까, 라며 그는 내 글에 토까지 달았었다.
우리민족에게도 비극을 안겨준, 인류역사상 가장 이상적이고 순수하게 여겨졌었지만 가장 그릇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공산주의란 이념에 희생된 폴란드인 주인공의 활약상은 너무나 가혹하고 처절했으며 방대하고 장구하며 장엄해서 영화라는 한 장르에 담기에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안락의자에 앉아 보는 영상미는 편안하게 보기 미안할 정도로 쉽게 대할 수 없는 명장면들이다. 시베리아의 혹한과 고비사막의 혹서, 히말라야의 설산 풍경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좋은 뜻으로 창안한 이념일지언정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상의 오류를 생각하면 우리들 인간이 너무 이기적이고 나약하며 욕심이 많은 게 아닐까 싶다. 이 또한 생존본능의 일환이라 변명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이념을 그럴듯하게 내세워 집단을 장악해 부귀영화를 누린 사악한 무리들 외에도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고 본다. 제아무리 첨단과학문명의 이기를 누린다고 하지만 대자연 앞에선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모래성 위에서 아옹다옹하며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에서 희망이 엿보이는 건, 극한의 고통스런 탈출여정에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발휘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대자연에서 행해지는 아름다운 인류애의 전형이라면 과장일까. 아쉬운 건 대자연을 무대로 한 이런 영화에 관객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시내에 단 한군데 상영한 작은 상영관에서도 겨우 네다섯 명과 함께 관람했다. 좀 더 많은 이들이, 그릇된 이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한 인간의지를, 대자연의 역경을 이겨내는 인간승리의 장면을 접했으면 한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작년에 읽은 <얼어붙은 눈물>이 <웨이 백>이란 책으로 재출판 되었다. 영화 덕분이다. 책이든 영화든 하나만이라도 보길 권한다.
2010.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