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뜨랑 아카데미에서 보낸 2009년

[Vincent]

그가 예뜨랑 아카데미에 찾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 계획하신 일이시겠지.

그를 나와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내 평생을 통해 알아갈 일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겸양과 비범함을 갖춘 청년이었다. 아는 것은 참 많았지만 다른사람 앞에서 아는 체 하는 법이 없었다. 마침 내가 한겨레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한겨레 신문 좋아하나요?" 한참 어린 나에게도 절대 초면에 말을 놓지 않았다.

"네, 좋아해요. 사실 신문은 대부분 다 좋아하는데 여기는 한겨레와 국민일보 밖에 없어서 주로 한겨레를 읽어요. 국민일보는 너무 보수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그에 반해 한겨레는 세상을 똑바로 보여주잖아요."

"국민일보가 보수적인건 사실이지만 한겨레는 너무 진보적이죠. 어떤 신문이든 각자의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신문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그가 정치적 중립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은 반듯한 사람이었다.

    얼마 후 그는 우리와 함께 예뜨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말이 '함께'지, 사실 그는 대부분 '혼자' 공부했다. 참 열심히 그리고 많이 했다. 불교, 히브리어, 영어, 철학, 사학 모두 그가 즐겨하던 과목들이다. 처음 별로 친하지 않았을 때는 도데체 저런 공부가 왜 하고 싶은 걸까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듣기로는 저 분이 전남대 영어교육과를 다니다가 휴학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영어공부를 해야하지 않나?' 하루는 궁금하다 못해 그의 꿈을 물었다. 당연히 기대하던 대답은 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영어학 교수, 조금 덜 낸다면 학원 영어강사 정도.

"형,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세요?"

"저는 사학과나 종교학과 교수가 되고 싶어요."

"그럼 왜 영어교육과 가셨어요?"

"영어도 배우고 싶어서요."

"그럼 히브리어랑 불교랑 철학은 왜 공부하시는 거에요?"

"다 배우고 싶어서요."

그 때 알았다. 이 사람은 나처럼 공부를 해야되서 하는 사람이 아닌 공부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는 모든 공부가 이미 학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는 곧잘 모든 학문을 다 섭렵하고 싶다고 말하고는 했다. 특히 그는 히브리어 공부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을 꼭 다 읽고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가 예뜨랑에서 공부한 지 3~4개월이 흐른 후 예뜨랑 아카데미에 새로운 남자 기숙사가 지어졌고 그와 나는 한방을 썼다. 그 때부터 우리는 더 깊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대화를 하다가 새벽 한, 두시를 넘기는 일이 허다해서 우리는 말을 좀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그 다짐을 실행하지 못했다. 모든 대화의 발단은 매일 기숙사에서 저녁 10시 40분에 하는 기도회였다. 기도회에서 우리는 찬송도 많이 부르고 기도제목도 많이 나누고 기도도 많이 했다. 놀랍게도 그는 찬송가 장수를 대부분 다 외우고 있었다. 내가 부르고 싶은 찬송을 가사도 모른채 음만 흥얼거릴 때면 그는 "아, 489장 부르고 싶구나."하고 찬송가를 폈다. 덕분에 나도 찬송가를 많이 외우게 됐다. 나와 다른 학생들이 기도제목을 나눌 때면 위로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교회와 가족을 위해서 많이 기도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대목은 어떻게 사랑의 언약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다. 아버지의 40일 금식기도, 성도님들의 헌신, 어머니의 건강. 그는 결코 이 기도제목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 형은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있는데 형의 뛰어난 음악성을 은근히 질투하면서도 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때면 나는 그에게 "형, 형은 꼭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이 될 것 같은데요."하고 말하고는 했다.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님이나 선교사님 보다는 학자로 써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명예전도사님이 된 그를 보니 내 예상이 적중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와 이성친구에 대해서 나눴던 대화를 몇마디 적고 싶다. 그는 굉장히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지만 내가 묻는 세상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답해주었다.

"형, 여자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어떤거에요?"

"예뜨랑을 그만둬야 한다는 거겠지?"

"아이 참, 그런 거 말고 진짜로 여자친구를 사귀면 어때요?"

"일단은 돈이 참 많이 들어. 그리고 시간도 많이 뺐기지. 잡생각도 많아지지."

"그럼 왜 사귀는 거에요. 다 안좋은 것 투성인데."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래도 자꾸만 그 사람이 보고싶다는 거야. 돈도, 시간도 생각도 많이 들지만 그 사람이랑 만나면 좋고 안만나면 보고싶어. 그냥 그래."

"형은 여자친구 있어요?"

"있었지. 지금은 아니고."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예뻤어요?"

"같은과 후배였어. 얼굴도 정말 예뻤지. 많이 싸우기도 했는데 날 참 잘 챙겨줬어. 내 말도 참 잘듣고."

"그럼 왜 헤어졌어요?"

"하나님을 안믿었거든. 부모님도 믿음없는 사람은 싫어하셨고. 내가 전도하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 한 일년간 사귀었는데 그래도 참 즐거웠어."

"지금은 뭐하면서 산데요?"

"학교선생님이 됐데. 내가 군대간 사이에 임용고시 합격했다고 하더라. 성격이 좋아서 학생들이 좋아할꺼야."

그는 자신이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굉장히 좋아했지만 목사님 자녀가 믿지않는 사람과 연애한다는 사실이 부모님께 해가 될까봐 걱정했었다. 여자친구를 사귈 때 무엇을 보냐는 내 짓궂은 질문에 얼굴이 예쁘면 좋다고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이성적인 사람도 사랑을 할 때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히브리어 성경을 안되는 발음으로 열심히 나에게 읽어주던 모습, 색소폰을 불던 모습, 기타와 피아노를 치던 모습, 기도하던 모습 모두 내 머릿 속과 가슴 속에 가득하지만 이제는 그를 보내주어야 겠다. 하나님 품에 안겨있는 그의 모습만 고이 간직해야 겠다.

[Vincent]

가끔씩 지훈형과 예뜨랑에서 보냈던 생활들을 올리려고 합니다.
오늘 따라 형이 보고싶네요.

[마라나타]

예뜨랑에 가는 걸 참 좋아했는데...이렇게 좋은 글 올려줘서 고마워요...

[Vincent]

지훈이 형은 참 복 받은 사람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을 보고 싶어하는 걸 보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