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19일 서울 충정로 구세군아트홀에 몰려든 시민들이 안철수 대선 출마 선언 행사장 밖에서 TV를 통해 안 원장의 대선 출마 선언을 지켜보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
이날 부산 시내 곳곳에서 TV를 통해 안 원장의 출마 선언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소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해운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장모(40·여)씨는 “지금까진 (안철수 후보가) 하도 이랬다 저랬다 카이까 지켜보는 입장에서 속이 답답하디만 막상 나오니깐 좋네예”라고 말했다. 지난 5월 안 원장이 강연을 하기 위해 들렀던 금정구 장전동의 부산대학교에서 만난 이 대학 학생 정모(24)씨는 “기성 정치인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며 “지난번 강연에서도 느꼈지만 안철수 후보야말로 대통령 후보로 가장 적절한 사람”이라고 했다.
12월 19일 대선의 최대 변수로 떠오른 부산과 경남(PK)이 술렁이고 있다. 주간조선 취재팀이 안철수 원장이 출마 선언을 한 9월 19일과 하루 전인 18일 이틀간 부산민심을 현지에서 집중 취재한 결과, 부산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안심할 ‘안방’이 더 이상 아니었다. 부산 시민들의 관심과 화제는 ‘부산 출신’인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에 쏠려 있었다. 특히 안철수 후보가 출마 선언을 하면서 부산 시민들은 두 ‘부산의 아들’의 단일화 여부에 관심을 쏟으며, 사상 처음 대통령 선거에서 두 명의 부산 출신 후보가 나온 것을 화제에 올렸다. 문재인 후보는 경남 거제 출생으로 경남고를 졸업했고, 안철수 후보는 부산 출생으로 부산고를 졸업했다.
주간조선이 이틀간 100명의 부산 시민을 거리에서 만나, 야권 후보 단일화 성사 여부와 야권 단일후보 지지 의사를 물어본 결과, 82명이 ‘문재인과 안철수 간 후보 단일화가 성사될 것’이라고 전망했고, 단일화가 이뤄질 경우 ‘단일후보를 찍겠다’는 사람도 54명이나 됐다.
부산 시민들을 만나본 결과 야권의 두 후보인 문재인, 안철수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를 시내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대다수 시민이 문 후보와 안 후보가 각각 부산의 경남고와 부산고를 나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직야구장에 여자친구와 야구를 보러 왔다는 직장인 강모(32)씨는 “안철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죠. 정치를 안 해봤다 해도 단일화 후보로도 역시 문재인보다는 안철수가 낫다고 생각합니더”라고 말했다. 부산역 앞 떡가게 안쪽에서 쭈그리고 앉아 신문의 정치면을 읽고 있던 4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어차피 정치는 참모들이 하는 거고, 대통령 될 사람은 문재인씨처럼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심이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더”라고 했다. 부산대생 정모(24)씨는 안철수 후보가 정치 경험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며 그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정치에 몸담아 왔던 역대 대통령들의 지난 과오를 보고도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야권 단일후보로 누가 됐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의견도 팽팽했다. 부산교대 앞에서 만난 양모(21·여)씨에게 “누가 단일화 후보가 될 것 같나”고 묻자 “문재인 후보가 될 것 같다”면서도 “그래도 안철수씨가 단일후보가 되기를 바란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체로 부산 시민들은 “문재인의 정치적 기반이 더 탄탄하다” “문재인이 안철수보다는 권력의지가 강해 보인다” 등의 이유로 문 후보가 단일후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안철수가 정치적 역량은 더 뛰어날 것 같다”는 이유로 단일후보로 안 후보를 지지하는 성향을 나타냈다. 실제 부산 시민 100명에게 “단일화가 이루어진다면 누가 후보가 될 것 같나” 묻자 36명이 문재인을, 28명이 안철수를 꼽았다. 하지만 “누가 단일후보로 선출됐으면 하는가”에 대해서는 문 후보(22명)보다는 안 후보(31명)를 지지한다는 시민이 더 많았다.
부산 시민들이 야권 후보에게 더 지지를 보내는 배경에는 불황과 동남권 신공항 논란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지난 9월 18일 서면시장에서 만난 상인 김모(70·여)씨는 “지금까지의 대선에선 항상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을 지지해왔지만 이번에는 다른 결정을 내릴 것”이라며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큽니더”라고 했다. 서면시장에서 커피장사를 하는 김씨는 “뭐 만날 나와서 경제, 경제 하는데 오히려 물가만 오르고 장사는 더 힘들어졌어예”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산시청에서 만난 공무원 임모(55)씨는 “원래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는데 가덕도 신공항 백지화 이후 다시 PK지역에 공항을 지어주겠다는 얘기를 일절 안 하대예. 만날 말 바꾸기만 하는 여당을 더 이상 어떻게 믿어주겠습니꺼”라며 박근혜 후보를 비판했다.
부산의 한 대학교수 이모(49)씨는 “이번 선거는 5% 싸움 선거라고도 하는데 박근혜가 잘못해서 공항이 밀양으로 간다면 부산사람 다 돌아선다”며 “그러면 누가 이기겠는가”라고 말했다.
부산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황 체감도는 커 보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옛날 같지 않다”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실제 9월 18일 저녁 9시40분 부산의 가장 번화가라는 광복동을 둘러본 결과, 상당수 옷가게들이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닫고 있었다. 부산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신공항 부지의 부산 가덕도행마저 박 후보가 저버릴 경우 불만이 폭발할 듯 보였다. 박 후보와 새누리당은 부산이 주목하는 신공항 문제와 관련해 가덕도 대신 밀양행을 선호하는 TK(대구·경북)민심과 부산민심 사이에서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부산민심이 전부 야권 후보 지지로 쏠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틀간 만나본 60대 이상의 부산 시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박근혜 지지’를 강조했다. 지난 9월 18일 부산역에서 만난 박모(80)씨에게 지지 후보를 묻자 다짜고짜 박정희의 유신체제 옹호 발언이 쏟아졌다. “지지하는 후보예? 저는 유신체제를 겪었고 그때의 기억이 아련합니더. 요즘에 와서 ‘유신의 계승자’니 ‘독재자의 딸’이니 하면서 박근혜를 깎아내리는 민주당 놈들 보고 있으면 속이 답답해요. 잘못한 것도 있지요 물론. 하지만 잘한 건 생각 안 하고 허구한 날 욕만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박씨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취재 이틀 동안 만난 60세 이상 노인 20명 가운데 12명이 야권 단일후보보다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월 19일 해운대에서 만난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해운대길 중간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던 최모(72)씨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시국을 논하던 중 기자와 마주쳤다. 조심스레 다가가 대선과 관련된 질문을 건네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박근혜 찍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후보의 대선 출마 선언이 있은 직후라 야권 단일화 문제나 안 후보에 대한 개인적 소견에 대해서도 물어보려 했지만 “글마는 나이도 어린 기 정치를 하겠다고…” 하며 거부감을 표시했다. 다만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지금까지 숨어 있다가 이제 와서 실실 기어 나오는 기 될 일이가 그게”라며 안 후보에 대한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2월 대선에서 실제 PK민심이 야권 단일후보에게 절반 가까이 쏠린다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이다. 대통령 후보로 뽑힌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지역적으로는 수도권, 이념적으로는 중도성향의 유권자층을 향한 표의 확장성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박근혜 후보가 ‘안방’으로 여겨온 PK에서도 절반 가까이 표를 내준다면 사실 대선 승리를 기약하기 힘들다. PK 유권자 수는 박 후보의 또 다른 ‘안방’인 TK보다 훨씬 많다. 지난 2007년 대선의 경우 PK 유권자 수는 606만명으로 399만명인 TK보다 200만명 이상 많았다. PK 유권자 수는 호남 전체(402만명)나, 충청 전체(377만명) 유권자 수보다도 많다. 전체 유권자의 약 16%를 차지하는 PK의 민심 풍향이 역대 대선에서 결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역대 민주당 후보 득표율이 13~15%에 머물던 부산에서 30% 가까운 득표를 올리고 호남 표를 가져오면서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3대에서도 당시 김영삼 후보의 지지도가 절대적이었던 부산지역에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30%에 육박하는 표를 얻으면서 당선됐었다.
향후 PK의 대선민심과 관련해 부산대 행정학과 김용철 교수는 “선거가 아직 본격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여론만으로 향후 결과까지 예측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도 “지금까지는 부산지역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만큼 추석 이후의 민심은 반드시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야권에서 단일화가 이루어지면 PK지역에선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전망했다.
경남고와 부산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모교인 경남고와 부산고는 부산을 대표하는 양대 명문고였다. 문재인 후보는 1971년, 안철수 후보는 1980년 각각 경남고와 부산고를 졸업했다. 공립인 두 학교는 과거 비평준화 시절 명문대에 많은 합격생을 배출했다. 부산고 총동창회와 진학사에 따르면 75학번의 경우 서울대에 경남고는 167명, 부산고는 166명을 합격시켰다. 부산지역 마지막 비평준화 학번인 76학번의 경우 경남고는 157명, 부산고는 171명을 서울대에 보냈다. 1970년대 두 학교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전국 입시 순위 4~5위를 주고받았다. 참고로 1970년대 10대 명문고에는 이들 두 학교를 포함해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경북고, 경기여고, 광주일고, 전주고, 대전고 등이 포진돼 있었다. 경남고가 경남에 있지 않고 부산에 있는 이유는 광복 직후 부산이 광역자치단체가 아니었고 경남에 속해 있어서 경남도청 소재지가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두 학교는 기질이 상반된다. 경남고는 상대적으로 부산의 부잣집 아들들이 많이 갔다. 부산고는 경남의 서민층 자제들이 많이 갔다. 서울 소재 대학으로 비유하면 경남고는 연세대, 부산고는 고려대와 교풍이 비슷하다고들 얘기된다. 별명도 경남고는 ‘구덕상고’, 부산고는 ‘초량농고’였다. 사회 진출도 차이가 난다. 경남고는 사업가와 정치인이 많은 반면, 부산고는 공무원이 많은 편이다. 두 학교가 모두 야구 명문인 것도 공통점이다. 경남고와 부산고는 경북고 다음으로 전국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했다. 최동원, 이대호 등이 경남고 출신이다. 부산고는 1970년대 말에 양상문 등을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전국대회 예선전이 열리면 두 학교 학생들은 치열한 응원전을 벌였다. 두 학교는 공부나 야구에서 라이벌 의식이 강하지만 사이도 좋은 편이다. 대학에 진학해서 고등학교 학번이 같으면 서로 동기로 지내고 학번이 하나 이상 위면 선배로 대접하는 풍토가 강하다. 경남고는 정·관계 인맥이 화려하다. 경기고, 경북고와 더불어 3부 요인을 모두 배출해 이른바 ‘3관왕’에 오른 전국의 세 고등학교 중 하나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형오·박희태 전 국회의장, 양승태 현 대법원장이 3관왕의 주인공이다. 문재인 후보(25회)가 대통령이 되면 경남고는 대통령을 두 명 배출한 유일한 고등학교가 된다. 부산고는 아직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번에 안철수 후보(33회)가 그 아쉬움을 풀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