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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문제가 제일 심각한 일본의 65세 이상 노인은 현재 전체 인구의 22.1%. 1994년 노인 인구가 14%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사회'로 진입한 뒤, 2006년 초고령사회(20% 이상)가 됐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기록을 조만간 한국이 갈아치우게 된다. 우리의 노인인구는 올해 처음 500만명을 돌파했다. 인구 10명당 1명이 노인인 셈이다. 우리는 10년 후인 2018년 '고령사회', 2026년 '초(超)고령사회'에 진입한다. 고령사회, 초고령사회에 도달하는 기간이 일본은 각각 24년·12년이었던 데 비해, 우리는 불과 18년·8년 만에 달성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는 엄청난 속도다.
노인인구 증가는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양적·질적 변화를 촉발시키고 있다. 이미 경비와 청소, 식당, 택배 등 사회 기초분야에서 이들의 노동력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보건복지가족부 관계자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층에 편입되는 10년 후부터는 고학력과 전문성을 갖춘 노인들이 대거 등장해 일자리를 놓고 젊은 세대와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중순 서울의 한 음식점에 "어머니 환갑(還甲)잔치를 하겠다"는 예약전화가 걸려왔다. '환갑잔치 전문'이라고 인터넷 광고를 낸 지 5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 식당에 환갑잔치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노인이 많은 농촌마을에서도 환갑잔치는 자취를 감췄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30.4%로 가장 높은 전남 고흥군의 포두면 남성마을은 주민(865명)의 70%가 노인이지만 최근 5년 사이 어느 집에 환갑이 돌아왔는지조차 모른다고 한다.
이형근(51) 이장은 "요즘 60세는 너무 젊고 건강해 우리 마을에서는 '총각' '새댁'으로 통한다"고 했다.
조경환 고려대 가정의학과 교수는 "1950년대에는 평균 수명이 50세도 안 됐지만 지금은 80세에 달한다"며 "노인의 기준을 65세로 두는 것이 적당한지 재고해봐야 한다"고 했다.
한정란 한서대 노인복지학과 교수는 "일을 통해 자립하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노인들의 욕구를 사회의 생산동력으로 바꿔주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2> 내 방식대로 즐기기
20~30년의 여생 위해 투자… 性에도 솔직
시설·프로그램 모자라 일부는 '지하철 유랑'
전문가들 "10년후 노인될 베이비붐 세대 주목"
아직도 성생활을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니…. 선생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올해 초 연세대 간호대학에서 열린 '노인의 성(性)과 사랑' 특강. 90세 김모씨가 비뇨기과 전문의의 강의가 끝난 후 손을 번쩍 들어 질문을 던졌다. 200석을 가득 메운 노인들은 한 시간이 넘게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 '성생활 용품을 써도 되는가', '부인이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등의 고민을 털어놨다.
지난달 29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열린 성 특강 후 무료로 나눠준 500개의 콘돔이 바닥났다. 종로구보건소 측은 "종묘 공원 근처 노인들의 성병 감염률이 10%에 달해 시작한 특강"이라며 "요즘 노인들은 성에 매우 개방적"이라고 말했다.
서울 근교의 한 실버타운에서는 최근 한 노인 커플의 '동거(同居)'가 화제가 됐다. 2년 전 부인과 사별한 이모(70)씨는 실버타운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60대 여성을 만나, 두 달 만에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이씨는 "주변에 서로 사랑한다고 당당히 밝혔고, 자식들도 결혼에는 반대했지만 '두 분이 서로 의지가 되고 행복하면 됐다'며 동거에 동의했다"고 했다.
연세성건강센터 배정원 소장은 "요즘 노인들은 자신의 나이에 0.7을 곱해야 진짜 나이라고 믿는다"며 "이들은 예전에 비해 높아진 생활수준과 건강을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다양하게 즐기려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제 막 노년기에 들어선 60대의 경우, 고졸 학력이 30% 이상인 데다 경제력을 갖춘 경우가 많아 자신을 윗세대 노인들과 차별화하려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들은 남은 20~30년의 삶을 재설계하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꾸려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프리랜서 기자, 숲 해설, 자원봉사 상담, 철학강의 수강, 판토마임 공부, 블로그 운영, 단전호흡, 노인 모델…' 자녀들이 "엄마를 보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장명자(여·68)씨의 하루는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쉴새 없이 돌아간다. 그의 일은 대부분 무보수로, 오히려 자신이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장씨는 "자기 인생을 즐기는 법을 찾지 못하면 나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짐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 노인복지센터와 실버타운을 중심으로 '동아리' 만들기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서울노인복지센터 임태리 사회복지사는 "관심사가 비슷한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주 2~3회 외국어나 시사토론 등을 한다"고 했다. 현재 이 센터에서 활동 중인 동아리는 28개로, 일어·영어 동아리는 인사동 길안내와 외국어 안내문 번역도 맡고 있다.
영어회화 동아리를 운영 중인 김상기(71)씨는 "동아리에서 내가 어린 축에 속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 욕심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10년 후 노인이 되는 현재 50대 베이비붐 세대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싸이월드 신희정 과장은 "50대의 미니홈피 이용률이 2004년 3만8000명, 2007년 95만명, 올해 150만명으로 급격히 늘고 있다"며 "이들은 60대, 70대가 돼서도 자신의 홈피를 관리하고 클럽·카페를 통해 동호회나 동문회를 조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실버산업 컨설팅업체 관계자는 "현재 60대 이상 노인들은 돈 쓰는 법, 노는 법을 몰라 이들 대상으로 하는 실버산업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10년 후만 되면 '와인세대'(45~64세)를 중심으로 시장이 급격히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예비 노인인 50대가 퇴직한 후, 20~30년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큰 숙제가 됐지만,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준비는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재 대부분의 노인들은 지자체의 노인복지관이나 노인대학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이 현실. 이들 복지관의 프로그램도 건강관리와 춤·노래 등에 한정돼 있고, 노인 수에 비해 시설이나 프로그램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의 한 노인복지센터에서 서양철학강의를 듣는다는 김문식(78·퇴직교사)씨는 "복지관 프로그램이 천편일률적이라, 나처럼 배우고자 하는 노인들은 자기 계발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노인들은 '지하철 유랑(流浪)'에 나서기도 한다. 임모(73·서울 성수동)씨는 오전 10시만 되면, 1000원짜리 김밥 두 줄과 그날 신문을 들고 지하철에 오른다. 그는 "경로당도 하루 이틀이지, 화투 치다 100원 때문에 멱살잡이하는 노인들 보기 싫어 공짜 지하철을 타고 오이도, 인천, 천안을 떠돌다가 오후 늦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임씨처럼 소위 '공지족'(공짜 지하철 이용자)이라 불리는 노인들은 매년 증가해, 서울지하철 공사에 따르면 올해 9월 65세 이상 무임권 비율은 10%에 달했다.
무위고(無爲苦)·고독고(孤獨苦)에 시달리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노인들도 늘고 있다. 65~69세 노인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 수(자살률)는 1995년 19.2명에서 2005년 62.6명으로, 70~74세 노인은 24.8명에서 74.7명으로 늘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살자 수도 늘어 75~79세 노인은 27.5명에서 89명으로, 80~85세 노인은 30.2명에서 127.1명으로 증가했다.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임춘식 교수는 "노인들의 즐기고자하는 욕구를 다양한 레포츠나 문화활동으로 풀어줄 필요가 있고 개개인도 젊을 때부터 '잘 노는 법'을 익혀야 한다"며 "물론 경제력이 우선 뒷받침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 잠시…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 '실버'
서울 강남시니어클럽에서는 63~76세 노인 10명이 영어·일본어를 통·번역한다. 외국계 회사 임원, 영어 교사, 무역회사 간부급 출신들이다. 대학원·복지기관 등에 편지·이메일을 보내 일거리를 따낸다. 번역은 A4 1장에 1만원~1만5000원, 통역은 1일 5만원. 시중 가격의 절반쯤 되는 저렴한 비용이 경쟁력이다.
지난해 9월, 은퇴 4년 만에 산학협력업체 연구원으로 '컴백'한 오병두(67)씨는 현역 시절의 활약을 계속 이어간다. 그는 22년간 한국해양연구원에서 근무하며 한국 최초의 6000m 무인잠수정 제작을 주도했었다. 오씨가 근무하는 ㈜슈퍼센추리 지용진 사장은 "고급인력 고용이 어려운 중소기업에서 은퇴 과학자들의 풍부한 지식·경험이 귀하게 쓰인다"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31.3%(15만7000여명)가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노인들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34.2%, 중졸 10.1%, 고졸 11% 등 대체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대졸(4년제)은 4.5%로 적다.
그러나 2020년을 전후해 현재 45~53세의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이 되면 '고학력 노인'들이 대거 배출된다. 800만명에 달하는 이들은 고졸이 절반이고(47%) 대졸도 19%나 된다. 중졸은 13.8%, 초졸은 5.9%뿐이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는 "건강 상태·학력 수준이 현재의 노인들보다 매우 높은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층에 진입하면 노인 일자리도 '맞춤형'으로 가야 한다"며 "일자리에 노인 개개인을 끼워 맞추는 지금의 형식이 10년 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은 "월 20만원도 좋다"
그러나 아직은 저임금·단순노동의 '3D 직종'으로 생계를 꾸리는 노인세대들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공적연금(국민연금·공무원연금·사학연금)을 받은 노인이 10명 중 2명에 불과(22.4%)했을 정도로,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채 덜컥 노년을 맞고 있다.
서울 월곡동에 사는 권모(67)씨는 요즘 밤마다 코피를 쏟는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권씨는 정부 보조금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져, 택배 일에 뛰어들었다. 민간 택배업체에 수수료 40%를 떼어주고 남는 돈은 하루 1만2000원 정도다. 몸이 아파 한달에 열흘은 일을 못 나가기 때문에, 월 수입은 24만원쯤 된다.
그는 "중졸 학력에 젊었을 때 변변한 직업도 없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며 "민간 택배업체에서는 지하철 요금이 공짜인 노인 고용을 선호하지만, 40~50%의 수수료와 보증금이 노인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고 했다.
현재 노인들의 절반 이상(52.3%)은 '본인·배우자 부담'으로 생활비를 마련한다. 자녀·친척의 지원을 받는 노인은 그에 못 미친다(42.1%). 정부가 추진 중인 노인일자리사업은 대부분 한달 임금이 20만원 선이지만, 그마저도 자리가 모자라 대기자가 줄을 선 형편이다.
지난해 노인인력개발원이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한 3000여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노인들 4명 중 3명꼴로 생계비(54%)·용돈(21%) 등 경제적인 이유로 취업을 했다고 답했다. '사회참여'(12%) '건강증진'(7%) 등은 부차적인 이유였다.
우리보다 '고령화 고민'을 먼저 겪은 외국에서는 노인들이 능력껏 일해 자립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스위스 패션회사 '타잔'은 할머니들의 양말·벙어리장갑 뜨개질을 사업화했다.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할머니를 선택하고 색상·디자인을 주문하면, 2주 뒤 그 할머니가 뜨개질한 양말·장갑이 배달되는 식이다.
자동차 등에 쓰이는 판금을 제작하는 일본의 가토제작소는 사원의 30%가 60세 이상이다. 평일엔 일반 직원, 휴일엔 노인 직원이 일해 연간 350일 공장을 가동하며 주문량을 100% 소화하고, 매출액도 2배 이상 늘었다.
일본은 기업들에 2013년까지 정년을 65세로 연장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년 60세 이상 연장을 권고할뿐 의무화는 못하고 있다. 사원 70여명의 평균나이가 67세인 울산의 선박 하청업체 창우산업은 아직 국내에선 예외적인 사례다.
박민서 목포대 교수는 "우리나라도 특정분야에서 노인 고용을 의무화하거나 노인 임금의 30~50%를 정부가 보전해주는 등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각자의 상황에 맞고 '자존심'도 높여주는 노인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