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과제는 자연연구에 몰두해 있던 당시의 철학적 방향을 인간성찰의 방향으로 돌려주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을 도외시한 자연은 진정한 철학이 될 수가 없다. 이 인간애의 성찰은 자연히 자아에 대한 자기반성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가 항상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 것은 그 당시 한 신전에 씌어 있던 글이라고는 하나,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학문의 기초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 인간과 자아의 핵심이 되며 진리탐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의 사고에서 가장 가까운 개념을 찾는다면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대외적으로 세계성을 띠게 되었을 때는 로고스가 된다. 로고스와 이성은 하나로 통한다. 질서로서의 로고스이며 사유로서의 이성인 것이다. 그러면 이성을 통한 지리에로의 길은 무엇인가? 대화와 토론인 것이다. 넓게 말하면 사유의 변증법인 것이다. 토론은 묻고 대답하는 동안에 더 높은 지식으로 향상되며, 이제는 더 물을 필요가 없이 확실한 개념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이 곧 공통성과 보편성을 갖는 진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일찍부터 그 방법을 택했고, 제자들의 공감은 물론, 학문연구의 한 방법을 확립시켜준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본다면 불필요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도 하나, 그의 제자 플라톤은 그 방법으로 수없이 많은 (대화편)을 서술했고, 지금 우리들에게 주는 암시 또한 대단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를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내가 다른 스승들보다 앞서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임을 지적했다. '무지에 대한 지'라는 뜻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아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스승으로서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리를 찾아내게 하는 산파역을 맡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히 두 가지 길이 열린다. 귀납적 변증과 보편개념의 도출과 확립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학문적 업적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 실제적인 방법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대화가 있기 때문에 편견에 빠지지 않으며 선입관념의 노예가 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을 유도해왔고,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고대철학의 길을 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회의보다도 물음을 통한 토론에서 철학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주지주의에 치우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윤리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덕은 지라고 말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이 있으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는 것이 선의 출발'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의로는 악을 행치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정도의 주지주의에는 문제가 있다. 소크라테스 연구로 학위논문을 제출한 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나는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고 그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그리스의 지성은 아주 큰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몰랐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뒤를 계승하는 서양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대부분은 이러한 주지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라톤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적 사유와 이성적 논증은 지금도 크게 환영받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덕이 무엇인가고 묻는다. '현실 사물로 하여금 주어진 목적에 도달케 하며 완성시키는 유능성, 아름다운 소질'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물론 다른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과 추리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뒤를 따르는 윤리학자들이 부분적인 비본질적인 설명을 가하는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많은 대중과 제자들의 존경을 받아온 소크라테스가 어째서 독약을 마시는 사형을 받아야 했는가? 어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높이기 위해 반소크라테스 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지나치게 비판하기도 한다. 거기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이끌어간 많은 사람들은 학문이나 사상의 문제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반박, 처형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 감정과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