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준영이를 만난 하모
룰루와 하모는 새끼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살고 있다.
새끼들은 먹성이 좋아서 감자 밭에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낮에는 주로 숲속에서 낮잠을 자고 밤에만 내려간다.
“아빠, 배고파. 지금 밭에 가면 안 돼요?”
“안 돼.”
“왜?”
“낮에는 사람들이 밭에 있어서 위험해.”
“그럼, 큰 송곳니로 콱 물어버릴 거야.”
“그래도 안 돼.”
“아빠는 겁쟁이야.”
“이 녀석이.”
“여보.”
하모가 룰루를 부르면서 루루를 용서해 달라고 눈짓으로 이야기 한다.
룰루도 안다. 하모가 얼마나 새끼들을 사랑하는 지. 룰루도 새끼들을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 위험한 곳이나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루루는 늘 말썽을 피운다. 낮잠 잘 시간에도 멀리까지 갖다 오기도 하고, 잠자는 동생들을 물어뜯기도 하고, 또 나뭇가지로 때리기도 한다. 아빠에게도 씨름하자고 덤빈다.
“아빠, 씨름. 내가 이기면 이제 내가 대장이야.”
“허허 녀석!”
룰루는 가끔 루루와 씨름을 한다. 지는 척 하다가 이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져 준다. 그런데 루루는 자기가 힘이 쌔서 이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아빠, 오늘 오빠 좀 혼내 줘?”
루루의 여동생들은 잘난 체 하고 괴롭히는 오빠를 혼내주기 바란다. 하지만 아빠는 루루를 더 강하게 키우려고 한다. 아빠가 죽으면 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먹이를 찾아야 하고 또 구해주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 오빠 혼내 줄게.”
깊은 숲속에서 룰루와 루루가 씨름을 한다.
“아빠, 꼭 이겨.”
루루 편은 아무도 없다. 겨우 엄마가 한 마디 한다.
“우리 아들, 아빠 이겨라. 꼭.”
루루에게 엄마의 한 마디는 큰 용기를 준다. 그렇게 시작된 씨름은 한 참이 지나도 승자가 결정 나지 않았다.
룰루 아빠는 루루를 이길 수 있어도 지는 척 하고 있다. 적당히 힘을 조절해 가면서 시간이 가기를 바라고 루루가 지쳐 쓰러지기를 바라고 있다.
“읏싸!”
“아이고 힘들어!”
아빠는 힘든 척 한다. 하지만 루루는 더 강하게 아빠를 밀친다. “읏싸! 읏싸!”
“우리 아들, 이기겠다. 호호.”
“아니야. 아빠가 이길 거야.”
루루의 여동생들이 아빠가 이길 거라고 외친다.
한 참이 지났다. 룰루와 루루는 서로 붙잡고 힘을 쓰지 못한다. 너무 지친 탓이다.
“루루, 오늘 무승부 어때?”
“싫어. 끝까지 할 거야.”
“아이고 힘들어.”
“아빠 힘내.”
“우리 아들. 홧팅.”
룰루는 이제 씨름을 그만 해야 한다. 그래야 해가 지기 전에 감자 밭에 도착해서 망을 보다가 안전하게 새끼들이 저녁을 먹게 해야 한다.
“루루, 아빠가 기권할게?”
“싫어. 기권은 없어.”
“뭐, 기권이 없다고?”
“그래. 끝까지 힘으로 해.”
고집쟁이 루루는 끝까지 아빠를 괴롭힌다. 말도 듣지 않는다. 아빠가 힘을 주어 이겨버리면 되는 데 이것도 걱정이다.
루루가 아빠에게 지면 그 댓가는 고스란히 동생들에게 돌아간다. 그걸 아빠는 안다.
“루루, 져도 동생들 괴롭히지 않을 거지?”
“읏싸! 몰라.”
“또 지면 동생들 괴롭히겠구나.”
“말 시키지 마. 내 힘 빼려고 하는 거지?”
“어떻게 알았어?”
“루루 머리 좋은 데.”
“읏싸! 읏싸!”
“루루 좀 쉬고 하면 안 될까?”
루루도 힘들다. 하지만 절대로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 아빠가 이렇게 포기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그럼, 아빠가 진 거야?”
“무슨 소리. 아빠가 좀 쉬자고 한 건데?”
“쉬는 건 진거야.”
“루루, 그런 룰이 어딧어?”
“있어 아무튼.”
하모는 새끼들을 챙긴다.
“어서들 옷 입고, 외출할 준비들 해.”
“네, 엄마.”
룰루는 루루에게 기권을 한다. 대신 아빠가 도전을 하면 언제든지 받아주는 조건으로.
“아! 아빠 이겼다. 이제 내가 대장이다.”
“우리 아들이 이겼어?”
“응. 엄마.”
하모는 루루가 다가오자 볼에 뽀뽀를 해준다.
“아들, 사랑해.”
“응.”
루루는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동생들은 벌써 루루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모두 감자 밭으로 내려갔다.
감자 밭에는 아직도 사람이 있다.
하모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은 바로 준영이 엄마다.
“세상에! 준영이네 밭이구나.”
“여보, 우리 다른 밭으로 가면 안 될까?”
“왜?”
“아무튼.”
“여기가 좋아. 숲으로 아이들이 도망가기도 좋고.”
“여보!”
룰루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다. 그때 밭으로 준영이가 걸어오고 있다.
“준영이다.”
하모는 몇 달 만에 준영이를 본다. 키가 많이 컸다. 얼굴도 새까맣게 그을리고 어깨도 넓어 보인다.
“엄마, 물 가져왔어요.”
“그래, 내 아들.”
하모는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준영이랑 같이 놀 던 모습들이 순간 생각난다.
“여보!”
“왜?”
“사실은 이집에서 나온 거야. 저 사람들은 준영이와 준영이 엄마야.”
“그래?”
“응. 그러니 여보, 우리 다른 밭으로 가자.”
“그랬구나!”
룰루는 하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다. 그리고 준영이랑 놀던 이야기를 숲속에서 많이 들었다. 이렇게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준영이가 돼지우리에서 꺼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여보.”
“알았어.”
룰루는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얘들아, 오늘은 다른 밭을 찾아 봐야겠다.”
“왜?”
“이곳은 덫이 많이 있어서 어두워지면 너희들이 위험해.”
“아이! 배고픈데.”
“아빠가 잘 아는 곳이 있어.”
“여기서 멀어?”
“조금만 가면 돼.”
루루는 아빠에게 처음으로 덫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혼자 살아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물어보던 덫이다.
“아빠, 덫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세요?”
“아직은 안 돼.”
“아빠는 항상 안 된다고만 해.”
“루루, 아빠 말 들어.”
하모는 아빠 편을 들면서 얘들과 함께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다음에는 꼭 보여줄 게.”
“네, 아빠.”
하지만 루루는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가 준영이네 감자 밭으로 들어간다.
“꿀꿀!”
“엄마 멧돼지다!”
“새끼다. 잡을까?”
“준영아, 위험해. 안 돼.”
“엄마, 새끼라니까.”
“안 돼. 새끼 곁에는 어미가 있어.”
“지금은 없잖아?”
“꿀꿀 하고 달려갔으니 곧 멧돼지 어미가 올 거야. 어서 집으로 가자.”
“엄마. 잡아서 돼지우리에서 키우자.”
“안 됀다고 했지?”
“네.”
루루는 준영이 곁을 지나서 밭 건너편으로 달아났다.
하모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룰루와 새끼들도 모두 루루의 행동을 지켜봤다.
루루는 계속 달리고 있다. 어디로 갈 지 모른다. 처음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엄마 아빠 말도 듣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에 아빠에게 혼날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나 혼자 살 거야.”
루루는 달리고 달렸다. 하모가 집을 나와서 달리던 것처럼.
준영이가 밭에서 내려가자 하모는 루루가 달린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루루!”
“루루!”
하지만 대답이 없다.
룰루도 다른 새끼들을 데리고 하모 뒤를 따라오고 있다.
“루루!”
달리던 루루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루루는 달리고 달린다. 앞만 보고 달린다. 하모도 루루가 간 방향으로 달리고 달린다.
“어쩜, 나를 닮은 거야.”
하모는 자신이 집을 나오던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루루에게 자유를 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친 하모는 그만 달리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루루!”
하모의 눈가에 눈물이 흐른다.
“루루!”
룰루가 새끼들을 데리고 하모에게 왔다.
“여보!”
룰루는 하모의 마음을 안다. 루루가 걱정이 되는 것은 하모보다도 룰루가 더 크다. 언제나 루루를 건강하고 튼튼하고 용감하게 키우려고 노력했으니까.
“여보, 다시 돌아올 거야. 루루가 달려간 곳으로 우리도 이동해 가면 만날 거야.”
하모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늘 루루의 편을 들어주면서 남편이 없을 때는 루루에게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여보, 일어나.”
“루루!”
하모는 일어섰다. 다른 새끼들이 걱정이다. 어서 저녁을 먹여야 한다.
“여보, 어디로 갈 거예요.”
“저 산 너머에 있는 밤나무 골.”
밤나무 골 감자밭은 랄라가 덫에 결려 죽은 곳이다. 랄라가 죽은 뒤로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밤이 깊어지고 감자 밭을 새로 찾는 것은 무리이다.
“미안해 여보.”
“아니, 당신이 길을 잘 안내하면 걱정 없어요. 난 당신 말을 믿고 따를 테니까요.”
“그래.”
룰루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밤나무 골 감자 밭에 도착했다.
“얘들아, 여기는 위험한 덫이 많은 곳이다. 아빠 엄마 뒤만 따라 와야 해.”
“네.”
룰루는 랄라가 덫에 걸려 발버둥 치던 옆길로 걸어갔다. 지난날이 생각난다. 몸이 오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끼들과 하모를 걱정해야 할 때다.
모두 밭으로 안전하게 내려갔다. 그리고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룰루와 하모는 그런데 먹지 않고 새끼들만 지켜보고 있다.
“여보, 고마워요.”
“뭘?”
“당신이 항상 이렇게 나를 배려해주고 이해해 줘서.”
룰루는 언제나 하모를 먼저 챙겨주고 배려하고 그랬다. 자기 고집만 부리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하모는 그래서 행복했다. 돼지우리에서 자유를 찾아 나온 것이 하나도 후회스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