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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전국 시대 ( 770∼221 B.C.)
* 周 -- 西周 (호경,1122∼771 B.C.) --- 東周 (낙읍= 뤄양, 770~221BC) ; 동주의 전반은 춘추시대, 후반은 전국시대
1) 주 왕실의 권위 약화 - 왕실과 제후 간 유대 약화 , B,C. 8세기 초, 왕실 내분 견융족 침입, 뤄양(낙읍)천도( 東周) 2) 춘추(春秋)시대(B.C. 770~403) ; 동주 전반, 공자의 <춘추>에 기록된시대, - 양쯔강 유역까지 확대,존왕양이(尊王攘夷), 춘추 5패 (제, 진, 초, 오, 월)등장 3) 전국(戰國) 시대(B.C. 403~221) ; 동주 후반, 한, 유향의 <전국책>에 기록됨. - 요하 유역까지 확대, 진의 천하 통일까지, 실력위주 약육강식 사회, - 전국 7웅(진,초, 연, 제, 한, 위, 조) 할거 □ 춘추 전국 시대의 사회와 경제 1) 정치적 혼란 ; 군웅의 할거로 봉건적 질서 해체 * 봉건제 → 영토국가화 중앙집권 군현제, 관료제 출현 2) 도시국가 → 영토국가화 , 활동무대 남쪽 확대 3) 신분제 동요 ; 능력 위주의 사회 4) 경제의 발달 - 철제 농기구 사용, 우경 보급 , 농업생산력 증대 - 토지 사유 인정 , 자작농 형성, 대토지 사유화 → 빈부 격차 심화 - 상공업과 화폐경제 발달 ; 잉여농산물,소금,철의 상품화, 청동화폐(명도전,포전) 큰 도시 형성(상업 중심지), 인구의 도시 집중화 5) 제자 백가 사상 발달
1) 諸子 百家 출현의 배경 ; 제후들이 부국 강병 추구,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 중시하는 풍조 2) 대표적 사상과 사상가들 -유가( 儒家) ; 인륜의 파괴에서 혼란의 근원을 찾음 , 가족윤리의 사회 확대 , 신분보다 내면적 도덕성 중시, 도덕과 왕도정치 강조, 전통 중시하되 합리성 강조 * 공자 → 인(仁 , 인간관계), 효제(孝悌 , 가정) , 예악(인격수양) ,덕치주의 강조,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맹자 → 호연지기, 의(義) 중시, 성선설 주장 * 순자 → 예(禮) 중시, 성악설 주장(법가에 영향 미침) - 도가(道家) ; 인위적인 도덕과 제도에서 혼란의 근원을 찾음. * 노자 → 무위자연(無爲自然), 상선약수 * 장자 → 제물론(齊物論), 물아일체(物我一體) - 법가(法家) ;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유가의 예보다 신상필벌의 엄격한 법치주의 강조 * 상앙. 한비자, 이사 - 묵가(墨家) ; 유가의 차별애 대신 무차별적 사랑 주장함 * 묵자 → 겸애설(兼愛說, 무차별적 사랑=박애주의) 주장 - 기타 ; * 음양오행가(추연) ; 오행(木火土金水) , 우주만물의 2원적 대립관계 ; 陽=해,남성,南/ 陰=달, 여성, 北) * 병가(손자, 오자), 종횡가(소진 합종책, 장의 연횡책), 명가, 잡가 등 9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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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화·보충 자료】
ㅇ 주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실력과 인망을 갖춘 제후가 패자라 하여, 존왕양이를 내세워 각 제후국간의 이해관계와 분쟁을 조정하였다. 춘추시대 제후회의에서 뽑힌 가장 강력한 제후를 패자(覇者)라고 말한다. ㅇ 춘추 5패 : 제의 환공→진의 문공→초의 장왕→오의 부차→월의 구천 ※ 그러나 전국시대는 패자시대의 형식적 질서마저도 무너지고 약육강식의 하극상 시대를 맞게 되었다. 각 제후는 왕을 칭하고 부국강병책을 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1) 첫 패자 제 환공 ㅇ 춘추시대 5패자중 첫 패자는 제 환공이다. 제나라는 주의 창건 1등 공신 태공망 여상의 나라다. 환공의 스승은 관포지교로 유명한 포숙아(=포숙)였다. 처음에 제나라에서는 소백과 규라는 두 공자(제나라 왕자격)가 정치적 이유로 각각 다른 이웃나라에 망명 중이었는데, 포숙은 소백을 관중은 규를 섬겼다. 제나라에 왕위자리가 비게 되자 두 형제는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적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관중은 공자 규를 위하여 귀국하는 공자 소백을 쏘았다. 소백은 거짓 죽어 영구차에 실려 귀국하여 제의 환공이 되었다. 포숙아는 친구 관중을 환공에게 추천하였다. 환공은 자신을 쏘아 죽이려하였던 관중을 오히려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환공이 패자가 되어 제후들을 규합시키고 천하를 바로잡은 것은 다 관중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라는 말은 관중이 한 말이다.
◆ 약속이란 지키는 것이다. 제나라 환공이 숙적 노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음 회담을 열었다.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서 제나라 환공과 노라 장공이 마침내 마주섰다. 이제 노나라 장공이 항복 문서에 조인을 하면 회담은 끝나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노나라의 장군 조수가 번개같이 단위에 올라 환공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말했다. “전하 우리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목숨을 내놓으시렵니까?” 상호 존중해야하는 회담장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깜짝 놀란 환공은 얼떨결에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이렇게 해서 회담은 흐지부지되었고, 양국의 제후들은 단하로 내려왔다. 제 환공은 다급한 나머지 조수의 협박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장수가 항복문서를 조인하는 자리에서 승자인 나에게 칼을 들고 협박을 한단 말인가? 환공은 조수의 목을 베고 약속을 취소하려 했다. 그러자 명재상이었던 관중이 말렸다. “전하, 부득이한 경우를 당했다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조수의 목을 베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관중의 간곡한 말에 환공은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말을 지키기 위해 그는 노나라의 땅을 모조리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환공은 신의가 있는 군주다.”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춘추시대 최초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년 뒤의 일이었다.
중국 주나라 춘추시대 12제후국중 5패자(주왕실을 존중하면서 주왕실의 권위를 빌어 제후들 위에 군림하여 질서를 바로잡고 이민족의 침입에 대처하며 천하에 호령하는 제후)가 나왔는데 그중 첫 패자는 제의 환공으로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노력에 의해 패업을 달성했다. ◆ 제 양공이 노 환공을 죽이다 제나라 양공에게는 정궁에 아들이 없고 후궁에 두 아들(규와 소백)이 있었는데, 규가 형이나 인물로는 소백이 위였다. 관중은 친구 포숙을 보고 “앞으로 난이 일어날 것 같으니 우리 둘이 각기 다른 공자(왕자)를 받들어 뒷날을 꾀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관중은 공자 규의 스승, 포숙은 공자 소백의 스승이 되었다. 제 양공은 배다른 누이 문강과 서로 사랑하였으나 문강이 노나라 환공에게 시집을 갔다. 16년 후 노나라 환공 부부는 제의 양공의 초청을 받아 제나라를 방문하였다. 양공과 문강은 은밀하게 밀통하였다. 노 환공이 의심하여 곧 돌아가고자 하였다. 제의 양공은 노나라 환공을 위해 환송잔치를 열고는 하수인 역사 팽생으로 하여금 환공을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사건은 팽생을 사형하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부끄러워진 문강은 노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경지대에 주저앉아서 터놓고 두 오누이는 부부처럼 지냈다. ◆ 관중이 소백을 쏘다 제 양공은 수자리 방비군과 교대약속을 어겨 신의를 잃고 사냥길에서 불만을 가진 군사들에게 암살당하였다. 참외를 먹으며 다음해 참외를 먹을 때쯤 교대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으나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동안 정치적 이유로 각각 자기 외가 나라에 피신하고 있던 양공의 두 아들 규와 소백은 서로 먼저 돌아와 왕이 되려는 경쟁을 벌리게 되었다. 포숙이 공자 소백을 받들고 먼저 본국으로 나아가고 있을 즈음 뒤따라 들어오던 관중이 소백의 군을 따라잡아 활로 소백을 쏘았다. 소백은 허리띠 고리쇠에 맞아 죽지 않았으나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하여 죽은 시늉을 했다. 위급을 모면한 포숙과 소백은 샛길로 급히 달려 관중과 공자 규보다 먼저 본국에 들어왔다. 포숙이 소백의 인물됨을 대신들에게 설득시켜 드디어 소백은 왕으로 옹립되었다. 포숙은 공자 규를 지원하는 노나라를 치고, 공자 규의 머리를 그리고 관중은 산채로 보내달라고 협박했다. 노나라 시백은 관중의 인물이 비범함을 알고 노나라가 관중을 쓰던지 아니면 후환이 되지 않게 죽이자고 하였으나 노나라 장공은 관중을 살려서 보냈다. 관중은 장공이 변심하여 추격할까봐 호송 군사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신나게 만들어 이틀 길을 하루 만에 국경을 넘었는데 과연 노나라의 추격이 있었다. ◆ 포숙이 관중을 제 환공에게 천거하다. 소백을 죽이려 하였던 일을 부끄러워하는 관중을 마중 나온 포숙은 말하기를 “큰일을 하는 사람은 작은 부끄러움을 돌아보지 않고, 큰 공을 세우는 사람은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다네. 자네는 천하를 바로잡을 큰 재주를 지니고도 그 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포숙은 환공을 만나 “먼저 조상(弔喪)부터 드리옵고 다음으로는 하례(賀禮)를 드리옵니다.” 라고 말했다. 조상은 환공의 형인 공자 규의 죽음을 의미하고, 하례는 관중을 얻은 것을 의미했다. 환공은 관중이 쏜 화살을 간직하며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포숙이 다음과 같이 말하여 환공을 설득하였다. “관중이 임금을 쏘았을 때는 자기 주인인 공자 규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임금께서 만일 그를 쓰시면 그는 이제는 마땅히 임금을 위해 천하를 쏠 것입니다. 어찌 사사롭게 그때의 일에만 얽매이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포숙의 천거로 관중이 등용되고 환공은 패업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 관중이 친구 포숙을 평하다. 관중은 포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내가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해서 내가 이익을 더 많이 차지했으나 포숙은 나를 탐욕하다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2) 내가 포숙을 위한다고 한 일이 그를 곤궁으로 몰아넣어도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리하고 불리함이 있다고 이해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3) 내가 세 번 벼슬에서 쫓겨나도 부덕하다 하지 않았다. 4) 내가 세 번 전쟁에서 도망을 쳐도 비겁하다 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가 있다는 것을 포숙은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나를 이해해 준 것은 포숙이다.
1. 管鮑之交(관포지교) : 썩 친밀한 교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사귐 2. 水魚之交(수어지교) :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뗄 수 없는 사이 3. 竹馬故友(죽마고우) : 어릴 때부터의 친한 벗 4. 莫逆之友(막역지우) : 아주 허물없는 벗 5. 金石之交(금석지교) : 쇠와 돌처럼 굳은 사귐 6. 肝膽相照(간담상조) : 간과 쓸개가 가까이 서로 잘 보여 주듯이 마음을 터놓고 사귐 7. 膠漆之交(교칠지교) : 매우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귐 8. 刎頸之交(문경지교) : 죽고 살기를 같이 할 만한 친한 사이나 벗 9. 金蘭之交(금란지교) : 쇠처럼 날카롭고 난초처럼 향기나는 친구 사이. 10.芝蘭之交(지란지교) : 영지와 난초의 향기로운 향기 같은 벗 사이의 교제 11.斷金之交(단금지교) : 매우 정의가 두터운 사이의 교제 12.交友以信(교우이신) : 친구를 믿음으로써 사귐. 世俗五戒의 하나 13.朋友有信(붕우유신) : 친구사이의 도리는 신의에 있음.五倫의 하나 14.布衣之交(포의지교) : 곤경의 상황에서 사귄 친구 15.知音知己(지음지기) : 소리를 듣고 나를 인정해 주는 친구
1) 월왕 구천→오 합려를 격파 (합려 전사, 아들 부차에게 유언) 2) 오왕 부차(장작위의 잠=와신) → 월왕 구천을 격파(구천의 회계의 굴욕) 3) 월왕 구천(쓸개맛=상담) →오왕 부차를 격파(부차 자결) 오자서가 오왕 부차에게 월왕 구천을 죽이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하였다. 구천은 미녀 서시를 오왕에게 보내고, 오나라 간신 백비에게 뇌물을 주어 오자서를 참소하자 오자서는 자결을 강요당하였다. 오자서 : “반드시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서 오왕 부차의 관을 만들 수 있게 하라. 그리고 나의 눈을 빼내 오나라의 동쪽 문에 걸어두어 월나라 도적들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하면서 죽었다. 후에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에게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내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 ” 드디어 월왕 구천은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가 되었다. ◆ 오자서(伍子胥) ㅇ 초나라 평왕 태자 건의 태부(수석스승)는 오사, 소부(보조스승)는 비무기였다. 비무기의 간계로 진나라에서 맞이한 태자 아내감이 미인이자 평왕에게 바치고 태자를 모함하였다. 태자는 망명하고 오사와 큰아들 오상은 비무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오사의 작은 아들 오자서는 오나라로 탈출하였다. 오자서는 오왕 합려를 움직여 초를 쳤다. 오자서는 초의 평왕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3백번 채찍질하자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사람을 보내어 오자서가 심하다고 나무랐다. 오자서는 일모도원(日暮途遠 ; 날은 저물고 할 일은 많다)이란 고사성어를 남겼다. 신포서는 진으로 달아나 이레를 통곡하자 진이 도와서 초를 구원하였다.
◆ 제자백가(諸子百家), 백가쟁명(百家爭鳴) 제나라 수도 임치성, 성문 13개 서문의 하나인 직문(稷門), 학자들의 토론장, 제의 위왕 선왕은 직문의 학자에게 자유 연구 토론케하고 일정한 일을 맡기지 않고도 급료를 주었다. 맹자 순자 추연등 직문의 초대 간부는 순우곤 통상 9류로 분류한다(후한 말 유흠(劉歆) : 유가 도가 묵가 명가 음양가 법가 종횡가 농가 잡가 )
◆ 출생 ㅇ 안사고라는 거문고를 잘 타는 소경에게 세딸이 있었다. 어미는 죽고, 맏딸은 과년하고 둘째 딸은 아비와 함께 잔칫집에 노래를 부르러 갔다. 열다섯의 세째딸 안징재는 언니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기린을 타고 옥황상제에게 가니 만백성의 스승이 될 아들을 내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언니와 함께 니구산(尼丘山)동굴에 가서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사냥온 성주인 노나라 대부 숙량홀이 우박을 피해 동굴에 들어왔다가 두 아가씨를 만났다. 언니 여주의 주선으로 안징재와 숙량홀이 부부의 연을 맺어 공자를 낳았다. 세 살 때 부를 여의다. ㅇ 주 영공21년(BC 552년)노나라 창평향 추읍(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음 8월 27일(양력9월 28일)이 탄신일 일흔 둘에 별세. 자는 중니 이름은 공구, 키는 9척 6촌 (220㎝) ◆ 활동 ㅇ 52세 때 中都 의 宰라는 벼슬. 제노회담에서 제의 침략을 분쇄하고 노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대사구(大司寇)라는 최고재판관의 자리에 오름. ㅇ 56세 때 노나라를 떠나 14년간 방랑, 그의 이상인 인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덕있는 임금을 만나 그를 도와 仁政을 베풀어 천하를 바로잡아 보려 하였다. 69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ㅇ 공자가 정리한 저술; 중국 고대 민족문화의 보존과 전파에 빛나는 공적. 易經(주역, 인생철학을 논함), 詩經(고대 시가 수집 정리), 周禮(주대의 문물제도), 書經(상고 하 은 주의 정치적 문헌 수집 정리), 春秋, 樂記(음악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논함) 제자 3천명, 현세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인격적 수양. ◆ 진 실 공자는 자기가 아끼던 제자 중에서 특히 안회(顔回)를 자기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렇듯 사랑하던 안회가 32세로 죽었을 때, 공자의 슬픔은 비할 데가 없었다. 그 때 공자는 땅을 치면서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고 비통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공자도 안회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공자가 진(陳)과 채(蔡)와의 사이에서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할 때이다. 그때 공자는 7일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굶었다. 제자인 안회는 매일 공자를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다녔다. 어느 날 안회는 마침내 양식을 얻었으므로 공자에게 밥을 지어드리려고 했다. 공자는 안회가 밥을 짓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의 밥이 다 되었을 무렵 안회는 솥을 열고 밥 한 술을 떠먹는 것이었다. 공자는 못본체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얼마 있다가 안회가 밥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공자는 "방금 꿈을 꾸었는데 우리 아버님을 만났다. 청정한 이 밥을 드리고 싶다." 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안회는 "안됩니다. 조금 전에 보니 쌀밥에 수수가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싶으나 그렇다고 수수도 먹는 음식이라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제가 집어먹었습니 다." 하고 말했다. 공자는 그제야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눈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눈도 믿을 것이 못된다. 마음은 의지할 수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의지할 것이 못된다. 제자들아! 이것을 깊이 깨달아라.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 은 어려운 일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효심이 매우 깊어 공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느 날 공자는 다른 제자로부터 증자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노해 증자를 절대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고 명령했다. 스승의 화를 산 증자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어느 날 증자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참외밭에 나갔다. 그런데 일이 서툴러 그만 참외 뿌리를 모두 끊어 놓고 말았다. 이를 본 증자의 아버지는 불같은 화를 내며 옆에 있던 몽둥이로 증자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증자는 자기의 잘못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매질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매질을 참으려했으나 너무 심하게 맞은 증자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아무런 탈이나 불평이 없다는 뜻을 아버지에게 전하려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증자는 스승의 집 앞을 서성거리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에 들지 말라는 엄한 분부 탓에 이르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공자의 다른 제자가 밖으로 나오다 증자를 보고 그 까닭을 말해주었다. "스승께선 자네가 큰 잘못을 했다고 하시면서 효자로 유명한 순임금 이야기를 해 주셨지. 순임금의 아버지는 화를 잘 내고 툭하면 매를 드는 사람이었다네. 그런데 순임금은 아버지가 작은 회초리를 들 적에는 조용히 그 매를 맞았다고 했네, 그런데 큰 몽둥이를 들면 재빨리 몸을 피해 매를 맞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매를 맞는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지. 그것이 잘못되어 자신이 큰 상처를 입거나 죽게 되면 아버지가 스스로 미워하고 후회하실까봐 그런 것이라네. 아버지의 몽둥이를 피하지 않은 자네가 자칫 큰 사고를 당해 아버지로 하여금 큰 허물을 짓게 한다면 그 보다 더 큰 불효가 어디 있느냐고......" 그때서야 증자는 스승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 孟軻, 372-287 BC, 84세 맹자 告子章句上의 귀절 -"人有鷄犬 放則 知求之 有放心而 不知求 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 (盟子) [사람이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개가 도망을 친다면 찾아 나설 줄 알지만, 마음이 도망가면 찾아 나설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바로잡는 것일 뿐이다.] -"指不若人則 知惡之 心不若人則 不知惡 此之謂 不知類也" (盟子) [ 만약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으면 미워할 줄 알되 마음이 남과 같지 않음은 미워 할 줄 모르니 이것이야말로 일의 가볍고 무거움을 구분하지 못하는 처사이다. ] 성선설, 仁義사상, 왕도정치 강조, 당시 임금들은 패왕이 되기를 원했을 뿐 왕도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한 맹자는 고향 추(鄒)로 돌아가 후진 교육에 몸바쳤다.
[출처] ; 차이런 호우(채인후)지음, 천병돈 옮김, 예문서원. 2000.10,14 조선일보기사, (김수중 경희대 교수·중국철학) 라파엘로가 희랍철학자들을 묘사한 그림에 보면 플라톤의 오른손은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손은 아래로 땅을 향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공교롭게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 사람의 관계는 동양의 공자, 맹자, 순자 세 사람의 관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공자는 우리 삶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는데, 맹자는 공자사상을 이상주의적으로 발전시킨 반면 순자는 다시 그것을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발전시켰다. 맹자사상은 형이상학적이고 순자사상은 이지적이다. 근본유가, 혹은 원시유가의 대표적 사상가들인 공자, 맹자, 순자를 입체적으로 다룬 책이 번역되었다. 이 책은 차이런호우(蔡仁厚)의 「공맹순철학」(公孟旬哲學)을 세 권으로 나누어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현대 대만 철학의 흐름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현대 신유가’의 한 사람이다.(그는 또한 번역자 천병돈 박사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이 번역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의는 그동안 소홀히 취급된 순자를 맹자와 마찬가지의 비중으로 다루어 원시유가의 전개를 균형있게 소개한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공자에 의해 정립된 유학은 ‘내성’과 ‘외왕’이라는 두 축을 핵심으로 한다. ‘내성’(內聖)은 안으로 성인을 지향하여 수신하는 것이며, ‘외왕’은 사회에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맹자는 그것을 내면의 방향으로 발전시켜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논하고 유가의 도덕 형이상학을 확립했다. 이상주의적인 맹자는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간관을 수립했다. 한편 순자는 공자사상을 외면적 객관화의 방향으로 발전시켜 사회조직, 직분과 의, 예와 제도에 주안점을 두었다. 맹자는 천을 도리의 근원으로 보았지만, 순자는 자연을 다스리고(制天) 이용할 것(用天)을 주장했다. ‘하늘은 자료를 주지만 그것을 가치 있게 완성하는 것은 인간의 몫(天生人成)’이라는 게 순자의 생각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자면 맹자가 강조한 민본주의는 원칙이자 나아갈 방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고, 순자가 강조한 예와 법은 객관적 법제화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의의가 있다고 저자는 결론 내린다. (이하 줄임)
[ 출처 ] ; 모로하시 데츠지 지음· 심우성 옮김· ㅇ 2001.2.10 조선일보 BOOK(임동석·건국대 중문과 교수)
ㅇ(앞줄임) 책 원제는 ‘공자, 노자, 석가, 삼성회담’이다. 이를 기획하고 회의를 주관하며 사회를 맡은 이가 100살의 모로하시 데츠지(1883~1982) 노교수 였다. 그는 이 책에 생명을 대신 얹어주고 책이 출판됨과 동시에 그 육신은 마감한 인물이다. 회담장소 중국의 여산 오로봉으로 세 성인의 왕림한다. 공자는 수레, 석가는 흰 코끼리, 노자는 푸른 소를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드디어 회담이 시작되었다. 총 9가지 주제(장)로 나누어, 먼저 일상생활의 음식에 대한 기호, 갓난아이 예찬, 산수와 대자연에 대한 각자의 의견으로 말문을 열었고, 이어서 공자의 가계와 그 행적, 노자와 석가의 생애 등에 대하여 기존의 알려진 여러 기록의 진위여부를 직접 묻고 대답하여, 신원확인을 위한 편안한 청문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격인 생과 사에 대한 각자의 관념, 각론에 들어가 석가의 공, 노자의 무, 공자의 천에 대하여 깊이 있게 천착해 들어간다. 이어서 다시 석가의 중도와 공자의 중용, 그밖에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것, 그들의 정치관 도덕관 등에 대해 낱낱이 파고든다. 마지막으로 공자의 인과 석가의 자비를 들어 자신들이 재세시절 구세의 임무를 짊어지고 그토록 부르짖었던 각자의 대표 주제어를 한 어휘로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잠깐 이 삼성의 첨예한 토론을 들어보자. 석가가 “노자께서는 ‘도’를 ‘무’라 했는데, 이는 나의 ‘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라고 운을 떼었다. 그러자 “나의 실천가능한 도와도 다르고, 도를 무라고 단언했으면 그만이지, 다시 ‘현’이라고 어려운 표현을 씁니까?”라고 공자가 거들었다. “어디 그렇게 말했습니까?”라고 노자가 되묻자, “첫장의 유명, 무명이 그것이 아니오?”라고 공자가 맞받았다. 노자는 그제야 “현은 ‘현묘불가식’으로 알아 달라”라 주문하였다. 이에 “꽤 깊이 생각했군요. 본래 나도 그것을 공, 또는 불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요”라고 석가가 중재를 하는 식이다. 저자의 무한한 지식을 바탕으로 세 성인의 경전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때로는 현실감 있는 우화로 그 어려운 현어와 화두를 풀어내는 잔치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갓난아이처럼 되라”는 노자의 논리에 석가는 이렇게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옛날 조선에는 호환이 많았지요. 그러나 그 어떤 호랑이도 갓난아이는 해친 적은 없다더군요. 어른이라면 호랑이에 대하여 겁을 먹거나 잡으려 들었지만 갓난아이는 호랑이에게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그저 자연의 합일로 대했지요. 만나면 그 놈의 수염을 잡고 뺨을 부비며 놀자고 대들었다니까요” (줄임)
1) 노자 사상 ◆ 無爲自然의 道 노자는 비밀의 장막에 가려진 인물이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름은 李耳. 주왕실 도서관 史官? 초나라 태생으로 아주 높은 귀족 신분이었으며 노나라에 망명하였다 한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은 일이 있어 공자의 스승 격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공자보다 약 100년 뒷사람 ? 도교의 교리는 노자의 사상과 별로 관계가 없으며 다만 도사들의 가탁(假託)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설이 많다. 저서 노자 도덕경도 후세에 편찬된 것? ◆ 도(道) 그가 말한 無爲自然의 도는 신비하고 不可思議하여 설명하기 어렵지만, 장자의 설명에 의할 것 같으면 대붕새가 구만리장천을 날아가고 뱁새는 온종일 두어 자 높이밖에 안 돼는 나뭇가지 사이를 날면서 그것이 천지의 전부인양 만족하는 것도 하나의 도인 것이다. 도는 존재(存在)의 양상(樣相)이며 실태(實態)이며. 이법(理法)인 것이다. 자나 깨나 예법을 말하고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는 유가의 번문욕례(繁文縟禮)를 냉소하면서 나비가 이 몸인지 이 몸이 나비인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물아(物我)의 경계를 초월하고 대자연과 혼연 일체가 되어 인위적인 모든 구속을 벗어나는 것이 무위자연의 도이다. 그러나 왕자의 존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전제아래 무위 정치 방임주의(放任主義)를 택해도 이상적으로 정치와 도덕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것 같다.(허무주의 무정부주의 같은 점도 있다) ◆ 宇宙觀 천지만물은 어떻게 생겼는가? 유(有)에서 생겼다. 유(有)는 어디서 왔는가? 무(無)에서 온 것이다. 무(無)는 수치상의 영이 아니라 유의 전단계이 무인 것이다. ◆ 社會觀 하늘의 도는 남는데서 떼어다가 부족한데 보태기 마련인데, 인간의 도는 부족한데서 떼어다가 남는 곳에 바치고 있다. (토지겸병, 과세 과중 등 병폐를 통탄함) ◆ 人生觀 노자는 죽음에 임박해서 제자들을 앉혀놓고 입을 벌리고는 물었다. "내 입에 뭐가 보이는고?" "예,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물렁물렁한 혀만 보입니다." "그렇지 내 치아는 다 빠졌어. 젊은 시절 내 치아는 아주 좋았지만, 사나워서 혀를 물어뜯고 아주 교만하게 굴더니 다 빠져버렸지. 물어 뜯기우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참고 살아온 혀만 남은 것이야." 그러면서 단단한 것은 죽음이요, 부드럽고 온유한 것만이 생명이라고 설파하였다. 사람이 살았을 적에는 부드럽지만 죽고 나면 뻣뻣해 진다. 만물과 초목도 살았을 적에는 말랑말랑하지만 죽으면 말라서 딱딱해 진다. 그런 까닭으로 굳은 것은 죽음의 무리요, 유약(柔弱)은 생의 상징이다. 둥굴 둥글 모나지 말고 중도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일종의 유연철학(柔軟哲學)이다. 그는 세상 사람이 순간적인 향락에 도취할 때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모진 바람은 한나절도 못 가고 소나기는 하루도 못 간다. 누가 비와 바람을 몰아치는가 하늘과 땅이 아니냐? 하늘과 땅도 오래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야 도와 같이 영원할 수 있는 법" 즉 사나운 행동을 하면 장구할 수 없다. 참되고 진실한 것만이 오래 갈 수 있다.
老子는 "知人者智 自知者明(老子 辯德편)" 즉 '남을 아는 것은 智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明' 이라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先後本末, 大小輕重, 진퇴완급(進退緩急)이 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지혜요 총기다. 때를 잘 아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다. 이성을 행동의 등불로 삼아야 한다. 총명한 사리 판단을 위하여 부지런히 배우고 널리 독서하고 견문을 넓히고 남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합리적 사고를 하고 부단히 연구를 해야 한다. 그러나 智는 그저 아는 단계요, 明은 밝고 총기가 있는 단계이다. 남의 시비, 장단, 선악을 아는 것을 지혜(知慧)라고 한다. 스스로 아는 것을 총명(聰明)이라고 한다. 노자는 '明'을 몹시 높였다. 내가 남의 등은 잘 볼 수 있지만 내 얼굴은 잘 볼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편견(偏見) 고정관념(固定觀念) 아집(我執) 독선(獨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공평무사(公平無私)의 눈,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을 가져야 明 즉 총기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 노자는 "勝人者 有力, 自勝者强" 즉 '남을 이기는 것을 有力이라 하고 자신을 이기는 것을 强'이라 하였다. '勝人者 有力' 남을 이기는 자를 힘이 있다고 친다. 남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며 현상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작위이다. 하늘이나 도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自勝者强' 자신을 이긴다 함은 극기(克己)요, 자기의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허정(虛靜)에 돌아감이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다. 따라서 아무리 재물이 있어도 부족하게 느낄 것이니 결국 그는 가난한 자라 하겠다. 그래서 노자는 "知足者 富" 즉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라고 하였다.
ㅇ BC 365-290 전국시대 사상가. 장자의 사상은 흔히 노자의 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한다. 차이점은 노자가 현실에 깊이 집착한 반면, 장자는 인간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절대 적 정신의 자유와 자연과 일치된 혼의 安慰를 추구했다. 한마디로 萬物齊同사상이다. (齊物論편) 이 현실세계의 대립, 차별의 모습을 모두 허망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死生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특별히 생을 좋아할 것도 없고 사를 싫어할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이다. 다만 숙연히 오고 숙연히 갈 뿐이다. ㅇ “무릇 재주 있는 자는 고생하고 지혜 있는 자는 걱정하건만 무능 무위한 사람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배불리 먹고 즐거이 노닌다. 물결 따라 흐르는 배와 같아서 빈 마음으로 自適(適; 갈 적)하며 산다. ”
조나라 문왕은 검술을 좋아해서 데리고 있는 검객의 수만도 삼천 명이 넘었다. 그들은 밤낮으로 대결을 벌여 왕을 즐겁게 하였다. 매일같이 사상자가 들것에 실려 나갔지만 왕은 검술 구경에 빠져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조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져 갔다. 더군다나 무술을 닦는 사람들도 차츰 줄어들었다. 이런 기회를 틈타 주변국들의 도발이 잦아졌다. 위기의식을 느낀 태자 괴는 왕을 각성시키기 위해 현인을 찾다가 소문을 듣고 장자를 초빙했다. 태자의 부탁을 받은 장자는 문왕이 좋아하는 검객의 옷차림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그대는 무슨 일로 태자와 함께 나를 찾아왔는가?”왕이 묻자 장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검술을 즐겨 하신다기에 제 검술을 대왕께 보여드리려 찾아왔습니다.” “그대의 검술은 어느 정도인가?” “신의 칼은 열 걸음마다 한 사람을 죽이는데, 천리를 가도 앞길을 막는 자가 없습니다.”그러자 왕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오랜만에 진짜 검술을 구경하겠구먼” 장자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무릇 검객은 허를 베어 이익을 위하고, 상대방이 공격하면 서서히 일어나 기선을 제압한 다음 쓰러뜨립니다. 제가 곧 보여드리지요” “그럼 선생은 잠시 쉬고 계시오, 내가 신하들에게 일러 시합 준비를 해 놓은 다음 그 멋진 검술을 보도록 하지요.” 왕은 장자가 대단한 무예를 지닌 인물로 알고 호승심(胡僧之心 ; 남한테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날부터 문왕은 장자의 검술에 지지 않기 위해 7일 동안에 걸쳐 장자에 대적할 만한 검객을 선발했다. 그러느라 60여명의 사상자가 또 궁궐에서 실려나갔다. 마침내 문왕은 여섯 명의 고수를 선발하여 뜰에 대기시킨 후 장자를 불렀다. “준비가 되었으니 선생의 검술을 보고자 하오.” 장자는 태연히 대답했다. “저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그럼 선생의 검을 고르시지요. 여기 많은 보검이 있습니다.”그러자 장자가 문왕을 바라보고 조용히 말했다. “전하, 저에게는 세 가지 칼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느 것을 쓸지 제 설명을 듣고 전하께서 골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르지요, 그 칼이 무엇입니까?” “천자의 칼이 있고, 제후의 칼이 있으며, 서민의 칼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장자가 칼 이야기를 꺼내자 문왕은 의혹의 눈길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천자의 칼이란 어떤 것입니까?” “천자의 칼은 저 연계와 석성을 칼끝으로 하고 제나라의 태산을 칼날, 진나라와 위나라를 칼등, 주나라, 송나라를 칼의 콧등, 한나라와 위나라를 칼자루로 삼습니다. 또 변방에 이르는 공간과 사시의 무한한 시간으로 싸고 발해를 두르며, 상산으로 띠를 감고, 오행으로 통제하며, 형벌과 은덕으로 논하며, 음양의 기운으로 휘두릅니다. 가만히 있어도 봄여름을 생각게 하고, 움직일 때는 가을과 겨울의 날램이 있습니다. 칼을 곧장 앞으로 찌르면 그 앞에 적이 없고, 위로 치올리면 위에 적이 없고, 아래로 내리치면 아래, 휘두르면 사방에 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 칼을 한번 쓰면 천하의 제후들을 바로 잡고, 온 세계가 복종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천자의 칼입니다.” 듣고 있던 문왕은 기가 질려 넋을 잃고 장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물었다. “제후의 칼은 어떤 것이지요?” “제후의 칼이란 지혜와 용맹에 뛰어난 인물을 칼끝으로 하고, 청렴한 사람을 칼날로 하며, 어진 인물을 칼등, 충성스런 인물을 칼콧등, 호걸과 지사를 칼자루로 삼습니다. 이 칼을 휘두르면 역시 사방에 막을 자가 없습니다. 위로는 하늘을 본받아 일월성신의 기운을 따르고, 아래로는 대지를 본따 사시의 흐름을 따릅니다. 가운데로는 백성들의 뜻을 살펴 편안하게 다스리지요. 이 칼을 한 번 쓰면 우뢰가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아서 나라 안에 조공을 바치지 않거나 군명에 항거하는 자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제후의 칼입니다.” “그렇다면 서민의 칼은 무엇이오?” “서민의 칼이란 저기 서 있는 무사들처럼 머리카락을 쑥대처럼 세우고 쭈뼛한 귀밑털을 기르며 납작한 관에 색깔 없는 끈을 두르고, 앞이 짧은 저고리를 입고 성난 듯 소리 지르며 서로 칼을 휘두르는데, 위로는 상대편의 목을 베고 아래로는 다리를 자르는 것이 바로 서민의 칼입니다. 마치 닭싸움 같은 거지요. 이런 일로 일단 목숨이 끊어지고 보면 나라에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란 이미 저승으로 가 버린 후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천자와 다름없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런 서민의 칼을 좋아하시니 안타깝습니다. ” 이 말을 들은 문왕은 장자의 손을 끌고 용상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요리가 나와도 먹을 생각을 안 하고 식탁 둘레를 세 바퀴나 돌면서 멍청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궁 안으로 들어가더니 석 달이나 나오지 않았다. 문왕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칼의 유희를 벌이면서 국력을 낭비하였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는데, 장자가 통렬한 칼의 비유로 그를 각성시켰다. 옛말에 모기를 보고 칼을 뽑는다란 말이 있다. 칼이나 사람이나 다 알맞은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떤 칼을 쓸 것인가? 결정하였다면 열심히 갈고 닦을 일이다. ☞ 2000. 10 <좋은생각> 편집부
장자가 어떤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혜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혜자는 장자의 말이면 사사건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사람이어서 그에게 항상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무덤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장자는 같이 가던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옛날 초나라에 한 솜씨 좋은 미장이가 살고 있었다네. 미장이는 벽에 회칠을 하다 보면 코끝에 흰 흙이 묻곤 했는데, 그럴 때는 옆에서 일하는 석수장이를 불러 그 흙을 닦아 내게 했지. 석수장이는 들고 있던 도끼를 미장이의 코앞에서 휘둘렀는데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빨랐다고 하더군. 그러면 신기하게도 흰 흙은 깨끗이 닦여 있었고 코에는 조금의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네. 석수장이의 솜씨도 놀랍지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도끼 앞에 미장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표정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었던 거야. 어디 그것이 쉽겠는가? 석수장이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어느 날 이 소문을 들은 송나라의 원군은 그 석수장이를 당장 불러들였네. 그리고는 '자네의 솜씨가 그리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시험 삼아 나에게도 한번 해 보게' 하며 그 재주를 보려고 했지. 그런데 석수장이는 '그때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저의 그 짝이 죽은 지 오래되어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는 거야. 그런 재주는 자신의 도끼 앞에 꼼짝도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미장이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 이제 나도 혜자가 죽은 뒤로는 짝이 없어진 석수장이와 같아서 더불어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졌으니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네."
겸애설(兼愛說)과 자애설(自愛說)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사상가 중에 묵자(墨子/ BC 480∼BC 390)는 이렇게 말했다. 摩頂放踵 而利天下 爲之 (마정방종 이리천하위지) - 摩 갈마, 放 놓을 방, 踵 발꿈치 종, “이마를 갈아서 발뒤꿈치까지 이른다 하더라도 천하를 위하는 일이라면 행하겠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을 겸애주의(兼愛主義)라고 한다. 겸애(兼愛)란 곧 박애주의(博愛主義)라고도 할 수 있는데, 친한 사이거나 친하지 않는 사이거나 간에 (親疎間) 차별 없는 인류애로 사회평화를 이룩하자는 정신이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같은 시기의 사람인 양자(楊子)는 이렇게 말했다. 取爲我 拔一毛 而利天下 不爲也 (취위아발일모 이리천하 불위야) - 拔 뺄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으면 천하가 이로와 진다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양자의 이와 같은 사상을 자애주의(自愛主義) 라고 한다. 이 얼마나 철저한 이기주의인가? 양자의 이 말에 숨어 있는 뜻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때 세상은 저절로 평화롭고 질서가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싫어한다. 도둑질도 이기주의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그러나 100% 이기주의를 발휘한다면 도둑질도 할 수 없는 경지가 되지 않을까? 남의 물건을 훔친다면 우선은 이익이 될 것이지만 잡혀서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러한 짓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에까지 생각이 미쳐야 100% 이기주의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양자의 자애주의는 곧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개인주의란 무엇인가? 이기주의(利己主義)와 개인주의(個人主義)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다르다. 개인주의란 모든 사람이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행동하기를 원하며, 또 그러한 행동을 존중해 주는 태도이다. 개개인이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도 결코 다른 사람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계를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개인주의는 오히려 공익정신을 존중하며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우리 사회를 잘 사는 사회로 만들어 나가는 데는 버려야 할 특성이다. 남의 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는 맹목적 자기중심(自己中心)주의가 곧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가 현대에 이르러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무관심 현상이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백주에 대로상에 한 여자가 불량배에게 세 번이나 칼에 찔려가면서 30여분을 쫓겨 달아나다가 결국 피살되고만 일이 있다. 수십 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살려달라는 비명을 들으면서도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도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나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라고 답했다 한다. (2005년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버스 요금 시비로 노부모와 함께 탄 버스 내에서 한 여중생이 버스 여차장에게 목졸려 죽은 일이 발생했다.) 우리 사회도 “강도야” 해서는 아무도 내다보지 않고 “불이야”라고 외쳐야 뛰어나온다는 무정한 사회가 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 우리는 부정(否定)하는 일엔 잘 뭉치나, 적극적(積極的)으로 일하는 데는 협동(協同)이 잘 안 되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강한 협동정신으로 뭉쳐진 너와 나의 힘은 둘이 아닌 셋 이 되기도 하고 다섯이 되기도 한다. 이기주의보다는 개인주의, 개인주의 보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은 ‘우리’라는 의식이 내포된 ‘협동주의’ 일 것이다. ‘우리’라는 말에는 따뜻한 정감의 강한 연대(連帶)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내 접시에 옮겨 내 것으로 만든 다음에야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과는 달리 우리는 함께 나누어 먹어왔다. 오늘은 남북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확산시켜 통일도 그렇게 하여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오늘 이 역사적인 날에 붙여서 김규동 시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평화요 공존이요 사랑의 길 하나뿐이다. 우선 만나고 나누자”라고 했다.
1) 손 빈 ㅇ 위나라가 가장 먼저 강국으로 등장한 것은 명장 오기(吳起)를 등용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오기 장군은 병졸과 동고동락하고 종기의 고름까지 빨아주었다. 위 문후가 죽고 무후가 오기를 의심하자 오기는 초나라로 가서 국세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초의 도왕이 죽자 종실과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죽였다. ㅇ 손빈(孫 )이 위나라로 갔다가 친구인 위나라 장군 방연에게 두 다리를 잘리우고 얼굴에 자형(刺刑,얼굴에 무늬를 넣는 형벌) 당하였다. 제나라의 사자 수레를 타고 몰래 빠져나가서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의 객이 되어 마차 경기를 승리할 수 있게 작전을 세워주었다. (상등마↔하등마, 중등마↔상등마, 하등마↔중등마) 전기가 위왕에 천거하여 군사(軍師)가 되었다. 수레를 타고 계책을 세웠다. 제나라 군사가 위나라에 쳐들어가 첫날 10만개 아궁이, 다음날 5만개 그 다음날 3만개를 지폈다. 위 장수 방연은 “제나라 군사는 겁쟁이다. 우리 땅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도망간 병졸이 반을 넘었구나.” 방연은 보병을 버리고 빠른 정예군으로 밤낮으로 추격하여 왔다. 마릉은 길 양쪽이 험준하고 복병을 하기가 용이한 곳이었는데, 손빈은 큰 나무를 깎아서 ‘방연이 이 나무아래서 죽을 것이다.’라고 쓰고 ' 밤에 불이 보이거든 모두 일제히 발사하라' 고 명령하였다. 방연이 불을 밝혀 나무의 글씨를 읽으려 하다가 집중적인 화살에 맞아 방연이 죽었다. 마릉의 싸움으로 제나라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지고, 위나라의 세력은 점점 쇠퇴해졌다. ※ 세상의 손자병법은 손빈이 아니라 오왕 합려를 섬긴 손무(孫武)의 저술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백아(伯牙)라는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거문고는 너무나 고답적이 어서 알아듣는 사람이 적었다. 백아의 친구인 종자기(鍾子期)는 백아의 거문고 음악을 훌륭하게 알아들었다. 종자기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아, 참 훌륭하네 자네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꼭 신선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아” 하며 칭찬해 주었다. 어느 때 두 사람은 같이 산중 깊이 들어간 일이 있었다. 큰비를 만나 두 사람은 바위틈에 들어가 비를 멎기를 기다리며 거문고를 탔다. 빗소리 물소리 거문고 소리가 어울러져 종자기는 넋을 잃고 듣다가 곡이 끝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산이 허물어지는 곡을 타면 정말로 산이 허물어지는 줄 알고 소스라쳐 놀라기도 하였다. 종자기는 백아를 칭찬하였고, 백아는 또 “아, 참으로 자네의 음악을 감상하는 태도는 훌륭하네. 나의 거문고를 그렇게 들을 줄 아니 나는 참으로 보람을 느끼네.”하고 종자기를 칭찬하였다. 그런데 종자기가 먼저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때 백아의 슬픔은 컸다. 백아의 슬픔은 친구를 잃은 슬픔과 자기의 예술을 잃은 슬픔이었다. 백아는 일세를 뒤흔드는 거문고의 명수였으나 이제 자기의 거문고를 참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아끼던 거문고를 부숴 버리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
강성했던 제나라가 차츰 내부의 결속이 무너지고 권력다툼이 일어나 국력이 쇠약해져 갔다. 호시탐탐 국경을 노리던 주변 제후국들에게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다. 위기를 직감한 제나라는 안영을 재상으로 삼아 외교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안영은 언변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나라 침략의 부당성을 역설하여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안영이 강대국 초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초왕은 작고 보잘것없는 풍채를 지닌 안영의 기를 꺾을 속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나라에는 사람이 꾀나 없는 모양이구려. 자네와 같은 이를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니.” 그러자 안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 황공합니다. 저희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할 때 큰 인물은 큰 나라에 보내고, 보잘것없는 자는 보잘것없는 나라에 보내곤 합니다. 제 몰골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것은 제 책임이 아니옵니다.”이 말에 초왕은 말문을 닫고 말았다. 며칠 후 초왕은 관례대로 사신을 환영하는 주연을 베풀었다. 술자리가 도도해질 무렵 궁정 뜰에 관리들이 오랏줄로 꽁꽁 묶인 한 죄수를 끌고 지나갔다. 초왕이 짐짓 그들에게 물었다. 그놈은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러자 관리가 발을 멈추고 대답했다. “예, 전하, 이놈은 제나라 사람인데, 우리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습니다.” 이 말을 듣자 초왕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영에게 말했다. 쯧쯧, 제나라 사람들은 도벽이 심한 모양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초왕이 안영의 지혜를 떠보려고 연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하, 황공하오나 귤나무는 회수 남쪽에서는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저 죄수도 제나라에 있을 때는 선량한 백성이었는데, 회수를 건너 이 초나라에 온 뒤로 도둑놈이 되었습니다. 제나라와 초나라의 성정이 이렇듯 다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초왕은 이렇듯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용기 어린 말로 침착하게 대응하는 안영을 보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제나라는 안영이 있는 한 망하지 않겠구나.”
제나라에 난이 일어나 왕인 장공이 죽임을 당했다. 범인은 최서라는 사람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태사는 역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최서가 장공을 죽였다.” 이를 안 최서는 화가 치밀어 태사를 당장 불러들여 사형을 명했다. 당시 사관이란 관직은 세습체제였기에 태사가 죽임을 당하자 태사의 아우가 사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 아우 역시 똑같이 기록하였다. “최서가 장공을 죽였다.” 최서는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또 다시 아우를 죽였다. 그러자 그 다음 아우가 사관이 되어 기록서에 또 적었다. “최서가 장공을 죽였다.” 최서는 다시 그 아우의 아이를 죽였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또 아우가 있었다. 네 번째 사관인 그도 그 전과 같이 적었다. 그러자 마침내 최서는 사관 형제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그들이 적는 대로 놔두었다. 진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사관 형제의 용기 앞에서는 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포폄(褒貶), 필주(筆誅)
o 과거의 역사를 심판하는 것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며 그것도 현존하는 인간보다는 후세의 인간인 것이다. 역사는 포폄(褒貶) 즉 ‘찬양과 비난’의 자료로서 기록되는 것이다. 춘추필법, 필주(筆誅)라는 말이 있다. 옳고 잘못되고 바르고 그른 것을 붓으로 가려 놓고 사서에서 판단시킨다는 것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에 폭군 영공의 재상이었던 조순(‘趙盾)은 곧은 인물이었던 까닭으로 도리어 생명이 위험하게 되어 마침내 도망쳤다. 그 동안 그의 4촌 조착(趙窄)이 영공을 시살하였다. 이 사실을 두고 사관(史官) 동호(董狐)는 ‘趙盾弑其君’(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이라고 기록하였다. 조순이 이이를 제기하자 동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정경으로 있으면서 도망했고 또 아직 국경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돌아와서도 적을 치지 않았으니 군을 죽인 자는 그대가 아니고 누구인가" 공자가 칭찬하였고 동호는 모범적인 역사가의 대표자로 일컬어져 왔던 것이다. 명분(名分)을 바로 잡은 것이 춘추의 필법이요 포폄(褒貶)을 가리는 것이 중국사서의 중요한 면이다. 역사책이 읽혀지는 이유 ㅇ 역사책이 읽혀지는 것은 도덕적 교훈과 포폄과 그리고 정치상의 참고만은 아니다. 과거의 내력을 알려고 하는 인간 고유의 지식욕이 크게 작용한다. 역사는 교양인의 지식의 원천이 된다. ㅇ 상고(尙古)주의 : 인간세상이 점점 향상되고 좋아진다는 진보사관, 발전사관과는 그 반대이다. 옛날 선례가 더 중요한 설득의 무기가 되었다. 어떤 행동이나 주장은 고대의 선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그 정당성은 몇 배로 증강된다. 너무 일찍부터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켰기 때문일까? ㅇ 역사는 항상 새로 쓰여져야 한다. 우리의 요구는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돌아다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각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양의 역사들은 오늘날 사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는데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자체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케 하는 서술방식 즉 독자자신이 판단하게 한다. 요리보다는 소재를 앞에 둔 것 같다.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맹상군은 식객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집에 기거하는 사람 수가 무려 천명이 넘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먹여주는 맹상군을 위해 위험할 때 목숨을 바치는 이도 더러 있었다. 어느 날 풍훤이라는 사람이 맹상군을 찾아왔다. 맹상군은 정직해 보이는 그를 받아들여 묵어가도록 허락했다. 얼마 후 맹상군은 풍훤을 불러들여 자신의 영지인 설에 가서 세금을 받아오고 그간 꾸어준 돈을 받아오도록 시켰다. 장부를 건네받고 돌아서 나가려던 풍훤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세금 징수를 모두 마치면 무엇을 사올까요?” 맹상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 거라도 좋네, 집에 부족한 듯 한 것이 있으면 그걸 사오게나.” 그 길로 풍훤은 설 지방으로 가서 장부를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세금을 거두었다. 그런데 방문한 집의 형편을 보아 적당히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할 만큼 가난한 농부에게는 그 자리에서 차용증을 불에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풍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농부들에게 말했다. “이일은 모두 재상 맹상군이 시킨 것입니다.” 맹상군의 집으로 돌아온 날 풍훤은 빈 주머니를 내밀며 그간의 일을 고백하며 말했다. “세금을 걷어오지 못했으나 이 집에 없는 義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맹상군은 버럭 화를 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1년 뒤에 맹상군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실의에 차서 영지인 설로 숨어들었다. 밤이 어두워서야 설에 도착하였는데 마을사람들이 모두 횃불을 들고 나와 맹상군을 맞이하며 “맹상군 만세! 맹상군 만세! ”를 외쳤다.
중산군이라는 중국의 한 왕이 자신을 따르는 사대부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던 날이었다. 사대부들이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잔칫상이 차려져 나왔다. 그런데 국물이 모자라 사마자기라는 사람에 게만 양고기 국물이 돌아가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국물을 떠먹으며 즐기는 동안 몹시 불쾌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이일로 사마자기는 중산군을 버리고 초나라로 가버렸다. 그리고 초왕으로 하여금 중산군의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중산군은 몇 사람의 심복을 데리고 피신하였는데 웬 낯선 사내 두명이 창을 들고 뒤를 따라 오는 것이었다. 중산군이 그들을 불러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이건대 나를 보호해 주가?”그러자 두 사이가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며 말하였다. “예, 중산군께서는 저희 부친이 배고픔으로 쓰러졌을 때 우연히 지나가시다가 찬밥 한 덩어리를 주신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부친은 그 찬밥 한 덩어리로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 저희에게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만약 왕께 무슨 일이 생기면 죽음으로 보답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허허,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베푼다는 것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로구나. 상대방이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었구나. 그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내가 한 그릇의 양고기 국물로 나라를 잃고 한 덩어리의 찬밥으로 목숨을 구하였구나” 그 순간 사마자기의 부대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내의 보호를 받으며 중산군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ㅇ 노나라 대부 맹손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가서 새끼 사슴 한 마리를 사로잡았다. 그것을 자기 아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진서파라는 사람에게 자기 집에 갖다 두라고 말했다. 진서파는 새끼 사슴을 안고 맹손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새끼를 잃은 어미 사슴이 슬피 울며 뒤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본래 인정이 많은 진서파는 그것을 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진서파는 뒷일이야 어찌 되었건 그 정황을 보고 인정에 끌려서 우선 새끼 사슴을 놓아주고 말았다. 맹손은 진서파를 크게 꾸짖으며 그의 집에서 추방하였다. ㅇ 이런 일이 있은 지 3개월 뒤에 맹손은 진서파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는 전보다 더 중요한 자기 아들을 보살피는 일을 맡겼다. 어떤 사람이 맹손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진서파를 죄인 취급해서 내 쫓더니, 이번에는 그렇게 중대한 일을 맡기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에 맹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슴의 새끼에게까지 그렇게 깊은 동정심을 베푸는 사람이니, 사람의 자식에게는 그 보다 더한 인정이 베풀어질 것이 아니요. 그렇게 인정 있는 사람에게 내 자식을 보살피게 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일이요.”
중국 춘추전국시대, 복부제가 노나라 선부라는 마을을 다스릴 때의 일이다. 이웃 제나라의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복부제는 즉시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침 그때는 추수기여서 성문밖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기껏 농사를 지어 적군들에게 곡식을 넘겨 줄 바에야 적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성문 밖으로 나가 아무 밭에서나 자기 힘이 닿는 대로 걷어 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복부제를 찾아온 백성들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복부제는 그들의 청을 뿌리치고 모든 성문을 단단히 닫으라고 다시 명령했다. 평소 지혜롭고 청렴한 복부제를 존경하던 백성들은 차츰 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적군에 의해 곡식을 다 수탈당하자 복부제를 원망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 소식은 곧 노나라 왕에게도 전해져 결국 복부제는 왕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노나라 왕이 무서운 눈으로 복부제를 쳐다보며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복부제는 침착하게 말했다. “일년 지은 곡식을 적병들에게 빼앗긴 것은 아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급하고 손쉽다고 해서 남의 곡식을 마구 베어다 먹는 버릇이 생기면 그것은 10년이 가도 고칠 수 없는 무서운 병이 될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복부제의 식견에 왕은 탄복하였다. 그리고 그 후 백성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며 따랐다.
ㅇ BC 343-285) ; 전국말기 초나라 귀족으로 태어나서 대신이 되어 국세 회복에 고심했으나 친秦파 정적들의 모함으로 실각하였다. 자기의 정의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고뇌를 격한 어조로 문학작품을 통해 호소하였다. “백락 (伯樂)이 죽었으니 천리마를 누가 감별하리” [☞ 백락 (伯樂) ; 옛날 손양이란 사람이 말을 신통하게 잘 감정해 그를 백락이라 불렀다. 원래는 天馬를 다스리는 별 이름] 굴원은 문학자로 중국사상 최초로 그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최대의 걸작-이소(離騷)는 웅대한 장편서정시. 굴원과 그 문인 추종자 시집을 초사(楚辭)라 한다. 주제는 혼란· 부패된 세상에의 분노이며 조국의 앞날에 대한 끝없는 우려이며, 올바르면서도 추방을 당한 자의 비통이다. 애국적인 시인이었다. 11) “忠臣 不事二君 烈女 不更二夫”(왕촉) ㅇ 연나라가 제나라에 침공하였을 때 획읍사람 왕촉이 어질다는 말을 들은 악의는 군중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획읍의 둘레 3십리 안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 하고 왕촉을 회유하여 장군으로 삼고자 하니 왕촉이 이와 같이 말하고 스스로 목을 메어 죽음. 진 소왕 질장구를 치다.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 혜문왕때 사람이다. 혜문왕이 유명한 보물인 화씨의 구슬(和氏璧)을 손에 넣었다. 강국 진나라 소왕이 진나라 15개성과 이 구슬을 맞바꾸자는 요청을 해왔다. 인상여가 자원하여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로 갔다. 성을 떼어 줄 의사가 없으면서 구슬만 빼앗으려는 소왕의 간계를 간파하고 인상여는 꾀를 내어 구슬을 도로 받아 가지고는 머리와 함께 기둥에 깨어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구슬을 빼돌려 조나라로 보냈고,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인상여도 무사히 귀국하였다. 진나라는 끝내 성을 내주지 않았고 조나라에서도 벽옥을 보내지 않으니 ‘화씨의 벽’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이 일에서부터 ‘완벽(完璧)’이란 말이 나왔다. 조와 진이 합세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조는 제나라의 간청에 따라 일방적으로 군사를 거두자 진왕이 몹시 격노하여 조를 쳐서 괴롭혔다. 진왕은 수호(修好)하고자 조왕을 민지에서 만나자고 청하였다. 조왕이 민지에서 진왕을 만났다. 진 소왕이 조 혜문왕에게 슬(악기)을 한 곡조 청하였다. 혜문왕이 거역할 수 없어 슬을 탔다. 진나라 어사(사관)가 앞으로 나와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을 만나 술을 마시고 조왕을 시켜 슬을 타게 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인상여가 앞으로 나아가 "진왕께서는 진나라 음악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질장구를 올리오니 청컨대 진나라 음악을 들려주십시오." 질장구란 질그릇을 말한다. 진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악기가 별로 없고 질그릇을 장구처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진왕이 성을 내어 거절하니 인상여가 진왕 앞으로 꿇어앉아 협박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왕과 신은 다섯 걸음 안입니다. 신의 피를 대왕께 끼얹을 수도 있습니다." ‘끝내 거절하면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진왕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진왕 좌우의 신하들이 인상여를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그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모두 질려서 물러났다. 진왕은 마지못해 질장구를 한번 쳤다. 그러자 인상여는 조나라 어사를 불러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을 위하여 질장구를 치다’ 라고 쓰게 하였다. 진왕은 인상여 때문에 끝내 조나라를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조왕은 회견을 마치고 귀국하자 인상여를 모든 벼슬아치의 가장 위가 되는 상경에 임명하였다. 재상 인상여와 염파장군의 문경지교(刎頸之交) 염파장군은 제나라를 쳐서 이긴 공으로 조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재상 인상여가 염파장군의 윗자리에 있었으므로 염파는 그를 몹시 마땅치 않게 여겼다. "나는 이 나라의 장군으로 적의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은 큰 공이 있지만 저까짓 인상여야 가만히 앉아서 구변으로 만 한몫을 보면서도 지위는 오히려 나보다 위에 있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는 미천한 출신인데 내가 제 아랫자리에 있다니? 내 거리에서 만나면 단단히 창피를 주리라!" 재상 인상여는 염파장군을 피해 다녔다. 인상여의 하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인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염파장군의 위엄을 진왕과 비교하면 어떠하냐?" "그야 물론 진왕만은 못합니다." "그것 봐라, 나는 그런 진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꾸짖어 감히 우리 조왕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고 그 신하들을 떨게 하였던 사람이다. 그렇거늘 내가 아무리 못난 사람이기로서니 어찌 한낱 염파장군을 두려워하여 그를 피하겠느냐? 생각해봐라,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감히 침입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속담에도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한 마리는 죽고 다른 한 마리는 상처를 입는다는데 내가 염파장군을 피하는 것은 나랏일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장군은 옷을 벗어 어깨를 들어내고 가시 회초리를 짊어지고 죄인의 모습으로 인상여의 집으로 찾아가서 사과를 하였다. 그 뒤 문경지교(刎頸之交 ; 죽음과 삶을 같이하는 사귐)를 맺었다.
1) 소진 합종설(合從說) ㅇ 진을 제외한 초연제한위조 6국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정책. 소진(蘇秦)이 6국의 정승겸 종약의 장이 되고, 6국이 종약을 서명한 문서를 진에 보내니 이로부터 15년 동안 진나라의 군대는 감히 함곡관 밖을 엿보지 못하였다. 제나라 대부중 소진과 임금의 총애를 다투는 자가 많아 자객이 소진을 죽임. 소진이 임종 시 왕에게 부탁한대로 시체를 車裂하고 반란죄라 하니 자객이 나타났다. 제왕은 자객을 사형에 처하다. 2) 장의 연형설(連衡說) ㅇ 장의는 소진과 귀곡선생에게 사사함. 초나라 정승이 구슬을 잃고 장의를 의심하여 곤장 수백 대를 쳤다. 장의는 “내 혀가 있는지 보라, 혀만 있으면 됐다.”고 하였다. 장의가 소진을 만나러 오자 소진은 박대하고 뒤로 도와주니, 진으로 가서 정승이 되었다. 긴 연형론 여정 마치고 돌아오자 진에서는 혜왕이 죽고 무왕 즉위(장의를 좋아하지 않음. 위로 가서 정승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죽음. 천명을 보존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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