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와 구인문학
나의 이력을 살피건대, 이렇다하게 내세울 게 없는 가운데
그래도 뜻있고 보람된 일의 하나를 꼽는다면 방송대에 입학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대학을 가지 못한 원인을 따지자면, 전적으로 학업을 소홀히 하고 의지가 약했던
내 탓이라 누구를 원망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아쉬움과 미련은 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런 나에게 늦게나마 대학을 다니게
해 준 곳이 바로 방송대이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방송대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공식 약칭인데 방통대나 통신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주로 방송과 통신 시스템에 의하여 원격으로 이루지는 수업 방식 때문에 교명을 간략히 부르다보니 여러 가지 명칭이 통용되는 것 같다.
1972년 2월 처음 설립 당시의 방송대는 현재의 독립된 학사 과정이 아닌 서울대학교 부설의 초급대학 과정으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생교육기관인 방송대의 개교는 경제․지리․연령 등의 요인으로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던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고등 교육의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 그리하여 국민 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에 이바지해 왔다고 하겠다.
개개인으로 보면 방송대를 계기로 자기계발은 물론 자신들의 운명을 바꾼 예도 많이 볼 수 있다. 학벌 때문에, 대학 졸업장이 없어 가로 막혀있던 제약 요인이 해소됨으로써 자신들의 꿈이나 뜻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방송대를 통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얻었다. 새로운 학문과 지식은 공무원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업무의 질을 한 단계 높여 주었다.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 군인, 교사, 사업가, 주부 등 각계각층에서 일하는 분들과 동문수학하며 다져진 동창으로서의 인연과 인적 네트워크는 평생을 통해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특히 직장과 가정을 가진 만학도들이 1인 3역을 감내하며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의 행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답을 배웠다. 후일 대학원에서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방송대를 빼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 동인지 ‘길’을 만들게 된 것 또한 방송대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결성한 구인문학회 활동의 결과이다. 졸업 후 동문회 운영을 함께 했던 아홉 명이 문학이라는 공동 관심사를 가지고 다시 모인 것이 이름 하여 구인문학회이다. 일찍이 수필 문단에 등단하신 이복수 박사님의 열정에 힘입어 아홉 명의 회원 중 일곱 명이 수필과 시로 등단하여 틈틈이 작품을 쓰며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늦깎이 문학이지만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방송대가 아니었으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렵지만 지금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데 이론이 없겠다.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과 이루어진 소중한 인간관계가 그렇고, 무엇보다 오랜 소망이었는데 접근하지 못하던 문학이라는 영역에 발을 디딘 것도 모두가 방송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제 ‘길’이라는 동인지의 발간에 이르러 회고해 보니 방송대와 함께 했던 날들은 비록 만학의 고단한 몸을 채찍하며 인내했던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보람과 성취의 여정이었으며,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힘의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일봉 청파 이복수 회장님, 이봉 하평 정춘기 님, 사봉 월곡 안재학 님, 오봉 경사 허남석 님, 육봉 월보 이영수 님,
칠봉 세라 김춘화 님, 팔봉 초엽 박화선 님, 구봉 지원 황혜숙 님과 ‘구인문학’ 창간의 기쁨을 나누며 우리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수필로, 시로 구인문학과 오래도록 함께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구인문학 ‘길’ 창간에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