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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
만나봅시다
“태안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 어떻게 되어가나요
채길순_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명예교수
태안 백화산 아래에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건립됩니다.
그동안 기념관 건립을 위해 헌신해온
문영식(文英植, 태안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소설가 채길순이 만났습니다./ 편집실
올 여름은 유난했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스러운 중에
기나긴 장마, 별난 이름을 가진 태풍 세 개가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필자가 비바람을 뚫고 태안으로 들어서자
비에 젖은 태안 읍내는 꿋꿋하고 깨끗해 보였습니다.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문영식 회장의 모습도 해맑았습니다.
답사 중에 여러 차례, 최근에는
올 11월 6일에 치러지는 학술대회를 상의해온 터라
친숙한 만남이었습니다.
현재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동학농민혁명 태안군기념사업회 부회장,
전국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이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
충남정신운동 태안군 협의회 사무국장,
태안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등
여러 직함을 가진 만큼 하는 일도 많습니다.
•• 현재, 태안 동학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 중
채길순(이하 채) : 늦었지만,
태안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사업이 결정될 때까지
몇 차례 고배를 마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문영식(이하 문) : 감사합니다. 몇 해 고생 했지요.
그렇다고 제가 축하받을 일인가요?
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이뤄진 일이지요.
채 : 현재 공사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나요?
문 : 지하 1층, 지상 2층 공사 중
현재 1층 골조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요.
채 : 애초에 문 회장님께서 계획하신대로 되어가나요?
문 : 솔직히, 처음에는 규모가 작아서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작지만
알차게 꾸미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시설에 대해 조언 좀 많이 해 주세요
••태안에 동학이 포교된 것은 1990년 초
채 : 태안지역 동학농민혁명사에 관해서는
문 회장님께서 잘 알고 계시시는데,
태안에 동학이 유입된 과정부터 말씀해 주세요.
동학 유족이니 가문을 중심으로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문 : 태안 지역의 동학은
장현리 최형순(崔亨淳)이 1890년 무렵
최시형으로부터 동학을 전수 받아
태안 서산 지역에 포덕 했다고 알려졌어요.
그렇지만 최형순 대접주는
애석하게도 1892년에 갑자기 병사하셨어요.
이듬해인 1893년에 예산의 박희인
(=朴熙寅, 일명 박덕칠)이 옹기장수로 변장하여
포지리에 들어와 장성국 윤세원을 포덕하고
방갈리로 건너가
조운삼 문장준 문장로 문구석 조석헌 등
뒷날 걸출한 동학 지도자들을 입도시켜
동학이 들불처럼 번져갔어요.
•• 태안과 청일전쟁,
이원면 숨은개에 청군 주둔지와 ‘뙤놈 총(塚)’
채 : 1894년 태안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문 : 1892년에
교조신원운동으로 전개된 공주취회•삼례취회,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보은취회에
태안 동학교도도 참여했어요.
1894년 정월 고부민란에 이어
3월 백산기포로 시작되어 전주성을 함락할 무렵,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집강소 설치를 조건으로 관과 동학지도자 간에
전주화약을 맺게 되지요.
청일 전쟁이 풍도해전으로 시작되었는데,
태안 앞바다에 포격을 받은
청군함 제원호(濟遠號)가 침몰했고,
살아남은 청군이 이원면 관리 숨은개에 상륙했어요.
채 : 그렇다면 태안과 청일전쟁이 관련이 있군요?
문 : 청일전쟁은 풍도해전으로 비롯되었는데,
7월 25일 일본의 제일유격대 사령관
쓰보이(坪井航三) 소장이 3척의 순양함이
청나라 군함을 선제공격하여 침몰시켰어요.
일본군은 바다에 빠진 청군은 익사하도록 방치하고
영국 선원들만 구조했어요.
살아남은 청군이 숨은개에 상륙하자
태안군수가 막사를 마련해 줘서 주둔했어요.
청군이 파도에 떠밀려온 수십 구의
청군의 시신을 모아서 묻은 ‘뙤놈 총(塚)’이
피구지(避拘地)에 남아 있어요.
숨은개에서 3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침몰한 제원호가 해방 후까지도 남아있었어요.
이 사료는 이원면 포지리 향토사학자 이필상 씨가
현장 답사를 통해 상세하게 조사한 내용입니다.
채 : 저는 처음 들었는데, 2차 봉기 전
태안 동학농민혁명사에 속하는 귀중한 사료군요.
태안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계속 들려주세요.
•• 태안 서산 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군,
당진 예산으로 이동하여 승전곡 전투와
관작전투에서 연승했으나
홍주성에서 패한 뒤 기세 꺾여
문 : 1894년, 9월 18 재기포 시기에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되자
태안 군수 신백희와 순무사 이경제가
동학두령 21인을 옥에 가둬 처형을 앞두게 됩니다.
이에 방갈리에서 기포한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10월 1일 태안성으로 쳐들어가 동학두령을 구출하고
군수와 순무사를 처단합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농민군은
여미평으로 진을 옮겨 승전곡 전투를 치르고,
목소리 전투, 관작리 전투에서 연승하고
기세를 몰아 홍주성으로 진격합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이 주둔한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서 해미성 전투, 매현 전투,
토성산 전투를 치르지만 홍주성 전투 뒤부터는
거의 학살과 같은 참패를 거듭했어요.
처형지는 백화산 아래 교장바위를 중심으로
태안 곳곳에서 자행되었어요.
채 : 내포지역 동학농민군희생자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개해 주세요.
문 : 승리한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은
그래도 예를 갖춰 정성스레 묻었겠지만,
홍주성 전투같이 패한 전투에서는
시체 수습은 물론 살아서 도피하기도 바빴을 겁니다.
현재 파악한 동학농민군 희생자는
홍주성 전투 76명,
백화산에서 교장바위에서 89명,
매현(화수리) 전투에서, 토성산 전투에서 74명,
사창3리 목네미샘, 관1리 통개에서
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 되었어요.
•• 동학농민군 후손으로
백화산 아래 처형지에 기념관 건립 성사
채 : 기념관 건립 장소는 어디에요?
문 : 백화산 아래(성안1길 28-23, 남문리 380-3)에,
예산 77억 6,000만원 공사에요.
마을 사람들에게는 빨래터였고,
목욕도 하고 놀던 친숙한 백화산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느 날
“갑오년에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백화산(白華山) 교장(絞杖)바위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하여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목 졸라 죽였으며, 바위가 피로 얼룩지고
시체와 팔 다리가 나뒹굴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교장(絞杖)바위가
교살(絞殺)바위였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왜 그런 말씀을 했을까, 당시는 몰랐어요.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 무서워서
‘악몽’에 시달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절대로 그 비극을 잊지 말라고 들려주신 거였지요.
채 : 그 역사의 장소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결국 아버지의 뜻도 이뤄진 셈이네요.
문 : 그렇군요.
•• 아버지 문원덕,
평생 포교활동과 동학 선양사업에 헌신
채 : 부친께서는 어떤 사람이에요?
문 : 제가 어려서는 아버지가 하시던 일은
서울 낙원동 시장 근처에서 예식장을 운영 했어요.
그래서 귀한 종이 상자에 든
카스테라를 많이 먹었어요,
그 시대는 카스테라가 답례품 이었어요.
그러다 아버지는 제가 여섯 살 때에
할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태안으로 이사를 했어요.
태안군 소원면 소근만 바다를 막는
개간사업을 하셨는데,
도중에 둑이 터져 바닷물이 들어오면
크게 낙담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일하는 분들 인건비는
서울에서 미군 차로 옥수수가루, 우유가루를
포대를 싣고 내려와 나눠줬어요,
한때는 학암포 해수욕장을 개발하여
개장 행사 때
나와 언니가 축하 노래를 불렀던 기억도 나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 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밥과 술을 대접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술심부름은 제가 도맡아서 했어요.
그때부터 술심부름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 온 거예요,
그런데 그 많은 손님들이 동학농민혁명 때 돌아가신
선열들의 유가족들이었어요,
‘순국자 명단’을 만드는 과정이었던 사실을
세월이 지나고 철이 들어서 알았어요,
그러니까 홍주성 전투에 돌아가신 분들 명단,
해미성 전투에서, 토성산 전투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단을 기록하셨어요.
그것도 전사 총살 교수형 화형(火刑) 작두참형 등을
구별해서 기록하셨어요.
채 : 제가 답사 중에 들었던 기억 중에
“작두 참형 중에 목에 술지게미가 걸려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작두 참형은
전국에서 태안이 거의 유일할 거예요.
문 : 맞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작두형을 들어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태안은 특별한 곳 이였던 것 같아요.
그 작두가 지금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 되어 있어요.
채 : 기념관이 완공되면 옮겨와야 맞겠군요.
부친 문원덕 천도교 선도사를 계속 소개해 주세요.
문 : 동학농민군의 후손으로
평생을 내포 동학 포덕 활동에 헌신해 오신 분입니다.
당진 합덕 천도교 교단을 조직하셨어요.
포교 사업에 이어
동학농민군 선양 사업에 헌신해 오신 분입니다.
한때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원북 방갈리에서 야학도 열었어요.
그때 공부했던 분들이
지금 살아계셔서 이야기들 하시곤 해요.
1978년 백화산 아래
동학농민혁명추모탑을 세우시고 나서
원북 방갈리 기포비를 건립하고자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놓고 마음먹은 대로
추진이 안 되자 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게 되자
제가 친정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어요.
형제들은 다른 도시에 살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수발하고 모시게 됐어요.
소 대변 받아내고, 목욕시키는 일이 제일 힘들었어요.
채 : 아! 그랬군요.
추모탑 건립 과정에 대해 좀 더 들려주세요.
문 : 아버지는 순도 순국자 명부를 작성하면서
항상 선열들의 추모탑을
태안여자고등학교 뒷산에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어요.
“태안여고 옆 개고랑에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골을 매몰 한 곳이어서
꼭 이곳에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실행을 못 하시고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세웠지요.
내포지역을 두루 찾아다니며
추모탑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헌금(獻金) 헌물(獻物)을 약조 받아 오셨어요.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추모탑은
전국에서 최초로 민간사업으로 이뤄진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면
우리 남매가 돌아가면서
피곤한 다리를 주물러드리곤 했어요.
한번 주물러 주면 1원 씩 주기로 했는데
돈을 못 주시는 일이 많았으니 아버지는
우리 남매에게 빚을 많이 지고 사신 셈이에요.
건립비는 주로 겉보리 겉벼 콩 몇 되를 받아왔는데,
심부름은 언니와 내가 도맡아 머리로 이어 날랐어요.
아버지는 약도를 일일이 그려주시면서
어느 집에 보리 몇 되, 나락 몇 되를 받아오라고
종이에 기록을 해서 주셨지요.
머리에 이고 오다 날이 저물면 누구네 집에서 자라,
그 다음날 오는 길에 어느 집에 들러
곡식 얼마를 받아오라고 적어주셨으니
치밀한 분이셨어요.
언니와 내 키가 작은 것은
그때 머리에 무겁게 이어 나르는 심부름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농담까지 했을 정도에요.
채 : 언제 돌아가셨어요?
문 : 10여 년 간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1986년 71세에 세상 뜨셨어요.
아버지 병수발을 제가 도맡았어요.
채 : 혼자서요? 형제가 어떻게 되는데요?
문 : 우리는 5남 5녀, 10남매입니다.
오빠 셋이 있고, 언니 넷,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어요.
모두 다른 도시에 살았어요.
그러다보니 아버지 병수발이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 모두 제 몫이 되었어요.
채 : 문 회장님께서는 불만이 없으셨던가요?
문 : 없었어요.
평소에 아버지는 저를 귀여워하고 인정해 주셨어요.
저는 아버지의 소장품을 모두 소중하게 여겼고,
그러다보니 자연 아버지가 하시던
동학선양 사업이 고스란히 내 몫이 된 듯해요.
채 : 부친께서는 왜 하필 10남매 중
일곱 번째인 문영식을 택하셨을까요?
아버지의 유업을 잇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었나요?
문 : 따로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이어받았어요.
주위 사람들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끈질기게
동학 선양 사업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말해요.
남자들이라면 생업에 바쁠 수도 있겠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서,
혹은 지쳐서 먼저 나가떨어졌을 거라고 해요.
동학 유업이 숙명이라고
말해 말해주는 분들도 많아요.
•• 역사는 정치 문제와 별개로 보존되어야
채 :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인데,
어떤 어려운 일들이 있었는지 소개해 주세요.
문 :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지
이미 126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동학의 숭고한 혁명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보수 세력과 몰지각한 사람들은
반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참 한심한 일입니다.
해마다 열리는 백화산 추령식만 해도 그렇지요.
수시로 바뀌는 단체장이
이 행사를 어떻게 수용했겠어요?
그래서 역사는 정치 문제와 별개로
해석되고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 이번 가세로 군수님께서는
취임식 날 아침에 동학농민혁명추모탑에 참배를 하고
취임식장에 참석 하셨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은 전국에서 4번 째
채 : 제가 문영식 회장님을 처음 만난 때가
1990년대 초 태안 지역 답사를 왔을 때부터입니다.
문 회장님께서는 꽤 오래 전부터
태안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를 이끌어오셨습니다.
추모행사를 넘어 태안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신 동기나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문 :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백화산 아래에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을 세우신 것처럼,
백화산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로 승격시키고,
역사 광장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서 바자회를 개최하여 자금도 마련했어요.
저도 아버지처럼 자금 조성에 나서기도 했었어요.
주위 사람들로부터 하는 일이
아버지를 너무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채 : 결국,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조성이 성사 되었네요.
문 : 그랬지요. 전주역사박물관 우윤 관장을 만나면서
우리 태안에도
역사박물관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이 섰지요.
그 뒤로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전주역사박물관, 정읍황토현 박물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등을 두루 다니면서
희망을 키웠지요. 그렇게 되자
천안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태안 동학농민군을 참살할 때 쓴 작두’가
가슴 아프게 와 닿는 거예요.
앞으로 작두도
꼭 찾아와야지 하는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채 :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내포 동학농민혁명사를 드러낼
차별성 있는 기념관
채 : 지금 회장님께서
내포 동학농민군 활동을 드러낼 유물이란 뭐지요?
문 : 대략, 『동경대전』, 『용담유사』, 『조석헌 역사』,
『문장준 역사』, 『봉생활궁을가(逢生活弓乙歌)』,
『답도가(答道歌)』를 비롯하여
아버지가 남겨놓으신 교단 활동 기록이 많아요.
이것이 내포의 동학농민혁명사이고,
동학 천도교사인 셈이에요.
제가 소장한 유물을 충남역사박물관에 보여줬더니
모두 귀중한 자료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기증하라는 권유받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채 : 아마 태안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건립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일 겁니다.
문 :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념사업을 진행하면서
당장 기념관 건립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머지않아 때가 되면 이뤄질 것으로 여겼어요.
채 : 문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태안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의 특색은 뭐에요?
문 : 처음에는 기념관 규모가 작아서 불만이었지만
내용을 잘 꾸미는 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특히 일반인보다 학생, 어린이 중심의 교육관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린이들에게 나라 사랑을 심어줄,
가슴으로 느낄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야겠지요.
채 :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문 : 1987, 88년도에
제가 등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어요.
역사를 어린이용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교육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백일장을 치렀던 경험을 살려서
동학농민혁명사에
지속인 관심을 가지도록 할 계획입니다.
채 : 2020년 11월 6일에 태안에서
“2020년, 동학농민혁명 제126주년기념
학술대회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
「동학농민혁명과 충청도 태안」” 학술대회가 열립니다.
학술대회에 거는 기대가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문 : 태안 동학농민혁명사를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텔링이 나오고, 전시실을
적절한 문화콘텐츠로 채우고, 홍주 의사 총이
동학농민군총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일 등 많습니다.
동학농민군 전사자 288명이 나와 있으니
의사 총이 아니라 동학농민군총이 사실입니다.
채 : 문 회장임의 열의가 대단하시니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되겠지요.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