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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일어나 지금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 지어
아홉 이랑 콩밭 일구어, 꿀벌 치면서
벌들 잉잉 우는 숲에 나 홀로 살리
거기 평화 깃들어, 고요히 날개 펴고
귀뚜라미 우는 아침 놀 타고 평화는 오리
밤중조차 환하고, 낮엔 보랏빛 어리는 곳
저녁에는 방울새 날개 소리 들리는 거기
일어나 지금 가리, 밤에나 또 낮에나
호수물 찰랑이는 그윽한 소리 듣노라
맨길에서도, 회색 포장길에 선 동안에도
가슴에 사무치는 물결 소리 듣노라
The Lake Isle of Innisfree
William Butler Yeats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a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요점 정리
작자 : 예이츠(Yeats)
형식 : 자유시, 서정시, 낭만시
성격 : 낭만적, 의지적, 서정적
율격 : 내재율
어조 : 겸손, 소박, 회상의 어조
특징 : 반복적 이미지의 사용으로 주제 강조(벌들이 잉잉거리는 숲 속,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정겨운 호숫가의 출렁이는 물결소리 등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리드미컬한 리듬과 어울려 마치 서양판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같은 정서를 느끼게 한다.)
심상 : 청각적, 시각적
제재 : 이니스프리의 호수섬
주제 : 이상향에 대한 동경,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삶에 대한 동경(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성
기 : 1연 : 이니스프리를갈망하는 시인, 전원 귀의적 인생관
서 : 2연 : 이니스프리의 평화로운분위기
결 : 3연 : 도시적 삶의 비애와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
출전 : 시집(poems) 1895년 ((이 시는 예이츠가 런던 교외에있는 예술촌인 베드포드 파트(bedford part)에 거주할 당시 쓴 것)
의의 : 신비한 몽환성(夢幻性)과 낭만주의적인 막연한 동경을 노래한 시로서, 윌리엄 예이츠의 초기 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내용 연구
나 일어나 이제 가리 : 누가복음 15장 18절을 인용하여 시가 보편적인 문체를 띠도록 좀더 보편적인 문체를띠도록 관습적인 고어체를 서두에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찌든 도시의각박함을 박차고 탈출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묘사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의고향이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보편적인 욕구가 있게 마련이고, 한 집단이나 공동체도 그 나름의 원형적 공간이 있다. 예컨대 성서에묘사된 에덴 동산, 동양의 고전에 묘사된 무릉도원이나 요순 시대는그것 자체가 하나의 정신적 고향이자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니스프리 : 시인의 고향인 아일랜드 슬라이고근처의 로크길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 시인자신이 동경하고 있는 고향의 전원 생활이 소박한 꿈임을 말하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유사하고 동양적 귀의관이 엿보임
외 : 흙을 바르려고 벽 속에 엮는가느다란 나뭇가지나 수숫대
아홉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 자연에 묻혀 사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고, 동양적인 전원 귀의의 인생관이 엿보임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과 시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 주변의 아늑한 정경과 어울려 마음의 안식이 서서히 찾아드는 것을 말한다.
아침의 베일로부터 ~ 이르기까지 : 어둠을열고 밝아오는 아침에서부터 어둠이 내려 귀뚜라미 우는 그 밤에 이르기까지. 안개 피는 아침의 모습에서 귀뚜라미 우는 저녁까지 전원에 펼쳐진 평화로운 세계를 보여 준다.
홍방울새 : 참새과에 속하는 새로 동반구의 북부에서 번식하고 그 이남에서 월동(越冬)함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 마가복음 5장 5절 참조
한길 위에 ~ 있을 때나 : 회색은 어두움, 우울함을, 포도는 자연과 동떨어진 인공을 각각 뜻한다. 우울한 도시 생활을 가리킴
밤이나 낮이나 -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 2연의 호수섬의 평화로운 모습을 3연에서는 다른 시어를 통하여 재생하고 있다.
내 마음 ~ 소리 들리네 : 호수섬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동경의 심정을 표현함
이해와 감상
아일랜드 출신인 시인이 런던에 거주할 당시, 고향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로, 당시 상황으로 보면, 자신의 조국을 그리워하는 시로도 볼 수 있다.
'회색포도로 상징되는 대도시의 혼탁함과 답답함의 이미지와 달리 시인이 꿈꾸는 전원 풍경의 아릉다운 그림을 독자가 상상할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시인의 마음 속에 동경하고 있는 이상향으로서의이니스프리 호수섬의 정경이 잘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이니스프리호수섬의 아름다운 정경을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인 이미지를 동원하여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도회의 삭막함과도 대조함으로써, 그곳을간절하게 동경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니스프리는 시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호수속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 곳은 히스(heather) 꽃이 보라빛으로 피어나고 한낮에 햇빛을 받아 이 꽃들이 호숫가에 비침으로써 아름다움을 자아내는섬으로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낭만적 꿈에 부푼 20대 후반, 시인은 런던의 거리를 걸으면서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도시의 번잡을 피해 전원의 한가로움과 평화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잠긴다. 오두막 근처에서잉잉거리는 벌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등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가느릿한 리듬과 어울려 서양판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전원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 곳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겠다는 시 세계는 우리의 시적 전통에서도 흔히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전원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 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다.
심화 자료
이니스프리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시인의고향인 아일랜드의 솔라이고우지방의 관광 명소로 나무만이 우거진 손바닥만한 섬으로 호수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1890년에 창작하여 1892년에 《The Countess Kathleen and Various Legends and Lyrics》에 발표된시이다. 신비한 몽환성(夢幻性)과 낭만주의적인 막연한 동경을 노래한시로서, 윌리엄 예이츠의 초기 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아름다운서정시이다.
20대에 다시 고향을 떠나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평화로운 전원으로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망향의 시이다. 시제인 이니스프리는슬라이고(Sligo) 근처에 있는 호수 속의 작은 섬이다. 이 시에는 이니스프리라는이상향을 꿈꾸는 시인의 심리 상태가 잘 드러나 있어, 고향인 아일랜드의슬라이고 지방의 경치가 시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벌들이 잉잉거리는 숲 속,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정겨운 호숫가의 출렁이는 물결소리 등 전원적이고평화로운 이미지가 리드미컬한 리듬과 어울려 마치 서양판 《귀거래사(歸去來辭)》와같은 정서를 느끼게 한다.
시인이며 극작가인 윌리엄예이츠는 더블린 교외인 샌디마운틴에서 출생했고, 아일랜드 지방의전설을 바탕으로 쓴 《오이진의 방랑기》(1889)로 시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891년에는 아일랜드 문예협회를 창립하여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지도자로활동했다.
극작가로서는 환상적이며시적인 《캐서린 백작부인》(1899년 초연)을 비롯하여 시극 《어두운바다》《여왕이 된 배우》《고양이와 달》 등이 있다. 시인으로서는낭만적 서정 시인으로서 《마이켈 로버츠와 무희》(1921) 《탑》(1928) 《갈대 밭의 바람》《나선 계단》 등의 시집이 있다. 1923년에 노벨문학상을받았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음악- The Isle Of Innisfree by The Dublin City Ramblers
예이츠
1865. 6. 13 더블린 샌디마운트~1939. 1. 28 프랑스 로크브륀캅 마르탱.
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로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립되는 전통의 계승
예이츠의 아버지존 버틀러 예이츠는 변호사였지만 나중에 초상화 화가가 되었다. 처녀시절이름이 수잔 폴렉스펜인 어머니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의 부유한 상인의딸이었다. 사람들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압도적인 로마 가톨릭교도사이에서 강력한 소수를 대표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이어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런던에서학교에 다닐 때도 아일랜드의 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을 이방인으로느낄 정도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2가지 역사적 전통에서 분리된 채 있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도들과는 신앙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은 '출세만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이츠는 조너선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올리버 골드 스미스, 조지 버클리 같은 유명한 영국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18세기의 찬란한 프로테스탄트앵글로아일랜드 전통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쇠퇴해가고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부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시대는가톨릭 전통에 유리하며 영어보다 게일어로 표현되는 시대였다. 예이츠는자신의 엄격한 예술적 취향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 운동을 지지했지만아일랜드가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을 주창하는 애국단체에서의그의 행동은 자주 애매한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두 아일랜드 사회 중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의 입장을 주목할 만큼 애매한자신의 고국의 입장과 관련지어 명백하게 밝혀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희망은 가톨릭전통이나 프로테스탄트 전통보다 더욱 깊은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었는데그 전통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더 이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아직까지 남아있는 관습·신앙·성지 같은 인류학적 증거 속에서 널리찾아볼 수 있는 숨겨진 아일랜드의 전통이다. 1886년부터 발표된 예이츠의많은 수필과 평론들은 시기가 적당했으므로 진정한 아일랜드를 알려야겠다는시도였다.
1867년 예이츠가불과 2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더블린에서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받기를 희망했다. 1880년 가족은 다시더블린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휴일에는 슬라이고에있는 외삼촌 조지 폴렉스펜과 함께 지냈는데 이 슬라이고는 많은 시의배경이 되었다. 1883년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다녔으며이곳에서 받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시인과 예술가들을 만난것이었다.
탐미주의자·신비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의 예이츠
그동안 예이츠는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秘術)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협회의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 신지학(神智學)협회'에가입했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혜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 세계에서 멀리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았다. 반면 과학의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예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모험은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스베덴보리 신학, 연금술 등의 다른 신비주의 전통과 접촉하는 것으로발전했다. 예이츠는 이미 자긍심이 강한 젊은이였고 이런 자존심 때문에자신의 취향과 예술 감각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아니었지만 정신적 오만함이 잘 드러나곤 했다. 〈오이신의 방랑기 외(外)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곤을 만났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예이츠는 그녀를 사랑하게되었으나 그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몸으로 몸소 구사하는 반항자이며웅변가였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는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시절아일랜드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은 모드를 향한 속삭임이었다. 1902년더블린에서 희곡 〈캐슬린 니 훌리안 Cathleen ni Houlihan〉이 초연되었는데, 모드가 캐서린 역을 맡았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예술·시·희곡·전설이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켈트의 여명 The Celtic Twilight〉(1893)은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지만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서부 아일랜드 지방의 민간전승인옛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 전승 지식이 고대 의식및 자신의 감정과 그리스도교가 완전하게 파괴하지 못한 이교도 신앙에대한 자신의 느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민간전승이농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몰두하여 연구하면 사람들과의명백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엄격하고 고매한 문체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상을 정치에적용하면 농부와 귀족을 연결시키는 것인데, 즉 경험은 농부의 것, 문체는귀족적인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결은 도시와부의 산물인 미움받는 중산층을 비난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질적인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도덕적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1897년부터 예이츠는카운티 골웨이의 쿨파크에 있는 그레고리 부인 집에서 여름을 보냈고쿨파크를 사라져가는 우아함의 세계와 결부시켰다. 그 공원이 농부들로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 시각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1899년 예이츠는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소령과 결혼했다. 그는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죄로사형당한 항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그런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당시는 논쟁이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현대의시민들,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등은 모두 예이츠가 영웅적 가치관에호소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점차 중산층의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애비 극장도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애비 극장에서 상연된 많은 연극들이 그의 눈에는 천박하고 통속적인것으로 보였다. 예이츠는 대중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연극으로 마음을 돌렸다. 1913년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비서로일하며 서식스 주에 있는 스톤카티지에서 그와 몇 개월을 보냈다. 파운드는그당시 일본의 고전극인 노[能]의 번역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고 예이츠는그 극으로 인해 큰 자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극들은 대중보다 조신들을기준으로 한 귀족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노극에해당되는 대응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극들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무희를위한 4개 극 Four Plays for Dancers〉(1921)으로 극장에서뿐만 아니라응접실에서도 상연될 수 있는 일련의 짧고 형식적인 극이었다. 예이츠는이러한 연극들을 새로운 종류의 연극, 즉 말·가면·춤·음악, 모방이 아니라 상징적인 동작의 조화로 생각했다. 그 연극들은 상류사람들, 즉 그런 형태의 장점을 즐기는 소수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것이다. 1916년 초연된 〈매의 우물에서 At the Hawk's Well〉는 그가믿어왔던 많은 가치관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돈과 대중을 위한 부르주아극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이 일으킨 동정과 공포보다는 '신경질적인 흥분'의장소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은 관객들을잠시 동안이나마 '지금까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었던마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은아일랜드 생활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13년휴 레인 경이 수집한 39점의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 처리문제에 대해벌어졌던 분쟁은 예이츠의 눈에는 사악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보였다. 레인은 그 그림들을 더블린 시립현대미술관이 한 화랑을 마련해그것들을 전시한다는 조건 아래 기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되지 않자 레인은 화가 나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빌려주었고, 1915년그가 죽자 두 미술관이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913년 예이츠는이 논쟁에 개입했다. 왜냐하면 레인의 훌륭한 행동이자 귀족적 조치가한 비천한 더블린인에 의해 능멸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이츠의 〈책임 Responsibilities〉(1914)에 실린 많은 시들은 레인 논쟁에 의해고취된 작품으로 매우 통렬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예이츠와 아일랜드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07년 그레고리 부인과함께 피렌체·밀라노·우르비노·페라라·라벤나등지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내는 귀족적 우아함의증거를 결코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1913년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즉 예의와 정중함을 존중하던 완전히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갈망이그의 작품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숙한시인이며 상원의원
1917년 예이츠는모드 곤의 딸 이졸트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주 뒤 조지하이드 리스에게 청혼해 1917년 결혼했다. 1919년 딸 앤이 태어났고 1921년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어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의 새 일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수락했고 6년간봉사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는 유명한 인물이 되어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쏠려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한 위대한 책, 즉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결과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간 계속적으로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한편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더해가고 있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일생의경험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뒤에 씌어진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로나왔다.
예이츠는 60대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세계는 산산 조각나는 것 같았고, 예이츠는그것을 혐오했지만 자주 세상의 몰락에 매혹되기도 했다. 귀족적 스타일에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존중해온 가치관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며 예이츠는그 가치들이 위대한 인물, 즉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구출될 수 있다고상상했다. 예이츠는 활력과 독재주의적인 명쾌함 때문에 이탈리아의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관하여 On the Boiler〉(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토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권력을 갈망하며 그 권력을 갖게되면 폭력적으로 사용하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는시인의 분노였고 삶에 대해 갖고 있던 시각은 시인의 시각이었다. 그는단지 도덕의 힘, 즉 어떤 위대한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원했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보호, 아일랜드의 국제연합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의장이기도 했다.
예이츠의 말년은긴장의 연속이었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겨울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폭력이끝내 전쟁을 몰고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편으로는 그 전망에 두려워하면서다른 한편으로는 매혹되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군대의행진소리가 사랑·예술·미·예의범절의 주제들의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 예이츠의 삶의 감각은계시적인 것이었다. 가끔 그는 두려워 그 계시로부터 도망치기도 했으나또 어떤 때는 그 계시에 동조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Book of Modern Verse 1892~ 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후 1년도 채 되지 않아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D. Donoghu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예이츠의시 세계
예이츠 시들은 1900년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의시들로 분류할 수 있다. 전기에 해당하는 1900년도의 이전의 시들은주로 과거의 아일랜드 영웅들과 기타 전설적 인물들에 관한 것들이 많았는데, 예이츠는 그의 시에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성격을 띤 요정들과 영웅들을등장시켰다. 후기에 해당하는 1900년 이후로는 고령이 된 자신의 처지나혹은 정치적 사건들을 다루는 사실적 경향의 시들을 주로 썼다. 예전의낭만적 운율은 명백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일상어의 낱말과 문장으로대치되었다. 그리고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씌어진 시들을 통해서 그가선과 악의 문제, 육체적 욕망을 이겨 낸 정신의 승리 등에 대해 고심했었음을알 수 있다.
예이츠의신비 사상
예이츠의 초기의 사상과 시에는 신비적 요소가잘 나타난다. 켈트 민족 특유의 신비적 환상 세계는 어린 시절의 예이츠의중요한 생활 환경이어서 그는 아일랜드의 신화, 전설 등에 익숙해 있었다. 또한 예이츠는 예언자, 무녀 등을 직접적으로 만나서 그들이 꿈이나환상 속에서 경험한 초자연적 사건들을 듣고 실제로 체험하며 크게 흥미를가졌다. 예이츠에게 있어 신비적 세계는 초자연적 상상의 세계에 그치지않고, 그의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아서 신비 사상과 현실은 그에게 있어일원화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신비 사상은 예이츠의 종교 세계라고까지할 수 있으며, 그는 신앙적 태도로써 신비 사상 속에서 생활하였다.이니스프리호수의 섬
예이츠의초기 시와 후기 시의 차이
예이츠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세상은 현세와완전히 분리된 피안의 요정의 나라나 화원 같은 곳이었지만, 후기 시에서는그것을 정신과 육체가 합일하는 어떤 극치의 순간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것을 관습이나 형식적 예법 같은 귀족적인 전통에서 혹은 예술적황홀의 순간에서 찾았다. 이 조화와 완전의 세계는 그의 후기 시에서춤, 푸른 월계수 등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예이츠의 시에 나타난 상징들은현실적 체험이 허용되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불란서의 작가 보들레르나발레리 등이 사용한 상징들과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초기의 경험으로생각하면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요정들의 세계에 익숙하고 초자연적인세계를 꿈꾸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후기시에 와서초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가했고, 철저한 사실주의적 의식과지적 성실성을 보여준다.
예이츠시의 동양적 신비주의
예이츠의 신비주의는 그의 민족주의와 무관한 것으로보기 쉽지만 아일랜드인의 구세주에 대한 믿음과 혁명의 계시는 어떤절망적인 처지에서도 미래에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민족적힘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예이츠의 시에 등장하는 농부는 전통적이고신비로운 것을 믿는 원시 농경 사회의 농부를 이상화한 것이다. 이러한농부의 이상화는 아일랜드 문학에 있어서 '민중의 전통'과 일치하며, 그는 스스로 전통적인 발라드 형식의 시들을 썼다. 그의 초기 발라드들은자연스럽고 단순성과 활기가 있는 반면에 감상적이고 실제 농부 생활의사실적인 묘사가 결여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초기의 낭만적인 요소는좀더 성숙된 후기시에서는 보다 사실적이며 복잡한 이미지와 상징으로바뀌어져 나타나게 된다. (출처 : 윤삼하. '예이츠의 시세계'에서)
누가복음 15장 11- 32절
잃었던 아들 편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마가복음 5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