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필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
김정희필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인 우선 이상적(1804년~1865년)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조진조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의 글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제자처럼 아끼던 역관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고, 이상적은 청나라에 이를 가지고 가서 추사의 옛친구를 비롯한 명사들의 글을 그림에 이어 붙인 저지에 받은 것이다. 그 후 세한도는 이씨 문중에게서 떠난 후 130여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에게 들어갔다. 세한도는 일제 말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년~1981년)에게 무상으로 기중해서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1786년∼1856년)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 드렸다.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의 따뜻한 뜻과 정에 답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주도 생활 4년째인 1843년에 이상적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槀❯를 북경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준 것이었다.
❮만학집❯의 저자인 계복은 완당이 옹방강, 완원과 교류할 때 익히 알고 그의 학예를 흠모해온 터였다.
운경에 대해서도 완당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절해고도에서 큰 위안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1844)에 이상적은 또 하우경賀藕耕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책을 보내주었다.
이 책은 자그마치 총 120권, 79책이었으니 양으로도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완당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그리하여 완당은 이상적의 변함없는 사제간의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 발문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완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이 천하의 명작을 받은 이상적은,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이 ❮세한도❯를 받고는 감격하여 완당에게 정중하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삼가 ❮세한도❯ 한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가 진실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아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하옵니다.”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닌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구도만으로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예찬의 법이다.
그러나 필치는 완당 특유의 예서 쓰는 법으로 고졸미를 한껏 풍기고 있음에 이 그림의 매력이 있다.
여기에 [세한도]라는 화제畵題 글씨와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는 낙관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이 감격적이다.
완당의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기미가 남아 있는 듯한 이 글씨는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첫댓글 문화재가 국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성, 희소성, 아름다움에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보물은 그 중 2개만 충족하면 됩니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만고에 없던 일로..... 추사는 유배 다니다 세월 다 보냈지만 그 제자들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겠습니다.
김정희 선생은 경주김씨로 본인과 같습니다. 한무제때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것과 김정희가 유배 받은 사연이 비슷합니다. 사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갈 이유는 부족한데 금석학에 관심있던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에 재차 석수를 대동하고 올라가서 순수비 측면에 28자를 읽었다고 낙서를 합니다. 왕에 비석에 낙서를 하면 불경죄에 해당하는데 이후부터 김정희의 삶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만해도 자만심이 가득한 김정희였습니다. 어릴적에 군관자제로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똑똑하다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김정희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영조에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도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같은 경주김씨이고 예산출신으로 정순왕후가 죽자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정치에 김정희의 설자리는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