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11 : 황룡사 9층 목탑의 소실
04.09.25
몽골군의 고려 침략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 중 하나를 꼽으라면 황룡사 9층 목탑의 소실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과연 이 참사는 언제 벌어졌을까?
몽골군의 3차 침략 중 세번째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고려사> 고종 25년 (1238년) 윤 4월조에 "몽골군이 동경(경주)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란 기록이 남아 있고, <삼국유사>에는 황룡사탑의 소실을 1238년 겨울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몽골군의 침갹이 보통 하절기인 6월에서 8월 사이에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즉 1238년 겨울 무렵, 몽골군이 경상도 경주 지역까지 남진해 왔고 그 와중에 황룡사와 목탑이 소실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상 외침을 통해 입은 가장 큰 문화적 손실이었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에 착공하여 569년(진흥왕 30년)에 완성된 신라의 호국사찰이었다. 이 황룡사에는 신라의 호국삼보인 황룡사 장육삼존불상, 황룡사 9층 목탑, 진평왕의 옥대 중 두 가지인 불상과 목탑이 보존되어 있었으니 호국사찰로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황룡사의 장육불상은 황룡사를 완공한 직후인 573년(진흥왕 34년) 경에 조성한 것으로, 구리 35,007근과 황금 10,198분을 들여 만들었다. 좌우 두개의 협시보살을 조성하는 데만도 철 12,000근과 황금 10,136분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이 황룡사와 함께 붙에 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황룡사의 9층 목탑은 645년(선덕왕 14년)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한 목탑이다. 호국의 상징인 이 탑은 철반 이상이 42척(약 15미터), 그 이하가 183척(약 65미터)으로 전체 높이가 무려 80미터나 되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오늘날의 건축기술로도 이런 거대 목조물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데 이것 역시 몽골군의 3차 침략 때 불에 타 없어졌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거대한 목조물이 완전히 재가 되어 타 없어질려면 수십일 동안 계속 불이 꺼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경주는 그동안 대낮처럼 훤하게 밝았으리라.
없어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라 754년(경덕왕 13년)에 주조한 황룡사의 종도 소실되었다. 이 종은 길이가 1장 3촌, 두께는 9촌, 무게는 497,581근으로 봉덕사 종보다 네 배나 큰 것이었다.
황룡사와 9층 목탑의 소실은 신라 천년의 왕도인 경주와 그곳 백성들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경주는 이후 폐허와 같이 변해버렸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황룡사와 목탑의 소실 사건이 강화도의 고려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사신에게 고종의 표문을 주어 급히 몽골로 파견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황룡사의 소실이 고려 조정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골에 올린 표문의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 생각하건대 궁벽하고 누추한 작은 나라가 반드시 큰 나라에 의탁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시운에 응하여 일어난 우리의 성군(몽골의 대칸)께서 관대하게 번국(변방)으로 대해주시니 어찌 정성껏 복종하지 않으리요. (중략) 대개 지난날 기묘, 신묘 두 해의 강화를 맺은 이후 기대고 의지함이 더욱 굳어졌다고 생각하여 온 나라가 기뻐하였던 일은 오직 천지신명이 아실 것입니다. 일은 반드시 성취하기가 어렵고 믿다가도 간혹 의심을 사게 되어 도리어 군부(역시 몽골 대칸)의 견책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어 문책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중략) 이에 메마른 땅의 토산물을 다 긁어 작은 나라의 정성을 바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만 군사의 위협만은 더하지 마시고 옛 풍속을 그대로 지니게 하여주시면, 비록 약소한 해산 방물이나마 해마다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약합니다.
<고려사>23, 고종 25년 12월.
이 표문을 받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1239년 4월의 일이었다. 이것으로 4년간에 걸친 몽골군의 제 3차 침략은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8년후인 1247년 4차 침략이 있기까지 고려는 휴전 기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