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신문 220414> 망우리 이야기-29,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 공동묘지의 역사
우리에게 공동묘지의 개념이 없었다. 그저 동네 뒷산이 묘지였다. 단, 서울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법률(경국대전)로써 도성 밖 십리(城底十里) 내에 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성저십리는 동쪽은 송계원(월릉교 동쪽 위치) 및 대현(금호동), 서쪽은 양화진 및 고양 덕수원(구파발역), 남쪽은 노량진에 이르는 곳이다. 그래서 중랑천 너머로 많은 명문가의 묘가 들어섰고 평산 신씨 가문의 묘는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6월 20일 부령 제123호로써 묘지를 허가제로 하는, 즉 공동묘지 외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을 공포했다. 기존의 선산도 인정하지 않는 내용(1918년 허용)이 포함되어 풍수 중시의 조선인으로서는 반발이 컸지만, 공중위생이나 도시계획의 면에서는 근대적인 제도의 도입이었다.
이에 경성부가 1913년 9월 1일자로 허가한 부내 공동묘지는 미아리, 이문동, 수철리(금호동), 이태원, 여의도, 신사리(은평구) 등 19개소였다.
그 후 20년이 지난 1933년, 이태원, 수철리, 신사리, 홍제내리, 미아리(1,2)의 5개소가 대만원을 이루고 미아리2에 여지가 조금 있는 상태에서, 경성부는 경기도로부터 75만평을 매수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52여만평을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고(동아 33.02.02), 9월 2일부로 면목리 산1번지, 망우리 산57번지, 교문리 84번지의 3리 면적 519,060평의 망우리공동묘지를 정식 허가하였다(동아 33.09.08).
이후, 이태원묘지를 없애면서 많은 분묘가 망우리로 이장되었는데, 경성부는 1936년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2만 8천여기를 화장 후에 망우리로 옮겨 합장묘를 만들고 앞에 합장비를 세웠다. 유관순, 나도향이 이곳에 함께 합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마포 노고산의 묘지도 택지개발로 인해 1938년 무연분묘를 망우리로 이장하고 노고산천골취장비가 세워졌다. 1958년 미아리묘지 폐장시에는 최학송, 박희도 등이 망우리로 이장되었다.
망우리묘지는 시내가 가깝고, 경관이 뛰어난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묘지 중에 인기가 가장 높았다. 묘가 계속 급격히 늘어나 약 4만 7천기가 된 1973년 3월 25일 폐장되었다. 묘하게도 1933년부터 40년간의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가 액자처럼 보존된 상태가 되었다.
한식이나 추석 때마다 망우리는 단골 뉴스거리가 되었다. 기사를 살펴보면 1969년 추석 때의 30만 명이 최다였던 것 같다. 많은 일화도 생겼다. 초기에는 비석 없는 묘가 많고 풍경도 엇비슷하여, 오랜만에 찾아온 유족이 부모 묘를 찾지 못해 관리사무소에서 울면서 하소연하고, 어느 사람들은 자기 부모님 묘라고 서로 싸우기도 하였다. 남의 묘의 떼를 훔쳐서 파는 악질 장사꾼, 갓 만들어진 묘를 몰래 파헤쳐 값나가는 물건을 훔치는 도둑도 있었다. 한식날에는 묘지 입구에‘떼’를 파는 지게 짐이 늘어섰고, 소년 소녀가 국화를 서로 먼저 팔려고 뛰어다녔다. 필자도 대학 1학년의 한식날 친구의 꽃 장사를 도왔지만 수익이 없어 자장면 한 그릇만 얻어먹었다. 자동차가 늘어나자 청량리부터 망우리까지 두세 시간이 걸렸고, 짐칸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청량리와 망우리를 왕복하는 트럭도 있었다.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 망우리는 어느덧 죽음의 대명사가 되었다.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라는 우스갯말도 생겼다.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청량리→중량교(중랑교)→망우리 가는 버스의 여차장이 정거장에서 행선지를 소리쳐 알리는데 말이 빨라 그렇게 들렸다고 한다. 속세의 삶 자체가 괴로워 차라리 죽고 싶었던 가난한 시절의 블랙 코미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