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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2012 5. 28일자 설교
요 15:16-25
열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다는 말처럼 주님은 열두제자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신앙이나 능력은 각기 달랐기 때문에 뚜렷하게 두각을 보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도 있지만 이름만 거명된 제자도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수제자로 이미 널리 알려진 제자지만 요한은 예수님 생전엔 그리 알려진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이 성경이고 그 중에 신약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 인류구원 사업의 결정적인 주제라고 할 때 이를 가장 체계적으로 논증한 제자는 요한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도 야고보형과 함께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제자들 중 어린 나이지만 치밀하고 논리적인 제자여서 주님께서 무척 아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에피소드 속에는 애 제자인만큼 늘 주님가까이에서 주님의 언행을 직접 목격한 제자라는 데서 요한복음의 기록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도 직접 제자인 만큼 신빙성이 있겠는데 마태복음은 가능하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연대기적인 예순ㄴ님 행적의 기록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의 영생을 얻게 된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논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의 기록은 마태복음처럼 연대기적 기록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논증적 구성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소설작법에 스토리와 풀롯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스토리는 시간 순서에 따른 진행이지만 풀롯은 어떤 필연성이나 타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인과관계에 의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은 스토리 형식이고 요한복음은 플롯형식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는데 강점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어찌하여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한 구세주가 되는가에 대한 논증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이러한 구성적 특징은 문학하는 우리들에게도 매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학이 어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하여 보다 주제를 보다 강하게 각인시킵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의 생애를 재구성하여 부각시킨 표현법과 같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두 요 1:1-18까지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가 성육신하심을 대 전제로 선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한 편의 드라마로 본다면 사건의 발단 부분입니다. 이어서 요 1:1-12:50까지는 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를 여러 사람의 증거와 예수님 자신의 기적과 예수님 스스로의 증거를 통해서 드러내는데 이는 드라마에서 발전의 단계이며 갈등의 단계입니다. 모든 드라마나 소설은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구성인자들에 의해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사건이 발전합니다. 요한복음의 발전단계도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이나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니고데모나 유대인이나 바리새인 중에는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갈등을 유발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 5:16-25 역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발전단계인데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앞서 요 1:29절,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49절, 나다니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 임금이로소이다. 이처럼 처음엔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표적을 행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겐 수많은 표적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단 일곱가지 표적만 제시합니다. 이것도 요한의 드라마틱한 구성의 방법입니다. 그 표적을 보면 2장, 가나안 혼인잔치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4장,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고치심, 5장, 38년된 병자를 고치심, 6장,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심, 물위를 걸으심, 9장 날 때부터 소경을 고침, 11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이 기적들의 구성을 보면 모두가 2장에서 11장 사이,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l아들임을 증거하시고자 하신 발전의 단계 내에 요한은 의도적으로 표적을 집중시킨 것을 보게 됩니다.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은 성령께서 역사하여 기술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만 하나님께서도 인간들에게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시기 위하여 문학적인 표현방법을 택하셨다는 것이고 그중에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은 더욱 탁월한 드라마 형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봉독하신 요 5:16절은 문제발단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신다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신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핍박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기 때문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앞의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문학해석에서도 그렇지만 성경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 사건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문맥적 의미라고 하지요. 따라서 설교할 때, 또는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따서 자기 입맛에 맞게 풀이하는 것은 매우 오만하고 가증한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어는 한 구절을 자기 지식이나 세상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 특히 요즘 주제 설교에서 흔히 보는 일인데 이는 성경을 모독하고 왜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앞뒤 문맥을 살펴 성경 텍스트의 진실을 먼저 파악한 연후에 그 진실을 현실과 연관해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이비나 사이비 종교들이 성경전체를 문맥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몇몇 구절들을 억지로 모자이크하여 감언이설을 만들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이런 일이란 바로 5장 1절부터 일어난 일인데 내용인즉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병자가 있었고 이들은 연못물이 동하기를 기다립니다. 이유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간 자가 낫는다는 신앙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38년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시되 여기서도 먼저 예수님이 다가가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 그러하오나 물이 동해도 나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정말 그 사람이 번쩍 일어나 자리를 들고 글어나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이 해괴한 질문을 합니다. 안식일 날 38년 병자가 나은 기적에는 언급도 않고서는 안식일 날 왜 들것을 나르는 노동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0, 10계명 중 제 4계명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시 세분화한 유대인 율법, 사바드에는 안식일에 금하는 39개 있는데 그중에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건 옮기는 것을 금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 규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나, 들 것을 이동하는 것이나 모두가 율법을 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말입니다. 38년 병자를 고친 일이 안식일이니나까 않된다는 규약의 율법, 이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법에 도전하고 파괴하고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17절 같이 봉독하실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며” 이 구절은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참담한 망언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나의 아버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니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예수를 그들은 시골 나사렛 목수의 아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그러기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라니 이건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치는 모세의 10계명에 대한 도전이고 야웨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창세기에는 분명 야웨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에는 안식하셨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제7일에는 쉬라 했는데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도 쉬시고 모든 유대인들이 쉬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서 하나님 아버지도 지금, 즉 안식일에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은 창세기나 10계명을 전면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 18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8절 말씀의 핵심은 앞서 지적했듯이 첫째는 야웨 하나님과 모세와 유대인들의 계약인 안식일의 10계명과 존재의미를 부정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졌다는 것이니 이는 구약적 유대교의 교권을 완전히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양문에서 벌어진 당시를 돌아가 그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정말 이는 일촉즉발의 위기입니다. 1500년 전통의 구약이 무너지고, 신약으로 거듭나는 것인가. 율법의 유대교가 무너지고 사랑과 은혜의 기독교로 거듭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순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죽음을 맞게 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절대적 관계, 그 거룩한 신성의 관계를 당당하게 논증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19절에서 29절까지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선언입니다.
이제 본문은 예수님이 성난 유대인들을 향해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명확하게 증거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神性)을 지니고 계신다는 사실이 4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는 전혀 비밀이 없으시다. 19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 사역에 함께 차여하고 있다. 21절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와 아들 모두 생사의 권한을 갖고 있다. 셋째 하나님과 예수님은 심판 사역에도 함께 동참하시되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심판의 권세를 위임하셨고, 22절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오히려 인간들의 최후심판은 아들에게 위임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의 권세를 행사하신다. 넷째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함께 경배를 받으신다. 23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심이라” 결국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은 비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됨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 누구든 자신의 말씀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아무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최후 심판의 권세를 위임받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이처럼 유한복음은 철저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를 믿는 결과가 영생이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도 자기 수련이나 선행을 따라 영생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자체가 바로 영생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영벌임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일로 핑계할 수 있는 자가 전혀 없으니 때가 늦기 전에 누구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19절에서 29절에 이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동등 됨을 선언하는 말씀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예수님 특유의 간곡한어법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됩니다. 1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나도 행한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은 곧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이처럼 첫 번째는 하나님과 나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또 내 보내신 일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얻고가 아니라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나와 하나님을 동등한 존재이니 나와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을 면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세 번째는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ㅇ르 들을 때가 오나니, 29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3단계 동의 반복법은 여기서도 확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단계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2단계에서는 그러니 나와 아버지를 믿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3단계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내가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심판자로서 선한 자는 생명부활로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도록 할 것이라는 선언이신데 단계별로 점층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로서 인류구원과 심판의 방침을 선명하게 천명함으로써,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려는 저들에게 오히려 당당히 선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오서 그 권위와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세 번째로 38년 된 병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셨는데 마침 안식이리어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일하시는 주님을 비난하자 안식일은 고사하고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바로 나는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안식일 성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12장에서도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깨달음이 되고 있습니다. 주일에도 일하지 말라 했으니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교리인가. 그리고 정말 주일 성수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 본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실은 외면하고 무조건 교회출석만 강요하고, 그래야 복 받는다는 것은 극히 유대교적 율법주의이고, 이는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눈도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눈도장 찍고, 담임목사님에게 눈도장 찍고, 구역장에게 눈도장 찍는 주일 성수, 그거야말로 바리새인만도 못한 가증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방법에는 다른 사람, 즉 사도요한이나 제자들에 의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님 스스로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일차적인 방법이 표적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가장 대중적이고 직접적입니다. 그러나 좀 더 논리적인 설득도 필요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가 설교를 통해 자기를 증거하시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5장 19절에서 29절의 말씀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은 여기서도 자기 증거를 끝내시지 않고 다시 5장 30절에서 5장 47절에서 부연설명하십니다.
내용은 자기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의 증거’(요 1:19-34; 3:22-36)에 대하여서도 언급하십니다(33-35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로 세례요한의 증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신성(Deity)을 증거해 주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증거들을 갖고 계셨습니다. 즉 ①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해 주시며(32, 37, 38절), ② 예수님 자신의 사역이 스스로를 증거 해 줄 뿐만 아니라(36절), ③ 성경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39, 40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 가지 증거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대표자격인 모세에게는 최대의 존경심을 나타내었으나 정작 모세의 율법도 마침내 성육신하사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인 예수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고 있음은 미쳐 깨닫지 못하여 예수님에 대해 불순종과 배척으로 그릇된 신앙 형태를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존경하는 모세가 도리어 하나님께 그들을 고소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날의 성도들 중에도 풍부한 성경 지식과 폭넓은 신학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모든 지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결여된 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러한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죄하는 도구로 작용할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5장은 철두철미 예수그리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거 하는 자기 증거의 장이 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요한복음 5장을 읽으면서 정말 가슴에 새겨지는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그러면서도 위엄 있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하니까 아버지에 관한 시가 생각납니다.
다음은 이건청 시인의 「찬양」이란 시입니다.
한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바람이 보입니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화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줄 알았다
광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 알았다
그 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어깨를 스쳐간 이 큰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 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은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 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며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낮 익은 얼굴이 보인다
겨우 겨우 벼랑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 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아마도 시인이라면 아니 문인이라면 한 번 쯤은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겠습니다만 대개는 좀 센치한 감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속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짐은 태초부터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례는 구약 1500년 역사에서는 단 몇 번에 불과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초기에는 엘로힘이라 했다가 주로 야웨 즉, 여호와란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성경학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단 15회에 불과하시만 엘로힘은 2600회, 야웨, 즉 여호와는 7040회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아도나이 주라는 칭호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로힘과 야웨 즉, 여호와란 칭호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엘로힘은 이스람교의 알라라는 말과 함께 이는 신성에 대한 일반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God, 신이라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추상적 명칭입니다. 유대인들은 통일된 민족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고대 근동에서 사용하던 엘, 신중의 신이란 이름의 엘로힘을 유대인들도 섰습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출애굽하면서, 하나님이 특별히 유대민족만은 선민으로 택하시고 축복하신다는 하나님이란 관점에서 야웨, 즉 여호와란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야웨는 유대인들에게만 은밀하게 주신이름으로 이방인과 무관하며, 그러기에 야웨는 예루살렘 성전에나 있어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기본 신앙이 됩니다. 그렇다면 야웨 즉 여호와의 종교는 대단히 민족주의 적이고 배타적이고 율법적이고 징벌적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출현하여 이 율법적이고 민족주의 적이며 배타적인 여호와 중심의 종교를 전면 수정합니다. 그 대표적인 작업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지 않고 아버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출애굽 20:1-3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구약의 하나님은 십계명을 내리시면서 나는 여호와란 말씀을 하시고 십계명 외에도 각종 규정을 만듭니다. 그것이 모세 5경인데 이는 한 마디로 권선징악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셨고(요 5:17) 너희는 기도할 때 외식하는 유대인들처럼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즉 아버지로 호칭하며 기도하기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여호와의 하나님의 종교이고 신약은 아버지 하나님의 종교가 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는 사악한 유대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십계명과 여러 법을 만들어 피를 나누고 언약궤를 만들어 이를 지키게 하고 어길 때는 엄벌에 처하는 율법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종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인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어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그를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에서 인도하는 사랑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교와 아버지의 종교는 문학적으로 또는 시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볼 수 없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하나님이며 가족처럼 친근한 하나님입니다. 이는 시학에서 관념적인 불가시의 세계를 구체적인 가시의 세계로 전환하기 위하여 메타포를 사용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시는 이성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를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보여주는 언술방법입니다. 구약에서도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하여 다윗 같은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여호와를 목자라는 시적 이미지로 표현함으로 여호와의 존재성이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를 신의 시라고 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시적 천재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메타포 한 것은 다윗보다도 훨씬 시적 천재성을 보입니다. 시 정신이란 분열된 너와 나, 사물과 사물의 분열된 관계를 통합하는 거리 좁힙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인간과 여호와의 거리 좁힘, 인간과의 통합을 위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그 정도로 좁힌 것은 대단한 상상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라는 가족관계, 혈연관계, 부모자식관계 거리를 좁혔습니다. 따라서 이는 시학적으로 볼 때도 주님의 시적 상상력은 다윗의 정도를 훨씬 뛰어 넘는 진짜 신의 시(Theo Poetry)가 됩니다. 이는 시를 쓰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절대시학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관계를 단지 상징이나 시적 메타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속적으로 보면 혈연적이고 생물학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관점이라면 아들은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는 만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 어머니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유일한 존재인데 어머니가 있다면 이는 유일신일수 없으며 또한 아들만 있어야 합니까. 딸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척도로 하나님 가족을 창조하는 역천을 범하게 됩니다. 이는 철저히 영의 세계를 인간 중심의 생물학적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최근 우리 주변에 그런 종교들이 있습니다. 문선명의 통일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가 있습니다. 안상홍교에서도 왜 아버지만 있는가 어머니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칭호는 철저히 신학적이고 상징적이고 시적입니다. 여기서 신학적이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 대속을 위하여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용서와 사랑의 역할이고 둘째는 죄를 대신하는 속죄물의 역할, 셋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역할입니다. 이 중에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는 역할인데 과거 구약 시대에는 흠 없는 수컷가축들이 이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범죄의 회개에 불과한 것이고 죄 값은 사망이라는 근본의 문제는 이들 가축의 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죄는 사람이 대신해야 하며,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목숨이 대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고 누구나 속죄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득죄하였기에 속죄물이 자격이 없습니다. 흠 없는 수컷 인간,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성육신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성을 지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성령의 잉태를 통하여 탄생하였기에 이는 결코 생물학적 관계의 아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또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왜 아들인가, 딸이어도 되지 않는가. 우리 고대소설 심청전에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딸 심청이가 인당수의 제물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 즉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구약의 유럽인 제물은 반드시 흠 없는 수컷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흠 없는 수컷은 흠 없는 남자 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인간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아들의 문제는 여러 가지로 인간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마련하신 이 구속사적 계호기에 감히 인간적인 토를 다는 것은 매우 불경한 것입니다. 인간이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통일교에서는 신화적으로 보면 오히려 대모신, 즉 어머니 신이 있다고 지적하고 안상홍교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아버지 혼자 어떻게 자식을 낳느냐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부장적이다. 남성 우월주의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적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스스로 내 아버지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계시이고 율법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바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란 3윌 일체 교리에 부응한 칭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리상 주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실에 역시 인간으로서 감히 토를 달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아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한 신앙적 이해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죄 값으로 죽어야 할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오직 아들 예수인 그리스도의 십지라 공로를 믿는 자만이 구원받아 아들 예수와 형제가 되었기에 감히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롬 8:14-19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짓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삶에서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의 말씀과 같이 주님을 믿어 영생을 얻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주기도의 서문이 아닙니까.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특권을 받았고, 또한 불러야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시사 예수 그리스도롤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두 아들 이야기만 있고 딸 이야기는 없습니다. 딸은 무시해서인가요. 여자를 무시해서인가요. 예수님은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입니다. 따라서 여기 언약의 아들은 사실은 자녀들을 뜻합니다. 자녀에 대한 상징어로서 아들이고 자녀들에 대한 시적 메타포입니다. 이는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남성, 여성하는 인종학적 성이 구분될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이고 상징적이고 아버지에 대한 시적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 메타포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죽음에서 구원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아버지와 그 자녀의 관계로 있는 한 우리는 영으로 인도함 받은 자들이고, 영생을 얻은 자들이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임을 믿고 하나님 자녀로서 범사에 감사하며 기도하며 시와 찬양으로 노래하는 복된 성도들의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