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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인천섬16개 섬 8경 사진여행(백령항로, 연평항로, 울도항로, 덕적항로, 이작항로) 꼭가봐아할곳 인천섬 베스트16섬
https://youtu.be/wIM-I2-jTsM
인천168보물섬
인천엔 가볍게 나들이하기 좋은 섬부터 신비함을 간직한 미지의 섬까지 168개의 보물섬이 있다.사람이 살고 있는 40개섬과 무인도는 128개로 사단법인 한국여행사진자작협회 소속의 산들투어가 '보고 싶고, 가고 싶은 인천 섬 만들기 49섬‘ 프로젝트이다.
산들투어는 168개 섬 가운데 49섬을 선정하고 섬이 가진 매력을 제대로 알리고 섬이 가진 가치와 특성을 알리는 것이다.
1차 프로젝트로 인천항 연안부두 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연안부두 떠나는 16섬’을 소개하게 된 것이다.
☞울도항로(문갑도, 굴업도, 백아도, 지도, 울도)
울도선인 문갑도 굴업도 지도 백아도 울도를 가려면 덕적도에서 나래호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 덕적도행 배는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과 경기도 안산 방아머리항여객선터미널에서 탈 수 있다. 인천에서 쾌속선인 코리아나호(사람만 탑승 가능)를 타면 1시간 10분 만에 덕적도에 닿고,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차도선 코리아익스프레스호는 1시간 50분이 걸린다.
울도선은 홀수일과 짝수일에 따라 번갈아 순회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문갑도
인천 옹진군 덕적면 문갑도는 면적 3.49km2, 해안선길이 11km, 최고점 276m, 63가구 111명이 살고 있다. 덕적도 남서쪽 3km 해상에 있으며 인천에서 54.6km 떨어져 있다.
명칭의 유래를 보면 한자상의 표기는 다르지만 섬의 생김새가 선비의 책상 문갑(文匣)과 같다 하여 문갑도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독갑도(禿甲島)라고도 불렸는데, 섬의 형태가 ‘장수가 투구를 쓴 모양’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말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인천부 덕적면 문갑리로 표기되어 있으며,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인천시로 통합되었다.
이 섬은 온통 산악으로 이루어져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섬 전체가 소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경지면적이 부족하다.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근해에서 꽃게와 새우, 우럭 등이 많이 잡히며 돌김, 자연산 굴 채취도 활발하다. 깃대봉 정상에는 삼신샘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해산을 하면 이 우물을 길어다가 떠놓고 복을 빌었다고 한다. 배가 닿은 선착장 동쪽 해안에 길이 700m, 너비 50m 규모의 문갑해수욕장이 있다.
굴업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하는 섬으로 면적 1,710km2, 해안선 길이는 13.9km, 14가구 27명이 살아간다. 최고봉은 덕물산(德物山, 122m)이다.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90km, 덕적도 남서쪽 13km 해상에 있다.
◇굴업도
섬 전체가 여성스럽고 경관이 우수하며, 굴업도 해수욕장은 길이 800m, 폭 40m의 고운모래 해수욕장이 갖추어져 있다. 명칭 유래를 보면 『대동지지』 덕적도진조에 “굴압도는 사야곶 서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굴은 굴(屈)자와 오리 압(鴨)자로, 굴압도는 지형이 물위에 구부리고 떠있는 오리의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 1910년경부터는 굴압도가 굴어도(屈業島)로 바뀌었고, 1914년에는 팔 굴(掘)자와 일 업(業)자를 써서 덕적면 굴업리(掘業里)가 되었다.
굴업(掘業)은 땅을 파는 일이 주업이라는 뜻으로 굴업도는 쟁기를 대고 갈만한 농지는 거의 없고 모두 괭이나 삽 등으로 파서 일구어야 하기 때문에 굴업(掘業)이란 지명이 되었다. 주민들은 연안에서 굴과 돌김을 채취하며 휴가철에 민박을 많이 한다. 조그만 밭뙈기에서 더덕을 심고 흑염소를 방목한다. 인근 해상에는 낚시가 잘되어 우럭, 광어 등이 잘 잡히고, 예전에 민어어장이 풍년을 이루어 그 당시 수 백척의 어선이 집결한 대규모 파시(波市)로 유명했다.
◇백아도
백아도(白牙島)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백아리에 소속된 섬이다. 덕적군도(德積群島) 서쪽 끝머리에 위치한 백아도는 면적 1.76km2, 해안선길이 12.1km, 41가구, 70명이 살고 있다.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8km 떨어져 있다. 1973년에는 55가구 270명, 초등학생은 51명, 분교가 아닌 본교가 두 마을 중간인 대촌 마을에 있었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1861년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배알도(拜謁島)라 하였는데, 섬의 모양이 ‘허리를 굽히고 절하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주민들은 ‘빼아리’ 또는 ‘삐알’이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백아도가 되었는데, 섬의 모양이 흰 상어의 이빨처럼 생겼다는 의미라고 한다.
섬의 형태는 섬 전체가 ㄷ자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다. 산높이는 142m, 131m, 133m, 144m 등의 산으로 구성되었다. 섬의 뒤쪽 부분인 북서쪽 해안은 가파르고 파도가 그치지 않는다. 반대쪽의 동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이 섬은 산지가 대부분이며 전답은 거의 없다. 급경사의 산을 개간하여 약간의 농산물을 생산한다. 주요 소득은 먼바다에 속해 어업이 성행하였으나 현재는 어족 자원의 고갈로 소형 어선 몇 대가 근해에서 낚시와 고기를 잡는다.
◇울도
울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德積面) 울도리에 속한다. 면적 2.06km2, 해안선 길이 12.7km, 최고점 220m, 47가구 75명이 살고 있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71km 지점에 있다. 모섬인 덕적도(德積島)에서 남서쪽으로 23km 해상에 위치한다.
울도는 덕적군도의 남쪽 끝 섬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섬이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조선시대 문헌에는 숲이 우거져 있는 섬을 의미하는 울도(鬱島)로 표기되어 있다. 주민들은 울섬이라고도 부르는데, 섬 생김새가 울타리처럼 생긴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또 무인도서들이 울도를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다 하여 울도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다른 유래는 덕적도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오고 갈 때 멀어서 울고 간다는 뜻과 또 교통이 워낙 불편하여 살기가 힘들어서 울도 주민들이 울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취락은 북쪽 해안 만입부의 주변에 집중해 있는 단일 부락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근해에서 꽃게, 문어, 우럭 등이 잡히고, 자연산 돌김과 톳, 미역을 채취한다. 교통은 덕적도에서 명령 항로로 하루에 두 번 운항된다. 조선시대까지 남양부에 속하다가 1486년(성종 17)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 이속되었다. 1973년 7월 1일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지도
면적 0.45km2, 해안선 길이 5.2km이며, 19가구 27명이 살고 있다. 작아도 너무 작은 섬이다. 지도는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90km, 덕적도 남쪽 14km 해상에 있으며 부근에는 울도(蔚島) · 각흘도(角吃島) 등이 있다. 지명 유래는 섬 가운데 연못이 있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섬은 비록 작지만 전체가 낚시터로 유명하다. 우럭, 볼락, 노래미 등이 많이 잡히며 연간 1,000여 명의 낚시꾼들이 몰려와 섬 주민들은 낚시배와 민박으로 수입을 올린다. 섬의 남단 해변의 민가를 제외하고는 섬 전체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해안 암벽 주위에는 소사나무가 우거져 있다.
인천에서 덕적도행 쾌속선을 타고 가서 다시 나래호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덕적도에서 지도행 여객선은 평일 1회, 주말 2회 운항한다. 지도행 여객선은 덕적군도 5개 섬을 순회하는 노선으로 짝수일은 시계방향으로 가는데 덕적도를 출발한 나래호는 먼저 문갑도, 지도, 울도, 백아도, 굴업도를 들려서 덕적도로 귀환한다. 홀수일은 지금의 반대방향으로 운행한다. 시계방향으로는 1시간, 반대방향으로는 2시간이 더 걸린다. 시간 절약을 위하여 홀수일 들어가고 짝수일 나와야 배타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나래호의 대부분 손님은 굴업도 가는 분들이다.
예전에 운항하던 일반여객선 해양호는 그 수명을 다하여 퇴장하고 지금의 차도선 나래호(120톤)는 승객과 차량을 싣고서 안전하고 빠르게 달려가기 때문에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으며 주민들도 편리한 삶을 누린다.
☞백령항로(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교통 사정은 백령도와 같은 코스로 인천에서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로 운항하는 정기여객선이 인천 연안 부두에서 1일 2회 운항하며,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소청도는 백령도, 대청도에 이어 세 번째로 서해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북한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선박 운항 통제를 많이 받는 지역이다.
◇백령도
백령도는 북한의 장산곶 남쪽 휴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191.4km 떨어져 있다. 면적 46.3km2, 해안선 길이 52.4km, 최고봉 184m, 주민은 3,177가구 5,657명, 초등학생 219명, 중학생 85명, 고등학생 102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최근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막아 간척지 매립으로 면적이 늘어난 결과, 8번째 크기의 섬이 되었다 한다.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원래 이름은 곡도였으나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 하여 백령도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옛날 서해도 어느 고을의 한 선비가 사또의 딸을 사모하여 둘이 장래를 약속했다. 이를 안 사또가 딸을 외딴 섬으로 보내버리자 선비는 사또의 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어느 날 하얀 학이 흰 종이를 물어다주고 가는 꿈을 꾸어 놀라 깨어보니 정말 종이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선비는 주소대로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사또의 딸을 찾아 회포를 풀며 단란하게 살았다는 전설인데, 그 섬을 백학(白鶴)이 알려주었다 하여 백학도라 했고 오늘날 백령도로 불린다.
◇대청도
대청도는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12.63km2, 해안선길이 24.7km, 최고점은 삼각산(343m)이다. 주민은 728가구 1,386명, 초등학생 42명, 중학생 16명, 고등학생 30명이 있다. 산지가 많고 농경지는 북부에 조금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주업은 어업이다.
인천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171km, 옹진반도 남서쪽으로 약 40km 거리에 있는 백령도(白翎島) · 소청도(小靑島)와 함께 군사분계선에 근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소청도, 북쪽으로 백령도, 동쪽으로 서해도 옹진군과 마주하고, 서남쪽은 서해에 면한다. 서해도 장산곶과 불과 19km 떨어진 곳으로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포을도(包乙島)였으며, 고려 초기에 대청도(大靑島)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대청도는 백령도와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그러나 백령도의 유명세에 밀려서 덜 알려진 측면이 많다. 섬의 크기는 백령도의 4분의 1 정도이며 대부분 산지를 이룬다. 대청도는 산이 높아 역동적인 모습의 느낌을 준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1406년(태종 6) 옹진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경 다시 장연현에 소속되었다. 1793년(정조 17) 주민의 입주와 경작이 허락되었으며, 1799년(정조 23) 대청도와 소청도를 수원부로 편입시키고 두 섬에 각각 진(鎭)을 설치했다. 1894년 서해도 장연군에 속했고, 1928년 백령면에 예속되었다가 1974년 대청면으로 승격한 이후,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청도에는 고려 충숙왕 5년(1318) 원나라에서―드라마 기황후에서 순제로 등장하는―발라태자(孛刺太子)를 이곳에 귀양 보냈다가 충숙왕 10년에 소환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옛날에는 대청(大靑), 소청(小靑) 두 섬을 뭉뚱그려 그냥 청도(靑島), 곧 ‘푸른 섬’이라고 불렀다. 송나라에서 고려에 온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대청서(大靑嶼)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黛)과 같다 하여, 고려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도 이 섬을 ‘푸른 섬’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4년에 간행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포을도(包乙島)’를 청도(靑島)라 했는데 서긍의 글을 옮긴 듯하다.
푸른 섬을 우리 음에 따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쓴 것이 포을도이고, 이것을 다시 뜻에 따라 한자로 기록한 것이 청도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를 지나는 배들이 모두 ‘푸른 섬’이라고 부른 것이 확실하다. 또 대청도를 암도(岩島)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대청도의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 대청도는 죄인들의 유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당시 원나라 황실 황태자까지도 유배를 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한 무신 김방경(金方慶)이 모반을 했다는 모함을 받아 이곳에 유배되었던 기록이 있다. 원나라 사례로는 충렬왕 6년 원제(元帝)가 황태자 애아역(愛牙亦)을 대청도로 귀양 보낸 것으로, 그에 관련해서는 1996년에 발간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유배 당시의 궁궐터가 내동초등학교 터였다고 하며 내동(內洞) 지명을 고쳐 장안(長安)으로, 그리고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러 이곳을 자기의 도읍지라 생각하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기록이 있다.
◇소청도
소청도는 면적 2.94km2, 해안선 길이 14.2km, 최고 높이 174m이다. 대청도에 비해 1/5정도 크기다. 서해도 옹진반도로부터 서쪽으로 약 40km, 대청도에서 남동쪽으로 4.5km 지점에 있다. 인천 연안 부두에서 북서쪽으로 약 165km 떨어진 해상에 있다. 주민은 167가구 262명, 초등학생 3명이 있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조선시대 이전까지 소암도(小岩島)라고 했다가, 그후 대청도와 가까운 작은 섬이라는 뜻으로 위쪽의 큰 섬은 대청도라 하고, 아래쪽의 작은 이 섬은 소청도라 부른다. 이 섬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길이 약 9km, 남북너비 약 2km로 가로로 길게 누운 형상이다. 해안은 급경사의 암벽을 이루며 대리석의 기암총석(奇巖叢石)이 해안을 돌아가며 병풍처럼 둘러싸여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스트로마톨라이트로 이루어진 남동쪽의 분바위 해안(천연기념물 제508호 옹진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및 분바위)은 흰 바위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2개의 자연 부락이 있는데 남쪽 해안에 있는 예동과 노화동에 집중해 있다. 논은 한 평도 없고 밭 0.62km2, 임야 2.15km2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노령화되었으며 일부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근해에서 꽃게, 홍어, 조기, 까나리 등을 잡는다. 또 연안에서 자연산 굴 채취와 홍합, 미역, 전복을 채취한다. 이 섬의 남동쪽에 위치한 분바위(粉巖)는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 섬에 유배되었을 때 주악(酒樂)을 즐겼던 곳으로 유명하다. 전 지역에는 수크령(갈대의 일종)과 참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작항로(자월도, 승봉도, 소이작도, 대이작도. 사승봉도)
◇대이작도
이작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紫月面) 이작리에 딸린 섬이다. 면적 2.57km2, 해안선길이 18km, 최고봉은 188m의 속리산이다. 주민은 151가구 294명, 초등학생 7명이 있다. 인천으로부터 44km, 섬 동쪽의 소이작도와는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동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승봉도가 있다.
이작도는 대이작도와 소이작도로 되어 있는데 대이작도의 면적은 2.57km2, 소이작도는 1.3km2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이태리 ‘이’(伊)자에 지을 ‘작’(作)자를 쓰는데 옛날에 해적들이 이 섬에 숨어 살았다고 하여 이적도라 불렀다고 한다. ‘이적’이 ‘이작’으로 변해서 현재 ‘이작도’(伊作島)가 되었다.
◇소이작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리에 있는 섬으로, 면적 1.45km2, 해안선 길이 10km, 최고 높이 159m이다. 대이작도 서북쪽 0.2km, 인천 남서쪽으로 42.2km 지점에 있다. 현재 주민은 64가구 111명이 살고 있다. 동북쪽에는 자월도를, 서북쪽에는 덕적도를 마주한다.
섬의 유래를 보면 해적들이 들어와 은거한 섬이라 하여 이적도라고 일컬어졌다. 이들이 숨어 살면서 인근을 통과하는 세곡선을 습격하고 약탈하던 이적(伊賊)의 근거지라는 데에서 이적도라 불리게 되었는데 나중에 이작도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개의 이작도 중에 큰 섬은 대이작도, 작은 섬을 소이작도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즉도(伊則島)라 불리기도 했다.
◇승봉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승봉리에 있는 섬으로 면적 2.22km2, 해안선 길이 9.5km, 산높이 93m, 주민 133가구 254명, 초등학생 3명이 사는데,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2km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는 자월도, 서쪽으로는 대이작도를 마주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수도권의 제일가는 관광지인 덕적도(德積島) 남동쪽으로 14km 해상에 있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370여 년 전에 신씨와 황씨라는 두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농경지를 개척했다고 하여 이들의 성을 따서 처음에는 신황도라고 하였는데, 그후 이곳의 지형이 봉황새의 머리를 닮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섬의 입도 시기는 신석기시대 후반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승황도(承黃島)로 기록되어 있다.
◇자월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있는 섬으로, 면적 7.26km2, 최고높이 178m, 해안선 길이 20.4km이다. 인천 서남쪽으로 35km 지점에 있으며 주위에는 승봉도, 대이작도, 소이작도 등이 있다. 주민은 362가구 690명, 초등학생 9명이 있다. 명칭 유래를 보면 인조 때 관가에 근무하던 사람이 귀양살이를 와서 첫날 보름달을 보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더니, 달이 붉어지며 바람이 일고 폭풍우가 몰아쳐 하늘도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준다 하여, 이곳의 이름을 달이 붉어졌다는 뜻의 자월도라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자월도는 예로부터 토지가 비옥하고 전답이 많아 세금을 현물로 내야 했다. 조정의 세무를 담당하던 관리가 이곳에 세금을 거두려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했으나, 거센 바람이 며칠씩 불어 돌아가지 못하고 초초한 마음으로 육지 쪽을 바라보니 검붉은 달만이 희미하게 보여 검붉은 자(紫)와 달 월(月)을 써서 ‘자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답은 논 0.32km2, 밭 0.64km2, 임야 5.77km2이다. 주민들 대부분은 농어업과 민박에 종사하고 있다. 자월도는 구릉성 산지가 많고 낮은 지형은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많이 있으며, 해안에는 잣나무와 곰솔들이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연안에서 새우, 우럭 등이 잡히며, 굴, 바지락 등을 채취한다.
자월도는 자월면에 소속된 섬이며 그 외에 대 · 소이작도, 승봉도 등이 있는데 그중에 자월도가 가장 크다. 동서 길이가 6km 정도로 길쭉한 모양이다. 자월도에는 국사봉(166m)이 우뚝 솟아 있으며 섬의 남쪽에 큰말 해수욕장과 장골 해수욕장이 있다. 여기는 길이 100m, 폭 40m의 단단한 금빛 모래가 있고,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바지락, 소라 등을 잡으며 자연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 1km 넓이의 장골 해수욕장은 고운 모래와 함께 수심도 얕아 가족 단위 여행으로 제격이다. 물이 빠지면 마을 오른쪽에 있는 독바위로 걸어서 건널 수 있고, 남쪽에는 대이작도와 소이작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인천 연안부두와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여객선으로 40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자월도 고사리골(古寺谷)에는 조선중엽에 설치한 말 목장이 조선후기까지 존속되었으며 지금도 마성(馬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덕적항로(덕적도, 소야도)
◇덕적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德積面)에 딸린 섬으로 면적 20.87km2, 해안선길이 37.6km, 최고점은 국수봉(314m)이다.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어미섬으로 가장 큰 섬이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75km 해상에 위치하며 484가구 1,447명, 유치원 9명, 초등학생 24명, 중학생 26명, 고등학생 34명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입도하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며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번갈아 점령하여 그때마다 소속이 바뀌었다. 삼국시대부터 서해상의 해상교통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수군 진지와 말을 기르는 국영 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명칭 유래를 보면 덕적도라는 이름은 ‘큰 물섬’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이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큰물섬’이 한자화되면서 덕물도(德勿島)가 되었고, 다시 덕적도(德積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큰물이’ 혹은 ‘덕물도’라고 부른다. 덕적도의 관문인 진리에는 선사시대 조개무덤이 발견되었다.
◇소야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소야리에 있는 섬으로, 면적 3.04km2, 해안선 길이는 14.4km, 산높이 143m이다. 142가구 293명이 살아가며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8km, 덕적도 남동쪽으로 600m 해상에 위치한다. 소야도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사람들이 입도하여 거주했고, 삼국시대에 백제에,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 쟁탈전을 벌여서 점령함에 따라 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섬 이름의 유래를 보면 섬이 새가 날아가는 모양처럼 생겨 ‘새곶섬’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한 지명이라고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사야도(士也島), 『1872년 지방지도』 「인천부」편에 ‘사야곶도(士也串島)’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곳은 말을 사육하는 목장 지역으로 “인천부 서쪽에 위치하며 주위가 10리이고 목장이 설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당나라 소정방의 대군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왔다. 이 섬에 들어와 나당연합군을 편성할 때 소야도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소야도 북악산 기슭에는 당나라 군사의 진지였다고 전하는 ‘담안’이라는 사적이 남아 있다.
섬의 지형은 대체로 북서와 동남 방향으로 길다란 섬이다.
전체적으로 소나무 군락지이며 구릉과 기복이 심하고, 북쪽의 산(높이 106m)과 남쪽의 산(높이 143m)이 연결되어 있다. 이 섬 주변에는 심한 간만의 차이 때문에 간석지가 넓게 발달했다. 동북 해안 간석지 끝 부분에 암초들이 형성되어 자연적인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남쪽에 발달한 사빈해안은 떼뿌리해수욕장으로 소야도의 자랑이다. 여기는 피서지와 바다낚시터로 이용되며, 뗏부루해수욕장은 전설이 깃들여 있는 장군바위가 유명하다.
예전에는 근해 해역은 조업하기에 좋은 어장이었으나 지금은 조기, 민어, 새우 등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옛날부터 꽃게가 유명했다. 꽃게가 한창인 4~5월에 찾으면 싼값에 맛좋은 꽃게를 먹을 수 있다.
최근에는 돌굴, 김, 바지락 채취, 민박으로 생활을 한다. 육지로 직접 연결되는 여객선은 없으며 600m 전방에 마주한 덕적도 진리항에서 도선이 수시로 운항된다.
☞연평항로(대연평도와 소연평도)
◇연평도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나뉘어져 있다. 대연평도의 면적은 7.0km2, 해안선 길이는 16.6km, 최고 높이는 127m이다. 남쪽으로 약 5.2km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다. 연평도는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약 83.2km 떨어져 있다. 주민은 1,277가구 2,053명, 초등학생 70명, 중학생 42명, 고등학생 34명이 있다.
소연평도는 면적 0.24km2이고 해안선 길이는 5.5km이다. 최고점은 해발 214m인 연화봉이다.
섬의 유래를 보면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에는 연평(延坪), 연평평(延平坪)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섬의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고 들판처럼 길게 뻗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연평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라고 여겨진다. 곳곳에 패총과 무문토기 · 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된 것을 미루어 보면 그렇다. 연평도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주로 나라의 말을 사육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말과 소를 키우는 ‘남중목장’으로, 조선시대엔 국마(國馬)를 사육하는 ‘국마방축장’으로 불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평도에는 거주자는 없었고 주로 피난민이나 빈곤자, 범죄자들이 찾아와 일시적으로 거주했을 뿐이라고 한다.
향토지 <연평도>에 따르면, 연평도에 영주자가 생겨난 것은 조선 인조 재위 2년인 1624년이다. 당시 이괄의 난이 진압되던 해, 정부군에 쫓기던 사람들이 연평도에 들어온 것이 첫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해주목 송림면(松林面)에 속하였는데, 한국전쟁 이후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이 되었다. 1995년에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고, 1999년에 연평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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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16섬 여행. 덕적항로, 이작항로, 울도항로, 백령항로, 연평항로 인천섬 8경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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