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마시다
김미옥
길고양이 잠에서 깨지 않은
세 시 반 뒤척이다 눈을 떴다
어둠살 걷히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릴 인내가 부족해
고요를 깨며 주방으로 건너가 포트에 물을 끓인다
늙은 커피잔에
봉지에 담긴 커피믹스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뽀골뽀골
찻잔 속으로 자맥질하다
저절로 폴려버린 커피믹스의
달보드레한 향기에
잠에 취한 세포가 깨어나고
새로운 하루가 천천히 일어선다
묵빛 어둔 지하 갱도에 고립된 채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을 견디며
살기 위해 마셨던 광부의 커피믹스
한 점 빛이 없는 세상과 단절된
이백이십 일일의 시간을 보내고
지상에 발을 딛기까지 한 가닥 생명줄이 되었던
광부의 커피믹스를
누가
몸에 해롭다 했는가
나
어제도 오늘도
습관처럼 커피믹스를 마신
오장육부에 온기가 돌고
당뇨 정상
혈압 정상
광부의 기적처럼
환하고 찬란한 하루를 대가 없이 부여받은
이 아침
순한 바람이 어깨를 깜싼다
* 2022년 10월 26일
봉화 아연 광산 매몰사고로 열흘 만에 무사하게 돌아온 광부 두 분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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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익은 가을이 떠난다
김미옥
가을은 늘 그렇게 왔다 간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댕강댕강
안간힘으로 버티고선
잎새 하나
갈바람이 몰아쉰 숨결에
명줄을 놓는다
단장의 별리는 언제나 서툰 것이어서
나무 밑동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지난 시간을 껴안은 체
바스락바스락 슬픔을 묻고 있는 낙엽
모질게 젖줄을 끊고
나신이 된 어미는 차디찬 밤하늘을 이고
이파리가 알지 못한
뜨거운 불도장 하나 슬픈 나이테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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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을 더듬다
김미옥
푸른 물 뚝뚝 떨어지는
오월 숲에
세월을 이기고 견디며 살아온
갈참나무 한 그루
저녁답이 되도록 시선을 오래 붙들고
놔 주질 않아 머뭇거린다
물처럼 순하게
바람처럼 보드랍게
구름처럼 말랑말랑하게 살고 싶었던 마음
저 나무인들 없었을까
이리휘고
저리 휘어진 가지마다
모로스 부호처럼 써 내려간
생의 이력을 해독하고 싶었으나
봄꽃에 찔린 눈이 흐려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채
갑갑하다 아우성치는 가슴
가지 끝 행간에 내려놓고
돌아서는 등골이 서늘하다
약력
• 이름 김미옥
• 필명 예람
• 한국 문인협회 회원, 전인문학회원
• 강서문인협회회원, 세계모던포엠 작가회원 장성문인협회 편집국장
• 수상 : 강서문학상 본상, 현대문학사조 대상 모던포엠문학상 금상
•저서 : 다시, 봄
•공저 : 풍경 꽃비에 울다, 수직과 수평의 경계에서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