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영 (호 14:4-7)
이 시간에 “사랑의 영”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식 때문에 산다는 사람, 희망으로 산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산다는 절망적인 말을 하거나, 돈 때문에 산다는 지나칠 정도로 속물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였던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그의 단편소설에서 주인공 미하일 천사를 등장시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소설 속에 마하일 천사는 하나님께서 풀라하신 세 가지 문제 중에서 나머지 한 가지를 풀지 못합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하일 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습니다. 한 어머니가 쌍둥이를 낳자마자 핏덩이 같은 아이들을 놔두고 천국으로 옮기라는 명령입니다.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는 크게 근심하지만 그런데 쌍둥이는 죽지 아니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면서 마지막 문제의 답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산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호세아서의 말씀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호세아는 주전 750년경 북 왕국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로 그가 살던 시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여 백성들이 사치하고 향락을 즐기던 시대라서 종교,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 장가들라 하셨습니다. 고멜은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상종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셋을 낳았습니다. 호세아의 입장에서 그 기분이 어떨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살고 싶은 생각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호세아는 고멜을 버리지 않았고 고멜이 버리고 간 자녀들을 양육하고, 전 재산을 털어서 그녀가 팔린 창부의 대금을 지불하고 다시 데리고 오기를 반복합니다. 호세아는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멜은 변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호세아의 충실한 아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영은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시켜 하나님의 참 사람을 만드시고야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임하면 복이 임합니다.
1. 반역을 고침 받게 됩니다.
4절에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여기 반역이란 원어로 <메슈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등을 돌리고 떠나간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 죄악의 속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다. 했는데 두고 보면 또 같은 죄를 되풀이 합니다. 자행자지하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고멜의 행실이 호세아 만났다 해서 금방 훌륭한 사모가 되겠습니까? 고멜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던 고멜이 선지자에게 시집와 보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옛날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릴 수 있는가? 이상한 옷을 걸치며 몸매 자랑을 할 수 있는가? 감정대로 다투며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가? 세상 노래라도 한 바탕 불러보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있는가? 선지자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미 바람난 여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 인간의 고질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도 아직도 세상에 속하여 죄악에 헤매고 있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설교를 듣고 세례요한에게 와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또 범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세례요한에게 나와서 또 고백하기가 부끄러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로 할 수 없으니까 가슴에 죄목을 써서 달고 나타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죄>라고 가슴에 붙이고 온 창녀에게 다가 가신 예수님은 그 종이를 떼어 자기 가슴에 붙이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를 내가 대신 지마.” <도적죄>라는 종이를 붙이고 온 사람에게도 다가셔서 떼어 자기 가슴에 붙이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도 내가 대신 짊어졌다.” <살인죄> <거짓말죄> <시기> <질투> 모든 죄목을 다 예수님은 자기 가슴에 붙이며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주셨을까요? 삭개오와 같이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결심으로는 새 사람이 되지 못하지만 성령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영은 큰 기쁨을 줍니다.
다시 4절에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사랑하되 기쁘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기쁨을 느끼게 사랑해 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복입니다.
습3:17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것은 성령이 임할 때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롬5:5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웃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진정한 신앙의 맛을 알게 됩니다. 이 땅에 살아도 성령 충만 받으면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조금의 어둔 그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영입니다.
찬송가 191장의 후렴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내게 계시네.’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황의성이라는 사람입니다. 황의성씨는 날마다 그 찬송을 부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절도와 폭력, 강도, 강간 등 닥치는 대로 죄를 저질러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 12월 안양 교도소로 이송되어 남은 기간을 보내는데 감방에 선임들이 고통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난 황의성이 그들에게 맞설 때마다 집단으로 대드는 통에 눅실하게 맞고는 분을 삭일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 안에 변기통 옆에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황씨의 피를 닦아주고 간호해 주는 어느 죄수를 통해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커다란 불이 가슴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되는 모습을 본 교도소 측에서는 3개월을 앞당겨서 출소시켜 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날마다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인생살이가 힘듭니까? 사랑의 영,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의 영은 온전케 하십니다.
5-7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백합화 백향목 감람나무 곡식 포도나무 포도주,,, 이런 낱말은 하나님의 은혜, 혹은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 나라를 암시하는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것도 이슬이 없이는 자라거나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슬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열대 기후입니다. 그래서 4월부터 11월까지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습니다. 건기입니다. 그러나 밤에 이슬이 내려 생물들은 살아갑니다. 그 이슬을 받아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노래합니다.
성령은 이슬과 같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흠뻑 젖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 믿음이 자랍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천국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있다면 더욱 성령 충만 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확산시켜야 할 불이 있다면 성령의 불입니다. "내가 불을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삼손이 여우 300마리의 꼬리에 불을 달아 블레셋 들판을 불 지른 것처럼 한국과 세계에 성령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가 신학적 정설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사랑의 영을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우리의 반역을 고치고 기쁨을 주며 온전케 하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성령으로 충만한 가장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