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읽기 9
(지혜와 총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1:8-9).
들어가며
앞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천명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복을 주신다고 하나하나 차례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그 신령한 온갖 복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도 돌아보자.
-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셨다.
-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오늘은 이에 더해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알게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지혜와 총명도 넘치게 주셨다고 한다.
2. 본문 살피기
1) 8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셨다.
우리가 늘 기도할 때마다 주시기를 바라는 지혜와 총명이다. 지혜, 총명 같은 말이 아닌가? 먼저 지혜와 총명의 개념을 알아보자.
영어성경(NIV)을 보면 지혜와 총명을 wisdom and understanding으로 표현하고 있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 지혜, σοφίᾳ(sophia), wisdom
사물의 본질에 관한 지식과 개념을 아는 것
- 총명, φρονεσῖς(phronêsis), understanding
사물의 상태, 현황에 대한 이해
여기서는 총명함이 지혜보다 좀 더 넓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서에서는 ‘안다, 생각한다’는 개념을 총명함으로 표현한 사례가 많다. 우리가 아는 총명은 머리가 좋다, 명석한 두뇌, 이런 개념인데 헬라어에서는 상황을 두루 파악하는 힘을 총명함, phronêsis(프로네시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는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① 시몬 베드로가 가이사야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한 뒤 일어났던 일이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니 제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간청하였다.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를 꾸짖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 대화에 나오는 “생각한다(φρονεῖς)”는 단어가 바로 깊이 심사숙고하는 행위로서의 총명함을 뜻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의미다. 즉 총명하지 않다고 꾸짖은 것이다.
② 로마서 8: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한다.”
여기서의 ‘생각한다(φρονοῦσιν)’도 앞에서와 같이 총명함을 의미한다. 즉 상황 전체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이해를 뜻한다.
③ 또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라(τὰ ἄνω φρονεῖτε, μὴ τὰ ἐπὶ τῆς γῆς.)에서 생각하라는 단어 φρονεῖτε가 쓰이고 있다. 이 말 역시 총명하다는 뜻이다. 지혜는 지성과 이해의 과제다. 총명은 감성뿐 아니라 이지(理智)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이해력, 통찰력으로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지혜와 총명함을 주셨다는 건, 모든 지혜와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 통찰력, 총명함은 말하자면 ‘영적 분별력’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열정과 감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영혼, 전체, 전인(全人)을 통하여 나타난다. 내 감성과 내 이해관계나 내 사랑이나 내 전 존재가 그것을 향해서 쏟아지는 것이다. 내가 나의 전 존재를 걸고 그것을 바라게 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지혜와 총명을 주셨을까, 그것도 ‘넘치게’! 당연히 자녀들이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비밀도 알고 이해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이다. 하나님께 감사다!
2) 9절.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9절에서 눈의 띄는 것은 ‘뜻’이라는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미리 세우신 뜻’, ‘하나님의 신비한 뜻’이다. 뜻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계획이며 의지다. 감추어 있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바로 ‘뜻’이다. NIV는 will(의지)과 purpose(목표하다)로 표현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목표하신, 신비로운 그의 의지를 알려주셨다는 말이다.
그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을 나누어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이 ‘뜻’은 수식어가 장황하여 언뜻 명확하지가 않다. 중요한 단어는 ‘미리 세우신 뜻’이다.
하나님께서 한 뜻을 미리 세우셨다. 이것이 중심문장이다. 그런데, 그 뜻을 작정할 때 기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한 뜻을 세우셨는데 그때 하나님은 기뻐하며 즐겁게 작정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의지를 읽을 수다.
내가 오늘 사람들을 향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기뻐하셨던 그 하나님이, 그 기쁨 그대로 우리를 위해 한 뜻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려 하셨다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신비한 뜻
하나님의 신비한 뜻에서 mystery, μυστήριον(뮈스테리온)은 비밀, 신비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바울로서는 ‘하나님의 의지 안에 감춰져 있었던 비밀’이라는 의미로 썼다. 우리 성경은 이를 ‘신령한’으로 번역하여 비밀보다는 거룩한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무엇이길래?’ 하는 의문이 절로 드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비밀을 자진하여 알리고 싶은 게 아닌가. 자녀된 우리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깊이 감취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숨어있는 진리가 아니다. ‘공공연한’ 비밀이 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정하신 영적인 일들을 자녀들에게 다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의 의중을 잘 표현한 대목이다.
조명한 교수도 이 부분이 희망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감탄하였다.
“택하심, 예정하심, 그의 의지의 기쁘심, 은혜의 풍성함에 이어 ‘신비’가 나타난다. 바울 서한에서 이 신비가 쓰인 장면은 어디서나 비슷한 문맥의 구성를 보인다.(롬16:25 , 골 1:25)
한 예로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오직 비밀(신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고전 2:6-7).’를 읽으면,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에베소서의 문맥과 상통함을 직감한다. 신비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의지가 계획하셨던 것이고,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니라는 구원의 실현의 신비이다. 영세전부터 감취었던(롬 16:25) 이 신비를 “죄 사함을 받은”(1:7) 우리에게 이제 계시하셨다.“
이 신비를 오래 감추셨으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다 알려주셨다. 조 교수는 이 비밀이 ‘구원의 실현’이라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희생,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인류의 구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하신 ‘뜻’이며, 그동안 감춰져 있던 신령한 비밀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알도록 가르쳐주시기로 하였다. 그 비밀(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것이다. 그 덕분에 나같이 우둔한 자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넘치게 부어 주신 지혜와 총명함 때문이다.
이 8절과 9절은 주의 계시를 말하는 부분이다. 죄 아래 노예가 된 자가(롬 6:7) 그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예수의 속죄의 죽음이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의 완고한 마음도 부서지고, 예수와 함께 죽음에서 일어나(롬 6:3-11), 그 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속죄 즉 죄 사함을 얻었다. 참으로 은혜의 풍성함이 나타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다시 복음의 기본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풍성한 은혜를 따라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속죄, ἀπολύτρωσις(아폴루트로시스)는 원래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로 팔렸던 사람을 자유인으로 다시 사오는 거래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고 다시 찾아오는 자의 사랑의 마음, 그리고 억압받았던 신체의 자유를 얻게 된 자의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했던 ἀπολύτρωσις였다.
그런데 구로사키 선생은 ‘그리스도의 피가 반드시 죄를 사하는 대가로서 지불되었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고 주의를 준다.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대가 물품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로 충분하다.
3. 소감
하나님의 “비밀”은 본래부터 인간의 이지로는 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드러내 보여주셨다. 우리가 주 안에 들어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지혜와 총명함을 주어 하늘의 비밀을 알도록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다. 풍성한 은혜 그 자체이다.
아아, 그래서 나 같은 자도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자신있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죄 사함에 눈물을 흘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아파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함으로 그 비밀을 알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것을 알게 된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 속에 있는가! 사도 바울의 감동적인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진심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은지요?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알 수 있으며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내겠습니까?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으로 인해 있고,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다.
세세에 영광이 하나님께 있기를
(로마서 1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