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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의 사정으로 인해 몇몇 묘사 또는 행동은 예기치 못하게 누락될 수도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나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를 사랑한다."
(Den lieb ich, der Unmögliches begehrt)
- 괴테, “파우스트” 중.
#12. Revolution is Coming Home
국민혁명이 마무리될 무렵인 1922년 말, 연방은 새로운 작업에 열중했습니다. 우선 군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현대전 연구소"에서 고안한 '전금속 단엽기'가 처음으로 양산되었고, 솔제니친의 요청과 우스트랼로프의 의욕적 추진으로 항공공학에 큰 투자가 이어졌습니다. 또한 카튜셰프는 마르텔의 추천으로 응우옌 아이 꾸옥(훗날의 '호치민')과 동행하여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도왔죠. 바레츠노프는 동맹국들을 늘리는 데 열중했습니다.
한편, 1923년 1월 속보가 들려왔습니다. 워싱턴 회의가 최종 결렬되어 해군 군축에 관한 안건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중국 내 이권 포기에 대한 9국 공약 역시 파기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로써 연방도 급히 건함계획을 마련해야 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건함계획, 즉 "붉은 함대" 계획은 몇번의 윤색을 거쳐 서구권에도 전해졌습니다. 서유럽 언론에서 "소련이 엄청난 규모의 함대를 건설해 바다를 지배하려 한다"는 기사가 연일 각 일간지 1면을 장식하고, 몇몇 국가들의 정부 역시 이에 맞선 대규모 군비증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겪은 프랑스도 포함되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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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상황은 실로 심각했습니다. 코민테른 프랑스 지부(공산당)와 극우 왕당파 '악시옹 프랑세즈'가 크게 세를 얻고 에두아르 에리오의 중도 연립내각에 대한 여론이 최악인 상황이었죠. 터키 공화국의 붕괴, 무리한 재군비로 인한 경제적 피해, 그리고 소련 정보당국의 공작에 의한 자중지란은 공화국을 더욱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의 소요와 동시에 라인란트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줄을 이으며 더 이상의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1923년 4월 17일, 좌익의 "소련의 사주를 받은 무책임한 반란 책동"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던 필리프 페탱 장군이 병력을 동원해 의회를 점거하고 헌법을 정지하고 맙니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페탱의 쿠데타에 대항해, 당연히 전국 노조연합(CGT)과 공산당 역시 대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도시 지역을 장악한 채 해방구를 만들고 그 영역을 끈질지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프랑스군의 병력은 이 봉기를 진압하는 데 동원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라인란트 공화국의 통제가 느슨해지고 말았죠. 이에 프랑스에게 축출되었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라인란트의 총리로 복귀하고, 독일 사회주의공화국과의 통합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5월 10일 "바덴바덴 협정"이 체결, 라인란트의 독자적 자치권을 보장하는 '일국양제 식' 통일안이 가결되며 라인란트 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프랑스의 좌익 반군은 해방구를 지키고 있을 뿐 농촌 지역에 대한 통제가 부족하여 서서히 식량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긴 투쟁을 버틸 힘을 축적하려면 우군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죠. 우스트랼로프는 "프랑스 좌익은 자코뱅의 후예이며, 이는 곧 현 시국에서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공화국을 수호할 주체는 좌익이다"라는 논리로 그간 격조했던 중도 및 중도우파 세력에게 접근했습니다. 이들은 페탱과 그를 앞세우고 호가호위하는 악시옹의 극우분자들을 극히 증오하던 터라 "인민전선"의 창설에 찬성했습니다. 그레노블 협정이 맺어지며 민주적 절차의 선거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등을 조건으로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참가했죠.
독일 국경을 통해 소련이 "자원자에 한해 보낸" 의용군들과 장비들이 도착하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9월이 되자 오히려 인민전선이 정변군을 여기저기서 밀어내는 상황이 펼쳐졌고, 11월에는 오히려 정변군이 남부 해안가의 몇몇 도시 및 항구지역을 겨우 수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윽고 11월 27일, 페탱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해군의 협조로 알제리에 "프랑스 공화국 정통정부"를 차리며 내전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은 수호되었으나, 남은 것은 잿더미가 된 국토와 염세주의에 빠진 인민들, 그리고 파산지경에 빠진 경제였습니다. 프랑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몇 없었죠. 이들은 모든 대외채무에 대한 불이행을 선언하고 곧바로 소련과의 동맹을 선언했습니다. 물론 공산당이 과반을 훌쩍 넘긴 의석을 차지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혁명의 고향에서, 드디어 무산계급을 주체로 하는 "진정한 혁명"이 이루어지는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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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거장의 죽음.
프랑스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낭보가 들려왔으나, 불행히도 모스크바는 이를 즐길 시간이 없었습니다. 연방의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었죠. 1924년 1월 21일, 그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을 맞이했습니다. 최고지도자의 유고사태에 각지에 파견을 나갔거나 업무에 열중하고 있던 당 고위직 인사들이 모두 모스크바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최고지도자의 마지막 유언을 듣기 위해 모였죠.
유언장의 공개와 집행은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많은 이들의 존중을 받는 간부인 마르텔 파우코이와 알렉산드르 카튜셰프에게 맡겨졌습니다.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략)
…트로츠키 동지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한 한 연방 최고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마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은 없을 것이라 판단되기에, 그는 정치국원 중 인민위원평의회를 맡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다른 이들의 조력과 협조를 구할 것이 요구되는 바, 적절한 견제장치를 통해 협력적 관계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솔제니친 동지는 붉은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공훈을 세웠으니, 향후 더욱 존경받는 지위에 남아도 충분합니다. 다만 전 분야를 총괄하는 자리보다는 대외정책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와 트로츠키의 관계는 지금껏 그리 좋지 못했으나, 나는 동지애를 발휘해 그들이 연방을 함께 이끌어나가기를 소원합니다.
…부하린 동지는 역시 탁월한 이론가이고 두터운 인망을 가졌지만, 과단성과 리더십이 부족하여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기에는 부족함이 아직 많습니다. 그의 능력 역시 연방을 위해 남김없이 쓰여져야 하며, 동지들과의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스트랼로프 동지는 연방의 경제정책 수립 등 여러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그의 자질을 증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타 정파에 대한 그의 포용력은 당에 큰 이익이 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부하린 동지와 마찬가지로 당과 연방을 총괄적으로 이끌 자질이 있는 지는 불분명합니다. 앞으로도 그가 당내 분규를 막고 이전의 과오를 막아내는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스탈린 동지는 민족문제위원장과 당 책임비서를 맡으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잔혹한 성정은 나로 하여금 그가 과연 동지애라는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 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는 즉각 모든 책임있는 자리에서 해임할 것을 정치국원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후략)
이 내용은 당 중앙위 긴급회의에 그대로 공개되었습니다. 스탈린은 고인의 마지막 공개비난(?)에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그가 민족문제위원장 겸 당 총서기의 직책에서 자신의 측근을 이용해 타 부서의 업무를 위계와 위압을 통해 조작해온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당원들도 이를 알고 있었죠. 스탈린은 재기를 위해 당장은 고개를 땅에 쳐박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부 당원들을 이용해 제 소관이 아닌 업무를 위압을 통해 장악하려 한 일체의 혐의를 인정합니다. 저의 위법행위를 통렬히 반성하며, 어떠한 징계도 당이 의결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소망컨대, 다시 한번 순수한 혁명의 열정으로 당과 연방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무리 레닌의 유언이라고 한들 당의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에 따라 그 가부를 논해야 한다"는 솔제니친의 주장을 트로츠키가 호응하며, 즉석 심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총서기와 민족문제위원장 자리에서 '자진 사임'하며, 자아비판서를 제출하는 "견책"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이후 스탈린은 철도위원장에 보임되며 좌천되었지만, 적어도 명예와 정치인생은 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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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후계구도에 관한 레닌의 의중은 명백했습니다. "모든 후보군이 장점과 함께 결점을 가지고 있으니, 적절한 협조와 균형을 통해 최선의 방책을 이끌어내라", 즉 일종의 '집단지도체제'였죠. 아무리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인이라도 레닌의 명백한 메세지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에 따라 그간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분산해 민주집중제적 원리를 보장하는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중앙집행위원회(의회)를 최고소비에트로 확대개편한 뒤 독점적 입법권을 부여하고 당 기율위원회를 독립기관으로 개편해 군 총정치부를 휘하에 두며 도시와 농촌의 선거구 획정기준을 이전의 25,000/125,000에서 50,000/50,000으로 일치시키고 민주적 선거를 감시할 상임기구 '당 선거감독위원회'를 설치하는 안이 의결되었습니다. 이는 바레츠노프, 우스트랼로프, 파우코이, 카튜셰프, 솔제니친, 그리고 당 원로인 지노비예프의 각종 의견을 수합한 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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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차례는 앞으로 연방을 이끌어갈 지도부를 재선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이들이 예상하던 대로 트로츠키가 새로운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정부수반)에 취임할 것이 명백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독선적인 면모를 우려한 솔제니친이 막판에 부하린을 설득해 "빅 딜" - 즉 부하린을 의장직에 추천하는 안 - 이 맺어져 트로츠키를 의장으로 선출하는 안은 의결정족수를 맞추지 못한 채 부결되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의장직을 맡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불만스러웠지만, 언제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론적이며 학술적인 통찰력에 기반한 목표가 연방이라는 '정치기계'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었습니다. 부하린을 정부수반으로 하되 자신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으로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형태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죠. 이에 역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만장일치로 인사조직안이 중앙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니콜라이 부하린.
최고 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
인민위원평의회 제1부의장 겸 국방인민위원장, 이반 솔제니친.
인민위원평의회 제2부의장 겸 국가경제최고평의회 의장, 일리야 우스트랼로프.
전연방 공산당 기율위원장,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외무인민위원장 겸 코민테른 소련 대표, 알렉세이 바레츠노프.
국가정보위원회 의장, 마르텔 파우코이.
전연방 공산당 선거감독위원장, 알렉산드르 쉴랴프니코프.
전연방 공산당 총서기,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
전연방 공산당 총조직국장, 알렉세이 리코프.
인사조직안이 모두의 양보와 타협, 기발한 아이디어와 함께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은 연방의 밝은 앞날을 상징적으로 예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앙위원회 회의실에 모인 모두는 각자 혁명의 붉고 뜨거운 가슴을 안고, 새로이 개막될 인민해방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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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pilogue.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혁명은 완수되었습니다. 이미 유럽 대륙의 대부분과 중국 대륙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받아들인 상황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1929년의 "대붕괴(The Great Collapse)"에 전혀 대처할 수 없었고, 이는 착취적 천민자본주의와 기만적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오스왈드 모슬리의 국가파시스트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일본에서도 5.15 사건과 각종 쿠데타 시도들이 이어지며 군국주의 시대가 개막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이전부터 무솔리니의 국가생디칼리즘 세력이 집권한 상태였기에, 영국-이탈리아-일본의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 일명 강철연대(Pact of Steel)가 1934년 체결되며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항하게 되었죠. 똑같이 극단화된 루마니아와 그리스 역시 가담했습니다.
1937년에 미국에서 공산주의, 대중주의, 권위주의 세력 간의 내전이 발생하고 1939년 이탈리아가 달마티아의 할양을 강요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비스바덴 조약기구(WTO)는 기민하게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붉은 군대들의 연합이 전차와 압도적인 공군력을 앞세워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해 불과 2달만에 로마와 나폴리를 점령했고, 동방에서는 일본이 후견하던 장작림의 대만주제국이 붉은 군대의 군홧발에 짓밟혔죠. 연방은 비록 영국과 일본의 강력한 함대에 제해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으나, 반대로 그들 역시 자신의 식민지들이 육로로 진입한 공산군에게 '해방'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늘은 '붉은 편대'의 차지였습니다. 비록 영국과 일본의 시대착오적 압제자들이 끈질기게 항전을 선언했지만... 대세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죠. 1944년 2월 19일, 소련 공군의 Tu-98 중폭격기가 맨체스터와 요코하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때까지, 이들은 부질없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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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쟁'이 사회주의의 승리로 끝나고 난 뒤, 세계혁명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사회주의자 동지들이 이끄는 미 노조연맹이 군부 독재자 맥아더와 파시스트 휴이 롱, 그리고 서부의 회색분자들을 모두 일소하며 승리를 선언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도 동지들이 인민의 위대한 의지에 따라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새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비록 미국에서 얼 브라우더의 권위주의자들이 집권하며 세계적 알력다툼이 이어졌지만... 세계는 적색 혁명의 깃발 아래 위선적 자본가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일전에 카를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대로,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도 변증법적 유물론의 과학적 체제이행, 역사의 준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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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마지막 문단은 수정을 해야겠군."
"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동지?"
미 사회주의 연방국의 중견 정치인이자 저술가 '버나드 샌더스'가 그의 앞에 있는 한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는 그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 이번에 107번째 생일을 맞이한 전설적인 소비에트 연방 혁명원로, 알렉산드르 카튜셰프, 혹은 '동방의 붉은 별' 진란(靳燃)을 존경하는 마음에 그의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꺾고 충고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 모든 업적이 단순히 역사의 흐름에 편승한 결과였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군. 설령 마르크스의 의견이라도 말이야."
"그렇지만,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진보...."
"허허, 이 친구야. 물론 역사의 진보과정은 명백하나, 오리의 물갈퀴가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듯 그 이면에는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었네. 이를테면... 솔제니친, 그 사람을 생각해보게. 그가 붉은 군대를 이끌고 인민에게 학정을 일삼는 이들을 정벌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세계가 있었겠는가? 물론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이네만, 그가 사망하기 불과 5년 전인 1966년 홀홀단신으로 원수복을 차려입고 브레즈네프 놈의 쿠데타 음모를 분쇄하는 데 앞장섰던 일은 절대 잊을 수가 없네."
"솔제니친 원수...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데 손색이 없는 전설이죠. 당장 우주 진출 역시 그가 일찍이 군 현대화에 헌신하며 항공공학의 중요성을 설파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마르텔 파우코이, 그 양반도 잊을 수가 없지. 그 사람은 내 팬티 색깔까지 매일 알고 있었을 거야. 아마 그가 나쁜 생각을 먹었다면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을 게 자명하네. 자신의 기상천외한 능력을 오로지 혁명과 인민을 위해서만 쓴 '거장'... 그가 없었어도 세계혁명이 성공했겠나?"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마 1962년 사망하는 날까지 자신의 동지들을 이간시킬 만한 정보를 끝까지 함구했다죠?"
"그래. 또, 표트르 간니발, 그 사람. 자꾸 옛날 얘기 해서 미안하지만... 늙으면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 외에는 지루함을 버틸 방법이 없다는 걸 이해해 주게나. 아무튼... 독일 혁명 역시 간니발 동지의 탁월한 지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독일 혁명이 실패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오히려 자본주의자 돼지 놈들의 시다바리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군. 영국 놈들에게 포위된 바쿠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웠다지? 나이가 들어도 그놈의 힘은 억세더만."
"그 분은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했고, 연방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나타나 활약했던... 그야말로 영웅소설에나 나올 법한 인물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스트랼로프 주석은 더 말 안해도 되겠지?"
샌더스는 우스트랼로프의 평전과 자서전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독파하며 정치의 꿈을 키웠던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감상에 빠졌다. 그리고는 마치 백과사전마냥 그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1951년부터 1968년까지 제4대 인민위원 평의회 의장이자 초대 연방 주석. 노동계급 정당의 다원화와 민주정치의 기획자,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듣는... 그 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후... 그 양반도 조금만 더 살았으면 나랑 수다나 떨었을텐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바레츠노프. 자네가 잘 아는 이름이지?"
"....제 장인어른 말씀이시군요."
"비스바덴 조약기구를 창립하고 유지, 강화한 것도 큰 업적이지만... 지금처럼 각국이 한 나라처럼 협력하고 돕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그 사람의 공이 크다고 보네. 자네 아내도 미국에서 외무장관을 하고 있고, 하여간 바레츠노프의 이름을 외교무대에서 못 보는 날은 내 손자가 죽기 전에는 없을 것 같구만. 뭐...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자기 가문과 화해한 걸 난 더 놀랍게 생각하네."
샌더스는 자신의 원고 마지막 문단이 적힌 페이지를 망설임없이 뜯고, 마지막으로 카튜셰프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군요.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하! 자기 이름에 금칠을 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겠나? 장제스가 본인의 공적을 자랑하며 군벌들을 규합해 왕징웨이에게 도전하려 했을 때, 그리고 마오쩌둥이 허튼 짓을 하려 할 때... 오만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걸 내 좌우명으로 삼았네. 심지어 '그 트로츠키'조차 다 늙어서는 겸손의 중요성을 널리 설파하며 살지 않았나? 중화민국의 행정원장에, 일본의 경제고문에, 아무튼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결과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이것 뿐이구만."
카튜셰프는 샌더스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리고 미소지으며 무거운 조언을 남겼다.
"정치인이 되려거든, 언제나 처음 가졌던 그 마음가짐을 잊지 말게나. 선업이든 악업이든, 결국 자네에게 돌아오게 될걸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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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무리되었습니다!
가능하면 각 인물들의 후일담을 더 상세하게 적고 싶었지만, 시간의 압박과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의치 않았네요. ㅠㅠ
기회가 된다면 이후의 이야기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좀 더 상세하게 쓰고 싶습니다.
아무튼... 부족한 첫 컨텐츠이지만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에 그거 얘기하다 히틀러가 정권 잡음 가능성 있다 들은 기억만 있네요
흠… 자기들이 원하면 통일할 수는 있는데 판도 안이뻐져서 걍 따로살이한다고 가려고요. ㅋㅋ
+ 히틀러는 저번에 얘기했다시피 대학정원 확대 덕을 봐서 건축학과 졸업하고 고전주의가 아닌 모더니즘에 푹 빠져 바우하우스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특유의 강의전달력이 1타강사 수준이라 모셔갔다는 걸로.. (?)
현실보단 공부와 재능 다 괜찮은거네요?
정원 확대여도 진짜 공부 못하거나 재능 없음 못들어가는게 대학...
+ 건축학교 추천 받은 얘기는 본인주장이고 실제로는 재능 빈약이라고 평가 받았다나.
뭐 사족일뿐
공부재능 쪽에서 나름 상향을 받은 거죠. ㅋㅋ
교수 자리는 특유의 말빨이랑 정치능력 덕을 많이 봤겠지만?
일단 개인으로선 해피엔딩...
그런데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반기를 들어서 반왕전쟁을 일으켰다면 장제스는 뒤진건가요?
중국에서는 보통 개긴다고 해서 잘 죽이지는 않더라고요. ㅋㅋ
아마 장쉐량처럼 평생 가택연금 신세거나 어디 망명이라도 하지 않았을지…
그래도 장제스에게 복수하는덴 성공했군요. 아데나워 총리, 버틀러 총리. 천국에서 보고 계십니까? 제가 드디어 장제스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아니 뭐야 새글 알림이 최근이라 들어왔더니 번외가 올라왔네요 ㄷ 소련...너무 탄탄대로다...wto 대 소련 대 미국으로 다극체제가 발생해야 되는데!(?)
프랑스 혁명 실패했으면 얘기가 달라졌을텐데, 다극체제 만들려면 좀 임의전개를 많이 써야 했네요. ㅋㅋㅋ
1. wto 가입과 소련의 곡물 수입으로 급한불이 꺼진 뒤 기술력과 발전한 인문학으로 전간기-소조국전쟁동안 다시 유럽의 중심이 된 독일은 중국과의 공조로 자신들을 통제하려 하는 소련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소비에트에 국경은 없고 계급은 없다. 그런데 소련은 왜 우리의 위에 존재하려 하는가?'
2. 사회주의 연방이 된 미국. 미국은 미국이기 때문에 다시 최강국으로 돌아오는데...'미국이 미국함'
이라는 시나리오가 안되다니!!(..)
아무튼 즐거웠습니다 ㅋㅋ 가계도 저도 써보고 싶을 정도로 몰입했었으니 ㅋㅋㅋ
냉전처럼 대놓고 대립하진 않더라도 소련/서유럽/미국/중국 간의 알력은 어느 정도 있긴 합니다. 특히 미국은 럼스펠트-체니 듀오의 장기집권으로 권위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강한 편이라 인권, 환경 문제로 소련과 반목 요소가 있고요. ㅋㅋ
만민평등 소련 vs 권위주의 미국 ㄷㄷㄷ 대체 이 세계에는 무슨일이..
번외5: 스페인 혁명.
알제리로 쫓겨난 페탱의 프랑스 공화국 정통정부(알제 프랑스)의 전폭적 지원으로 리프 공화국의 독립을 막아낸 스페인 왕국 정부였지만, 내부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스페인 군사정권은 왕당파, 지주, 교회 등 보수주의자들과 공고한 연합을 유지하며 공화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지만, 철권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죠. 1930년 리베라 장군이 사망하고 나서는 더더욱.
결국 1932년 카를리스타들이 기존 군사정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자중지란의 상황에서 국왕 알폰소 13세는 민주 총선의 실시를 약속했습니다. 보다 능숙하게 정국을 운영할 능력을 가진 공업자본가 계층의 중도우파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계획이었지만... 일이 항상 그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죠.
선거구 개리맨더링, 후보자에 대한 백색테러, 선거조작 등 각종 더러운 수법들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거에서 승리를 가져간 것은 PSOE, POUM, PCE, CNT/FAI 등으로 구성된 좌익 인민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 산후르호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빨갱이'들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꼴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알폰소 국왕을 부추겨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죠. 이에 인민전선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카탈로니아로 긴급히 피신해 바르셀로나에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WTO 회원국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화국 정부를 승인하고 각종 지원을 보내자, 영국, 알제 프랑스, 이탈리아 역시 최선을 다해 의용군과 고문단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표트르 P. 간니발 군사대학의 우등생 엔리케 리스테르는 솔제니친 원수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고국으로 향해 파르티잔들을 지휘했죠. 독일에서는 에른스트 텔만 의용'사단'이, 소련은 다른 동지국들과 공조해 국제여단들을 보내며 전력 상 열위인 공화국을 도왔습니다.
해가 바뀌어 1933년이 되자 전선은 서서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오른쪽의 그림과 같이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측이 모스크바의 중재로 각 정파 간의 갈등을 적절히 조율하는 데 성공한 데 반해 왕국의 군사정부는 팔랑헤주의, 보수주의, 카를리스트 등 각종 분파로 어지럽게 나뉘며 분열을 일삼았습니다. 이는 1934년이 되자 전선에서의 차이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아나키스트 성향 혁명가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알폰소 13세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면서 내부 혼란이 가속화... 카를리스트의 반란 등이 이어지며 승기가 기울었습니다. (두루티의 암살이 어떻게 가능했는 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다양합니다. 혹자는 그와 막역한 사이인 우스트랼로프가 주도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KGI의 개입설을 지지합니다.)
결국 1936년 2월 14일, 반동 왕당파의 마지막 거점인 라 코루냐가 함락되며 내전은 종결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소련과도, 독일과도, 프랑스나 체코와도 다른 독특한 지방분권적이며 자치중심적인 체제를 구축하며 일명 "카탈로니아 모델"을 확립했죠. 이는 그들이 2차대전에서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이후 우스트랼로프 주석과 코시긴 장관, 바레츠노프 총서기, 발레리 사블린 콤소몰(청년단) 의장 등이 주도한 "구조개혁"에 커다란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모든 건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었죠.
레온-카스티야 대 아라곤-그라나다 전쟁 ㄷㄷ 과거 상인세력(?)과 마지막 레콩키스타 희생자인 세력이 레콩키스타의 주인공들과 대립하는게 재밌네요.
그나저나 간니발 군사학교 우수생 왜 저러나요 군사학교 이름 따라가네(..)
솔제니친: 자네는 여기서 더 배워야 하네. 사지로 기어들어가기에 자네는 너무 젊어!
리스테르: …동지깨서 겨울궁전을 습격했을 때 아마 제 또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기억이 틀린 겁니까? 원수 동지 역시 저와 같은 상황에서는 똑같은 결정을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솔제니친: …
대충 이러지 않았을까요? ㅋㅋㅋ
???: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어났었지. 갈거라면 최선을 다해 속전속결 하여 무고한 인민들의 희생을 막아야하네.
라고 했을지도요.
그리고 장기전. 리스테르 통한의 실패(?)
그런데 차기작으로 생각하신게 있으신가요? 손이 좀 근질근질 거리는데...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자유 프랑스, 구한말 조선, 냉전기 제3세계 국가 등등을 물망에 두고 있습니다. 언제 하게 될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단결을 위해서라면 자유 프랑스가 나을듯.
구한말 조선은 친청 친일 친러간 갈등이 상당할수 있고(시기를 잘 모르거니와 아니더라도 위정척사와 개화파간 갈등 등등이...)
냉전기는 더복잡해보이니.
하나로 단결할수 있고 간결한 목표를 원한다면
더구나 구한말 조선은 자료를 매우 빡세게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프랑스 쪽에 기우는 게 사실입니다. ㅋㅋ
당장 저도 얼마전에 연감 만드는데 실록 썼는데.
더 세부적인 내용을 요하는 이런류는...ㅋㅋㅋ...
+ 저도 실록이 한계고 승정원일기는...
음... 자유 프랑스라... 전 어쩐지 비시 쪽에서 부역하는 매국노가 끌립니다?
+ 그런데 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기나 임시정부는 무리일까요?
비시 프랑스는 분량이 부족해 보이는.
+ 버블경제 시기 일본은 다룰게 부족하고 경제 문외한은 할줄 모르게 될테고.
임시정부는 그나마?
80년대 일본은 몰라도 독립운동 쪽은 생각했었고 심지어 진지하게 고려도 했었습니다. 다만 한국을 배경으로 할 경우 배경설정이 조금만 어긋나도 어설프게 보일 수 있어서... 하려면 좀 더 능숙해지고 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네요.
매국 부역자라... ㅋㅋㅋ
그 플레이를 허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좀 갈등이 되긴 하네요.
비시정부 자체가 뭐 할수 있는게 없다는게 문제려나요.
- 영국놈들 지원을 받는 드골은 잔 다르크를 재판은 코숑 주교(프랑스인인데도 잔 다르크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와 다를 바 없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건 독일의 잘못이 아니다, 패배의 요인은 빨갱이들이 뒤에서 사보타주를 한 것 때문이다!
-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허나 프랑스와 독일이 힘을 합치는걸 두려워한 유대인들이 양국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든겁니다.
- 드골은 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해 위대한 대프랑스 제국을 역사책 속으로 처박아버릴 인간이요!
-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유럽을 구원하려는 독일의 성전을 도웁시다. 비바 프랑스! 하일 히틀러!
- 장! 빨리 피해! 배신자가 우리를 독일놈들에게 밀고했어!/그래? 그거 참 슬픈 일이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그 배신자인데?
이렇게 매국노 컨셉을 제대로 잡아 플레이를 해보고 싶은데...
뭐 컨셉질 자체가 목표라면 얘기가 다르긴 하지만요. 말하자면 중간보스 빌런을 맡겠다는 건데,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ㅋㅋㅋㅋ
https://cafe.daum.net/Europa/LPSd/7135
재밌는걸 올려봤습니다 ㅎㅎ..
저도 재밌는걸 하나... ㅋㅋ
https://m.cafe.daum.net/Europa/2oQs/17421?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