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조선의 도학 연원을 논하면서 절구(節義)와 장구(章句)와 문사(文辭)에
국한되어 있었던 종전의 학문 풍토에서 진정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천을 보여준
모범이 한훤당(寒暄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사(政事)의 사공(事功)도 그것을
제대로 행할 사람이 있으면 시행되지만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 정사도 종식되듯이,
도덕의 모범도 그 사람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것은 언어 문자의 그림자로 남을 뿐이다.
그렇지만 도덕을 성취한 사람이 사라져도 그가 배우고 익히던 도덕과 학문의 방향과
규모와 대체가 알려져 있고, 그림자로나마 그 성취한 도덕을 형용하여 전하는 말들이
남아 있는데다, 도덕을 성취한 그 사람의 덕행을 직접 보고 들으며 따라서 배우고
행한 자취가 면면히 이어져 간다면, 이를 통하여 그 본디의 모습을 상상하고 뒤쫓아
배우면 또한 크게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현록 상』에 수록된 「事實」과 「行狀」과 「敍述」은 한훤당의 도덕
학문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가장 충실한 근거이다. 「事實」은 구암 이정(李楨)이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한 초고본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이 한훤당의 손자인
김립(金立)과 외증손인 정곤수(鄭昆壽) 등의 기록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니,
대개 가전(家傳)의 전문(傳聞)을 근간으로 편찬된 것이다. 행장은 한훤당의 문도인
이적(李勣)이 서술한 것으로 그가 직접 견문한 학문과 교학(敎學)의 규모와 차서가
대략 언급되어 있다. 「서술」은 한훤당과 동년생으로 『소학』으로 율신(律身)한
한훤당의 ‘독행무비(獨行無比)’한 행적과 그 사우(師友) 및 문도들과도 교유가 있었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기록인 「추강냉화(秋江冷話」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발췌한 것이니, 당대 한훤당이 교유하였던 학자들 사
이의 여론을 대략 잘 보여준다.
남효온이 기록한 한훤당의 학문 요체는 서른이 되도록 『소학』에 침잠하여 옛날
성인을 준칙으로 삼아 자신의 몸을 닦아서 다른 사람들이 견줄 수 없는 독실한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평소에 그 자신의 몸가짐을 엄격하게 단속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자면서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였다. 그는 서른이 넘어 다른 책을
탐독하였으나, 세상을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었을 때 시국을 위하여 건백(建白)하도록
권하는 글을 올렸다.
남효온의 기록에는 또한 한훤당에게 『소학』을 배워 조행을 닦은 이현손(李賢孫),
윤신(尹信), 이적(李績), 허반(許磐), 민귀손(閔龜孫), 강소(姜訴) 등 문도들과, 한훤당과
지취를 같이 하였던 정여창(鄭汝昌), 안우(安遇), 이분(李坋), 노조동(盧祖同) 등의
조행(操行)을 함께 거론하여 놓았다. 남효온의 기록을 요약하면 한훤당은 남효온의
교우 인물 가운데 가장 모범이 되었던 인물로서, 그는 『소학』의 규범을 실천하여
율기(律己)의 조행(操行)이 독실하였고, 출처의 의리에 분명한 태도를 가졌으며,
후학들을 계도하는 데 부지런하여 그를 추종하는 문도들이 많았다.
이적(李勣)이 지은 한훤당의 「행장」에는 문하 제자들이 목도한 한훤당의 강학규모와
만년 행적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행장에서는 한훤당을 조선에서 ‘도학을 일으킨 유일한 사람[倡起道學 惟公一人]’이라 하면서, 그의 학문은 “날마다 『소학』『대학』을 외워 규모를 세우고 육경(六經)을 탐색하여, 성경(誠敬)을 견지하고 존양성찰(存養省察)을 체(體)로 하며 제치평(齊治平)을 용(用)으로 삼아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기약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에 배알한 다음 대부인에게 문안하고, 서재로 나와서 소상(塑像)처럼 꿇어앉아서 학자들에게 치심(治心)의
요령을 강론하고, 젊은이들에게 하학(下學) 공부를 말하고 어른에게는 의리를
강론하였으며, 저녁에는 다시 문안을 드리고, 밤이 깊어서 강론을 파하여, 이렇게
30여 년 동안 힘썼다”고 하였으며, 덧붙여서 “형조좌랑이 되어 옥송(獄訟)을 판결함에
지성으로 하여 모두들 공정함에 심복하였고”, “무오사화 뒤로 유배되어 평소대로
태연하게 처신하고 순천에서 조용히 죽음을 받았다”고 하였다.
퇴계가 정리한 한훤당의 「사실」에는 남효온의 기록과 이적의 「행장」에 기록된
내용을 포함하여 가정과 사우들이 전하는 견문을 토대로 제가(齊家)와 교유와
종명(終命) 등의 일화가 수집되어 있다. 명륜(明倫)의 도리로는 엄격한 모부인을
지성으로 섬긴 일화가 있고, 「가범(家範)」을 지어 자손에게 훈시하였는데 그중
내외의 직분을 분간하고 상벌을 시행하며 매달 삭망(朔望)에 독법(讀法)의 예를 직접
시행한 일을 특별히 드러내었고, 증조비 곽씨(郭氏)의 선세(先世) 분묘를 수호하는
일로 각씨(郭氏) 일족에게 분묘 수호를 겸하여 묘제(墓祭) 및 강목(講睦)의 규례를
깨우친 일, 그리고 일두 정여창과 도의를 서로 강론하였으며 금잔(金盞)을 두고
깨우친 일화를 적어 놓았다. 마지막에는 갑인년(1494) 유일(遺逸)로 천거된 이후 관직을 지내며 직분에 충실하였던 일과, 갑자년 순천에서 종명(終命)할 때 손으로 수염을
입에 물고 형을 받은일화를 들어 놓았다.
『경현록』 원집(原集) 맨앞에 수록된 이 세 가지 문헌의 내용은, 대개 한훤당의
언행과 그 학문 강학의 규모 및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법도를 묘사한 것인데,
그 내용은 모두 유가의 고대 경전과 성리학의 사상 이념에 근거를 둔 것으로
『소학』 및 『가례』에 그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대략 제시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한훤당의 도학 전형과 관련하여서는, 『소학』의 규범에 따라 처신에
엄격하였다는 점, 날마다 『소학』 『대학』을 외어 학문의 규모를 정하여서
가르쳤다는 점, 그리고 『가범』을 지어 자손을 훈계하고 직분을 나누어 삭망에
독법의 예를 행하였다는 점 등 몇 가지 사례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몇가지 사항은 한훤당의 출현으로 인하여 나타난 조선전기 학문 사상 내지
사회 기풍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