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기독교 - 평택지역
대한성공회 팽성교회
평택시 팽성읍 송화리 778-2 소재한 대한성공회 팽성교회(2009년 당시: 관할사제 최승철 신부)는 1906년 설립됐다.
평택지역에 팽성교회가 설립될 당시 영국에서 파송된 브라인드 신부가 성공회 수원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선교구(전도구)를 주축으로 평택지방까지 선교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팽성교회는 팽성읍 송화리의 옛 지명인 평택 객사리에 속해 있어 ‘객사리교회’라고 불려왔다.
“100년 전부터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옛날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지나가는 길손이 해가 저물면 나그네가 머물다간 마을이라고 해서 ‘객사리’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며 “선교 초기 팽성교회는 한옥으로 지어져 이 마을의 초가집, 기와집과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평택 고장의 종교 문화적인 중심지로서 인생길을 가는 고단한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라고 최승철 신부는 말한다.
이러한 팽성교회가 속해 있는 평택지방 개신교 선교는 비교적 늦게 이루어 졌다.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1884년 최초의 선교사 알렌이 인천항으로 입국했고, 1885년 미국장로교 외국선교회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등이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됐다.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류성민 교수는 “경기도에서 개신교 교회가 설립된 시기는 개신교 전래 초기인 1890년,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 언더우드가 인천에 설립한 ‘내리교회’가 최초이지만 행정 구역상 경기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는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튼 목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튼이 1893년 설립한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에 소재한 ‘장지내교회’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1904년 최초로 평택에서 설립된 교회가 서탄면 회화리의 회화장로교회로서 선교가 뒤늦게 이뤄진 셈이다.
그 이유는 선교사들의 활동범위가 서울 주변 및 서북지방에 집중됐고, 선교 방향이 교육 및 병원선교 중심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경기남부 최남단인 평택지방까지 선교활동이 미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록에는 평택 최초의 회화교회가 창립된 후, 1919년까지 서탄교회, 서남교회, 오성교회 그리고 객사리성공회교회 등이 창립됐지만 객사리성공회교회를 제외하고는 초기 교회의 근간을 확인할 수 없다.
그 후 평택지방에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 것은 3.1운동 전후로 개신교 선교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1920년대 부터였다.
이 시기 서정감리교회를 비롯해 평택성결교회, 나사렛성결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1930년대에는 평택나사렛교회, 진위장로교회가 창립됐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회복되면서 감옥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풀려났고, 해외에 망명했던 목사와 신앙인들이 귀국하면서 기독교 선교는 크게 활성화됐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정비하고 신학교를 세웠으며, 목회자를 양성하여 전국에 파송했고, 이들은 문명과 떨어진 산간벽지 마을과 오지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복음 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국교회사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평택지방은 1904년 설립된 회화장로교회에 이어 서탄교회, 서남교회, 오성교회 등 초기교회가 설립되었으나, 초창기 교회에 대한 아무런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06년 설립된 성공회 ‘팽성교회’가 평택지방의 개신교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팽성교회는 성공회 수원교회 선교구(전도구)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당시 수원에는 브라이들 신부가 파송되어 활동하고 있어서 평택지방까지 선교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초기에는 성직자의 수가 모자라서 경기남부지역의 경우에는 수원교회를 본당으로 각 지역에 집회소를 두고 브라이들 신부가 순회하며 예배와 집회를 열었다.
당시 팽성교회에는 관할 사제가 없었고 김인순 전도사와 수녀 3명이 거주하며 신자들의 신앙 활동을 돌봤다.
그리고 1908년 전국을 4개의 선교지역으로 나눌 때 팽성교회는 수원교구(전도구)에 속했으며, 1909년에는 박사라 전도사가 파송됐다.
그 후 1910년 강베드로 신부, 1911년에 구세실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훗날 주교가 됐다.
이 시기 초기개신교가 그렇듯이 성공회의 선교방법은 교육과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성공회 수원교구(전도구)의 경우 진명학교를 중심으로 교육선교가 활발했기 때문에 팽성교회에서도 교육선교가 평택지방의 모토(motto)를 이루었다.
팽성교회에서 신명강습소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910년대 초 구세실 신부의 부임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성공회 팽성교회 부설 신명학교는 객사리 부용초등학교보다 먼저 설립되었기 때문에 근대교육시설이 전무했던 1910년대 팽성읍 지역 근대교육의 선구자일 수밖에 없었다.
즉 팽성교회는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학교를 가지 못한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 신명강습소를 열어 현대식 교육을 시키는 등 문맹퇴치에 앞장섰던 것이다.
당시 팽성교회의 신명강습소 교사였던 강태분(88) 여사는 “많은 사람들이 신명강습소를 다니며 공부했는데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이 있어요.
저도 강습소에서 야학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글을 가르쳐 주었죠”라며 “그 옛날 성당 울타리 벽은 돌로 꽃무늬를 넣어 세웠고 조선기와를 위에 올린 모양이었어요.
담 벽에는 해당화 나무가 빨갛게 피고 안에는 모란과 백합이 환하게 피어 향내를 피웠으며 성전 안에는 4개의 꽃병에 항상 꽃을 꽂아 두고 있어서 성당 문을 열 때면 꽃향기에 취하곤 했지요”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팽성교회와 함께 백발이 된 그녀의 기억은 초기 팽성교회의 그리스도 향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팽성교회에 이어 1936년에는 객사리 성 요한교회가 건축됐다.
이 교회는 한옥모양의 외형에 내부는 바실리카양식을 한 강화읍 교회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점이 특징이다.
성공회 팽성교회보다 조금 늦은 1908년 안중면 덕우리에 성공회 덕우리교회가 설립됐다.
설립 후 덕우리 교회는 선교상의 어려움 때문에 1910년대에 서부지역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하던 안중으로 교회를 이전했다.
성공회 안중교회는 1934년에 교회를 건축,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안중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해방 전·후기에 23년 동안 시무하였던 박병무(어거스틴) 신부였다.
박 신부는 성공회의 교육선교 전통에 따라 안중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운영하였고 이 학교가 지금의 안중 중·고등학교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게재일 : 2007.08.27
출처 :서평택아름다운사람들 글쓴이 : agenda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