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7대 1로 녀석들과 붙었을 때"
영화 ‘비트’에서 임창정이 이 대사를 내뱉었을 때 이처럼 널리 쓰이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17대 1'이라는 말은 혼자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을 뜻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돼 버렸다. 학창시절 우리학교 잘 나가는 형이 옆 학교 아이들 여러 명을 혈혈단신 맨주먹 하나로 쓰러뜨렸다는 류의 전설적인 이야기 하나쯤은 아마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묘한 대리만족, 무협지나 홍콩 영화의 주인공을 대하는 듯 한 경외감, 그리고 두려움 같은 복잡다단한 느낌들이 동시에 떠올랐던 것 같다.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동명의 웹툰을 각색한 영화 '전설의 주먹'은 바로 그 전설의 17대 1의 주인공, 왕년에 잘나갔던 주먹들의 현재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리얼리티 격투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이름 하야 '전설의 주먹'. 학창 시절 날고 긴다던 주먹의 전설들을 발굴해 진짜 격투 무대에 세우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다. 예전에는 잘 나갔다지
만 세월과 세파에 찌든 왕년의 주먹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 방송국에선 뭔가 한 방을 터뜨려 줄 출연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학창시절 88올림픽 복싱 유망주로 기대를 받았던 국숫집 사장 임덕규(황정민)도 이 프로그램의 출연 제의를 받지만, 주먹질 같은 건 안 한다며 출연을 거절한다. 그러나 혼자 키우던 딸이 사고를 쳐서 급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에 부닥치고, 결국 우스꽝스럽게만 여기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다. 첫 출연 무대에서 현직 격투기 선수를 쓰러뜨리고, 연전 연승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덕규. 하지만 과거 한 패거리로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도전해오며 그의 암울했던 과거들도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강우석 감독은 스릴러의 성격이 강했던 원작과 달리 영화를 철저히 중년 남성들의 현실 드라마로 바꿔놓았다. 기러기 아빠로 아이의 학비를 안정적으로 대기 위해 고교 동창인 회장의 온갖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하는 상훈(유준상)과 친구를 때린 딸을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하고, 기꺼이 쇼에 나가 구경거리가 되는 덕규에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준수한 액션 영화로, 사회드라마로 쏠쏠한 재미를 주는 전설의 주먹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마지막 처절했던 격투신이나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이 아닌, 짧은 시간 등장했던 덕규의 동창회 장면이다. TV를통해스타가 된 덕규가 동창회에 나가자 동창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처음엔 스타로 돌아온 친구를 반가운 듯 맞아줬지만, 이내 가슴속에 담아뒀던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 괴롭혔던 이유를 묻자 "그냥 장난이었지"라는 덕규의 답에"기억이란 참 편리하다"는 친구의 비아냥이 돌아온다. 옆 학교 아이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다 덕규의 도움으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던 친구는"난 너한테 하나도 고맙지 않다."고 쏘아 붙인다. 도움을 이유로 당한 괴롭힘과 하대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장면은 40대 가장의 성공신화로 흘러갈 것만 같던 영화의 빤한 스토리를 국가대표 선발에 실패하고 망가지던 덕규의 어두웠던 과거의 이야기로 되돌려 놓으며 극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폭력이라는 것이 사람의 삶과 마음에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임팩트 있게 전달한다.
아이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둘렀던 덕규에게도 그만한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다. 조직 폭력배들과 싸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덕규는 주먹의 전설이 됐을지 모르지만, 그의 폭력에 상처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그저 악몽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남은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과거에 가해자였던 덕규와 달리 딸은 왕따 피해자로 나오는 설정 또한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던 폭력이 어느 순간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폭력이 효율적인 수단처럼 인식될 때도 있지만,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또 다른 폭력으로 재생산 되었을 뿐이다. 폭력이 전설로 포장될 수는 있지만, 결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전설의 주먹이 강우석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폭력을 손쉬운 재밋거리로 삼지 않고 사려 깊은 연출을 했다는 점에서, 감독이 '공공의 적'에서 몇 걸음 전진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