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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6 ❏문화재지정: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호(1972.05.04지정) ❏배향인물: 오두인(吳斗寅) ❏창건연도: 1695년(숙종 21) ❏사액연도: 1695년(숙종 21) ❏향 사 일: 음력 2월, 8월 중정일 |
덕봉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숙종조의 문신인 오두인(吳斗寅)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창건된 해에 사액되었다. 1794년(정조 18)에 강당인 정의당(正義堂)을 중수하였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1979년에 사당이 중건되었으며, 동·서재는 1940년에 훼손되었다가 1984년에 중건되었다.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오두인(吳斗寅, 1624∼168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정방(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겸(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翔)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효길(孝吉)의 딸이다. 숙부 숙(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년(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650년(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년(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에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 당하였다.
이 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도중 파주에서 죽었으며,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건물로는 사당, 내삼문, 강당, 동·서재, 외삼문, 홍살문 등이 있고, 숙종이 하사한 현판이 남아있다. 사당의 편액은 덕봉사우(德峰祠宇)로 되어 있으며, 안에는 오두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 특이한 것은 서원 내에 정려각이 건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동재 바깥에 위치한 정려각에는 오두인의 충신정려와 생원 오관주(吳觀周)의 효자정려가 모셔져 있다.
오두인의 충신정려는 1694년 윤5월에 내려진 것으로 ‘충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행 정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오총관 증시 충정공 오두인지문(忠臣 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行 正憲大夫 刑曹判書 兼 五衛都摠府 五總管 贈諡 忠貞公 吳斗寅之門)’이라 새겨져 있다.
덕봉서원은 강학공간인 강당영역과 제향공간인 사당 영역으로 구분되어 전학후묘(前學後墓)의 배치 형식을 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강당 뒤에 재사가 있는 전당후재(前堂後齋)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강당인 정의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중앙에 3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며, 양쪽으로는 협실 각1칸이 뒤쪽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두 칸은 온돌과 한 칸은 부엌으로 되어 서로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제향공간의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중앙에는 숙종이 하사한 ‘덕봉사우(德峰祠宇)’현판이 걸리었다. 사우 앞의 내삼문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을 한 평삼문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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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
유형 |
시대 |
크기 |
재질 |
비고 |
1 |
현판(오두인충신정려) |
현판 |
1694 |
206×33 |
목재 |
충정공 오두인의 충신정문 |
2 |
편액(상량문) |
현판 |
1695 |
80×173 |
목재 |
덕봉사우 상량문 |
3 |
현판(오관주효자정려) |
현판 |
1766 |
182×83 |
목재 |
성균생원 오관주의 효자 정문 |
4 |
감실 |
제구 |
조선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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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
양곡 오두인 선생의 위패를 덮은 감실 |
5 |
위패 (양곡 오두인 선생) |
위패 |
조선후기 |
40×12.7×2.5 (높이×가로×세로) |
목재 |
양곡 오두인 선생의 위패를 모신 교의 |
6 |
교의 |
제구 |
조선후기 |
163×104×69 (높이×가로×세로) |
목재 |
오두인의 사우에 걸린 편액 |
7 |
편액(德峰祠宇) |
현판 |
조선후기 |
274×93 |
목재 |
오두인의 사우에 걸린 편액 |
8 |
편액(正義堂) |
현판 |
19세기 전반 |
130×71 |
목재 |
덕봉서원의 강당 정의문에 걸린 편액 |
금상(今上) 15년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중궁(中宮,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이 손위(遜位)하니, 판서(判書)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공이 참판(參判) 이세화(李世華)공과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공 등 80여 인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상서(上書)하여 극간(極諫)하였는데, 오공이 기실 수장이었다.
임금은 진노하여 세 사람을 모두 곤장으로 다스리고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오공은 파주(坡州)에 이르러 박공은 노량강(露梁江)에 이르러 모두 도중에서 졸(卒)하였으며, 홀로 이공만이 죽지 않았다. 6년 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임금이 지난 일을 크게 후회하여 중궁을 복귀시켰다. 그리고 두 공이 충성으로 죽은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관리를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오공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으며, 박공에게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였다. 정려(旌閭)하여 ‘충신의 문[忠臣之門]’이라 하고, 사당을 세워 두 공을 제사지내자는 의견도 모두 들어주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감탄하여 울면서 천도(天道)가 안정된 것을 경하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혹자는 두 공을 슬퍼하여 이공이 죽지 않아서 곤위(壼位)가 복귀 된 것을 본 것만 못하다고 한다. 군자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 신하가 국모(國母)를 위하여 죽는 것은 대의(大義)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를 실천한 자들이 드물었다. 두 공이 간쟁으로 죽음으로써 이 대의가 비로소 밝아졌다. 대저 간쟁하다가 혹 죽고 혹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이 한 것이다. 그러나 두 공이 죽지 않았던들 그 공렬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사람을 감동시킴도 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공이 반드시 죽은 이후에야 당시의 조정 신료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었고, 간사한 자들의 화심(禍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일의 재앙이 어찌 여기에서 그쳤을 뿐이랴? 또 성인(聖人)의 과실은 비록 일식과 월식 같다 하지만, 그러나 그 허물을 고침이 금일처럼 빨랐던 적이 없었으니, 또한 두 공의 죽음이 먼저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리오? 이러한즉 지금이 된 것은 참으로 두 공이 한번 죽은 힘 때문이거늘,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또한 말단적인 것이 아니랴?
오공은 자(字)가 원징(元徵)이며, 해주(海州) 사람이다. 그 사람 됨됨이가 차분하고 중후하였다. 속여서 꾸미는 걸 일삼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총민하여 문장이 있었다. 10살 때 황고(皇考) 천파(天坡)공 오숙(吳)을 따라서 해주에 갔는데, 명(明)나라 사신인 부총(副摠) 정용(程龍)이 와서 공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운자(韻字)를 주어 시(詩)를 짓게 하니, 공이 붓을 당겨 즉석에서 ‘한정(漢程)’이라는 글자를 써서 알지 못하게끔 비유를 하니, 정공(程公)이 크게 경탄해 하며 진귀한 선물을 두터이 내렸는데, 공이 다 사양하고 다만 부채 하나만을 받으니, 정공이 더욱 중히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 얼마나 크게 될지 헤아릴 수 없도다.” 하고 그 시를 ≪황화집(皇華集)≫에 실으니, 공의 이름이 이에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자년(戊子年, 1648년 인조 26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여 드디어 상사(上舍, 성균관)에 올랐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에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거쳐서 누차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효종(孝宗) 때 각지에서 노비를 추쇄(推刷)하였는데, 그 단속이 매우 엄하고 급했다. 삼남(三南) 땅에는 영장(營將)을 두어서 자주 조련을 행하였다. 또 대비[東朝]를 위하여 궁전을 수리하려 하였다. 공은 정언으로서 재앙을 인하여 상소하여 그 폐해를 하나하나 거론하였다. 얼마 뒤 또 동료들과 차자(箚子)를 올려 추쇄를 느슨히 하고 형옥(刑獄)을 불쌍히 여기며 간쟁을 받아들여 신하들을 힘쓰게 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그 충언을 칭찬하여 간신(諫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형옥의 일을 인하여 임금이 미안(未安)한 뜻을 보이니, 공은 상소하여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임금이 여러 간관(諫官)들을 불러서 위로하고 자신이 실언(失言)했다고 스스로 허물하니, 공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사례하고 이어서 시폐(時弊)에 대해 아뢰기를 다시 앞의 차자와 같이 하고, 또 내구마(內廐馬) 친림(親臨)에 도보로 하는 실수를 말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유철(兪)이 간언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건드려 형벌을 받고 먼 곳으로 귀양 갔다. 공이 지평으로서 누차 이에 대해 간쟁하니, 임금이 노하여 면직시켰다. 정언(正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궁노(宮奴)가 곤장을 맞고 죽으니, 내사(內司)에서 형조의 관리를 죄줄 것을 청했다. 공은 ‘내관(內官)이라 이르고서 해리(該吏)를 죄줄 것을 청하니, 이런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되겠다’ 하고 계(啓)를 올려 죄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현종(顯宗) 때 헌납(獻納)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ㆍ절검(節儉)ㆍ전학(典學)ㆍ예현(禮賢)을 청했고, 또 시폐(時弊) 몇 가지를 아뢰었는데, 모두 가납되었다. 임금이 장차 열무(閱武, 열병(閱兵))하려 했는데, 공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천재가 거듭 나타나서 기근이 들고 염병이 도니, 마땅히 출입의 절도를 삼가서 수성(修省)의 실질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금부(禁府)에서 마땅히 형옥(刑獄)에 처해져야 할 죄수에 대해 상주하면, 임금이 특지(特旨)를 써서 죄의 경중을 삼았는데, 공은 사간으로서 그 옳지 못함을 말하였고, 또 금부를 탄핵하여 ‘상주한 것을 고집하지 못하여 유사(有司)의 체모를 잃었다’고 하니, 임금이 노하여 면직시켰다. 뒤에 또 집의(執義)로서 무지개의 변이(變異)를 인하여 상소하여 아래와 같이 극언하였다. “재이(災異)가 혹심하거늘, 상하(上下)는 무사 태평에 젖어 직무에 게을리 하고 정령(政令)은 고답적입니다. 마땅히 우선 학문에 힘써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름으로써 하늘을 섬김을 수성(修省)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대 조종(祖宗)의 현자를 불러들여서 물어보는 근면함을 본받아서 상하의 마음을 통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노비에 대한 허위의 기록이 그 침해가 겨레와 이웃에까지 미쳐 지금 팔도의 지극한 폐단이 되었는데, 마땅히 속히 사정(査正)을 행하여 백성들의 곤경을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대비께서 연회를 베풀고 온천에 가시는 것은, 비록 모두가 부득이한 일이지만, 그러나 또한 일을 따라서 씀씀이를 줄여 백성들의 힘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판결이 지체되어 있는 옥사들을 빨리 처리하여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 주고, 언로(言路)를 열어서 충언과 직언을 받아들일 것을 청했다. 이렇게 반복하여 간절히 아뢴 말이 수백언(數百言)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청(淸)나라 사람들이 우리가 약조(約條)를 위반했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서 어떻게 갑작스레 속환(贖鍰)의 벌을 덮어 버렸는지를 물으니,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탄핵하기를 ‘대신(大臣)들이 죽음으로 스스로 감당치 못하여 치욕을 임금에게 미치게 했다’고 하니, 임금이 대노하여 언자(言者)들을 모두 내쫓아버렸고, 승지가 이와 관계해서 아뢰니 또 형리에게 내려보냈다. 공은 바야흐로 옥당(玉堂)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으로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고, 이튿날 또 동료들과 더불어 대면을 청하여 극론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공의 생각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서 물러나 다시 차자를 올려 이 문제에 대해 간언하였다. 뒤에는 또 여러 신하들을 복위시킬 것을 청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했으나 임금의 답을 받지 못하였다.
공은 전후로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에 있은 것이 가장 많았고 또 시간적으로도 길었다. 일을 만나 시비(是非)를 들어 논할 때에는 노여움을 무서워하여 피하지 않았으며, 또한 폭로와 비방을 능사로 삼지도 않았다. 다만 바로잡아서 구제하는 것을 오로지 주장할 뿐이었다. 그 사이에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ㆍ문학(文學),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ㆍ사성(司成),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의 정(正)이 되었다. 두 번이나 사국(史局)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과 ≪효종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을 띠었다. 외직으로는 경상 도사(慶尙都事)ㆍ고산 찰방(高山察訪)ㆍ해운 판관(海運判官)ㆍ북청 판관(北靑判官)ㆍ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으며, 그 사이에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또 호남 지방의 어사(御史)가 되었다. 그가 경상 도사가 되었을 때 영남의 유생(儒生)들이 시장(試場)을 두 번이나 혼란에 빠지게 했으므로 특별히 공을 파견하여 가서 진무(鎭撫)하게 했는데, 끝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 고산 찰방이 된 것은 일찍이 경망한 한 현관(顯官)을 배척했는데, 이조(吏曹)에서는 그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도리어 공을 내친 것이었다. 북청 판관으로 나간 것은 장령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경성(京城)에는 무뢰배들이 서로 결탁하여 칼로 싸움을 벌여 난동을 피운 일이 발생했는데, 공이 관리를 시켜 체포케 하니 왕손(王孫) 집안의 사내 종도 체포된 무리 속에 있었다. 공에게 그의 처지를 봐달라고 부탁했으나 공은 들어주기는커녕 감독하여 다른 무리들까지도 체포하기를 더욱 엄히 했다. 하루는 지평(持平) 민유중(閔維重)공과 함께 퇴조(退朝)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민공의 마부를 때려 상처를 내었다. 공은 왕손 집안의 그 종이 공을 원망하여 해치려다가 잘못 적중시켰음을 알고 바로 민공과 함께 관청에 앉아서 급속히 체포하여 신문하다가 끝내는 곤장 아래 죽게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노하여 모두 체직을 명했으나, 얼마 뒤 후사(喉司)의 말을 듣고 복귀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또 동료 대관(臺官)이 임금의 분노를 격발시킨 것을 인하여 모두 체직되어 외읍(外邑)에 보임되었다. 대신 및 삼사에서는 서로 이어서 힘써 간쟁했으나,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공은 그날로 부임하여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였으며, 좌천을 개의치 않았다. 호남 어사가 되어서는 명을 받들어 여러 진(鎭)들의 군실(軍實)을 살피게 되었다. 도신(道臣, 관찰사)이 한 읍재(邑宰)에게 사정을 두어 전에 이미 병기(兵器)에 관련된 일로 포상하여 아뢰어 녹질(祿秩)을 올라가게 하였고, 또 공에게 부탁하여 잘 봐달라고 하였다. 공이 그 읍에 이르러 보니 들은 바와 상치되는지라 바로 보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간신(諫臣)들은 공이 도신(道臣)마저 탄핵치 않은 것을 문제삼았지만, 분분한 의론이 그치자 이윽고 서임(敍任) 되었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영녕전 수리 도청랑(永寧殿修理都廳郞)으로서 그 공로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바로 곧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순서를 따라서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얼마 뒤 상소하여 한 고을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에 온 정성을 쏟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니, 드디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부임하여서는 지방 호족들을 억제하고 외롭고 불쌍한 이들을 구휼하였으며, 자제들을 가르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특히 스스로 절약에 힘써서 곡물을 축적하였다. 때마침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의 대기근을 만났는데,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진휼하니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모면하였다. 조정에서는 다른 고을의 유민(流民)들을 받지 말라고 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더욱더 숙박소를 설치하여 이들을 대접하여 먹이니 온전히 살아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도신(道臣)과 어사(御史)가 포창하여 아뢰니, 조정에서는 말을 하사하였으며, 또 더 유임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의 소원을 따랐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병조(兵曹)의 참지(參知)와 참의(參議), 승지(承旨)가 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년)에 명성 대비(明聖大妃)가 병이 들었다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었는데, 공은 시약(侍藥)의 공로로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진하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참판(參判), 행판결사(行判決事)를 거쳤다. 그 사이에 부사(副使)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여 역옥(逆獄)을 국문하는 데 참여하여 한 자급(資級)이 승진되었으며, 도승지(都承旨),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쳤다. 그 사이에 외직으로 나가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 겨울에 특별히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으나 얼마 뒤 체직되었다.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상(喪) 때에 감동(監董)한 공로로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었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 외직으로 나가서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었는데 정사에 근면하였다. 은혜로우면서도 위엄이 있고, 녹봉 외에는 실 한 올도 사사로이 하지 않아서 그 지방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의 청렴함을 칭송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공의 셋째 아들[中子] 오태주(吳泰周)가 현종 대왕의 딸인 명안 공주(明安公主)와 결혼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 여름에 공주가 졸(卒)하니 임금이 공에게 특명을 내려 평안 감사직을 그만두고 돌아오게 하였으며, 드디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봄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다.
공은 젊어서 장원 급제로 벼슬에 나아가서 여러 청화(淸華)의 직을 두루 거쳤으나 본성은 겸손하였고, 또 당파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미워하여 늘 굳세게 자신을 지키며 오르락내리락하거나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오직 날마다 문닫고 책만 볼 뿐 발론하여 세상에서 명성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이 까닭에 통정 대부(通政大夫)가 된 이후로는 대부분 한직(閑職)에 있었으며,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고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해 하여 조정의 시의(時議)에는 일체 참여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뭇 소인들이 정권을 잡고서 연달아 큰 옥사를 일으켰는데, 공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서 세 번이나 소환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기고 국좌(鞫坐)에) 나아가지 않아서 하옥[下吏]되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4월에 임금이 하교하여 중궁(中宮,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을 폐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네 임금[四朝]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욕되이 경재(卿宰)의 지위까지 올랐다. 지금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죄폐(罪廢)되었다 하여 침묵을 깨고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편지를 써서 동지 수인과 회합하여 함께 상소할 것을 의논하였다. 박태보(朴泰輔)공 또한 바야흐로 여러 명사(名士)들과 회합하여 이 일을 의논하다가 공이 있는 곳을 듣고서는 바로 와서 회동하였다. 어떤 이가 “상소문의 말이 너무 과격하면 무익하고 유해할 것이다.”라고 하니, 공은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거늘, 죽음을 어찌 근심하리요?”라고 하였다. 상소문이 들어갔으나 저녁이 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않아서 여러 공들은 모두 대궐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이세화(李世華)공이 “우리들이 비록 파산(罷散) 중에 있더라도 또한 하나의 외조정(外朝廷)인 것이니, 상소 한번만으로 중지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우리들의 소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며 “아마도 공의 말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경(二更)이 되자 임금이 갑자기 가마[步輿]를 타고 인정문(仁政門)을 나가면서 재촉하여 정국(庭鞫)을 베풀라고 명하니, 유사(有司)가 공급(供給)하느라 겨를이 없고 대궐 안팎이 진동하였다. 공과 이세화공이 먼저 체포되어 들어갔고 박태보공이 그 뒤를 이었다. 좌우에서 보던 자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실색(失色)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또 늙고 병들어 몸이 파리하여 사람들이 더욱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나 공의 거동은 편안하고 조용한 것이 다른 날과 다름이 없었다. 이때에 임금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화가 어디에까지 미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은 둘러싸서 쳐다보기만 할 뿐, 말 한 마디조차 꺼내지 못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은 도리어 공의 상소문을 흉참(凶慘)한 것이라 하였다. 공은 이에 고문을 받아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말의 조리를 끝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튿날 사형을 감하여 의주(義州)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옥을 겨우 나서자 경성(京城)의 사녀(士女)들이 길을 메우고 떠들썩하게 지껄이며 다투어 편여(箯輿, 대로 엮어 만든 가마)로 나아가서 충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알든 모르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 없었다. 이때 공의 나이 66세였다.
공의 신장은 6척이 채 안되었으나 용모는 따뜻하였고 입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 같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변고를 만나면 문득 충절(忠節)에 스스로 서서 신하의 도리를 주장하고 인륜을 부축하였는데, 백대에 전할 만한 것이었다. 군자(君子)들은 이에 공에게는 굳게 지키는 것이 있음을 믿었다. 상소의 일을 의논할 때에 혹자가 공의 처지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 의당 앞장서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자제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울면서 간했으나, 공은 모두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혹 공은 단지 벼슬이 높았기 때문에 앞줄에 섰을 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강개 발분하여 능히 스스로 죽음을 결단하기를 이와 같이 했음을 어찌 알리오?
공의 증조부 휘(諱) 정방(定邦)은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여 신료들의 조정에서의 의논을 위협하였으나, ‘신(臣) 무부(武夫)는 다만 ≪사략(史略)≫ 제1권의 순(舜)이 효(孝)로써 가족들과 화합하여 그들을 차츰차츰 선(善)으로 자신을 다스리게 해서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한 구절만을 읽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그를 장하게 여겼다. 조부 휘 사겸(士謙)은 종친부 전적(宗親府典籍)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효(孝)로써 이름이 났다. 천파공(天坡公) 휘 숙()은 벼슬이 경상 감사(慶尙監司)에 이르렀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문장과 정사(政事)로 이름이 드러났으나 일찍 죽었기에 그 재능이 다 쓰이지는 못하였다.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니,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성길(李成吉)의 딸이다. 공은 실제로는 천파공의 아우인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오상(吳翔)의 아들이다. 이씨 부인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취하여 후사로 삼은 것이다. 공은 세 번 장가를 들었다.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서(判書) 민성휘(閔聖徽)의 딸이다.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학생(學生) 김숭문(金崇文)의 딸인데, 모두 정경 부인에 추증되었다.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부사(府使) 황연(黃埏)의 딸로서 정경 부인에 봉해졌다. 공은 5남 6녀를 두었다. 아들 오관주(吳觀周)는 생원(生員)이었는데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군수(郡守) 남택하(南宅夏)에게 시집갔는데, 이들은 민씨 소생이다. 아들 오정주(吳鼎周)는 벼슬이 직장(直長)이며 딸은 요절했는데, 이들은 김씨 소생이다. 아들 오태주(吳泰周)ㆍ오진주(吳晉周)ㆍ오이주(吳履周) 그리고 딸은 현감 김창설(金昌說), 수찬 최창대(崔昌大), 김영행(金令行), 이재(李縡)에게 시집갔는데, 이들은 모두 황씨 소생이다. 남택하는 남도규(南道揆)와 진사 남도진(南道振) 2남을 두었으며, 1녀는 민승수(閔承洙)에게 시집갔다. 김창설은 2남 2녀를 두었고, 김영행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효도에 독실하여 대부인(大夫人)을 50년간 모심에 조금도 그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늙어서는 중부(仲父) 지사공(知事公, 오빈(吳))을 섬겼는데 예절이 심히 갖추어졌다. 평생 가산(家産)에 대해 묻지 않았고, 뇌물을 주는 자와는 통교를 하지 않았으며, 종족으로서 집에서 밥 먹는 자가 늘 10여 인에 달했다. 관직 생활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범할 수 없었다. 늘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선배(先輩)들의 좋은 점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듣는 자들은 피곤함을 잊을 정도였다.
공은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5월 7일에 졸(卒)하였으며, 7월 9일에 양성(陽城) 천덕산(天德山) 선영의 손향(巽向)의 자리에 묻혔다. 나는 젊어서는 공과 익숙히 알지 못했으나, 나의 (셋째) 딸이 공의 아들 오진주(吳晉周)와 부부가 되었다. 지금 도위공(都尉公, 오태주(吳泰周))이 묘 앞에다 비를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남을 위하여 묘명(墓銘)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평소 알고 있지만, 한 집안사람들에게는 모두 거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아우가 그대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감히 이것에 기대어서 청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누차 사양을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고인(古人)들은 사람을 관찰할 적에 반드시 그 끝이 어떠했는가를 살폈다. 선비가 평소에는 자신을 꼿꼿이 세우고 있지만 변고에 임하면 자립(自立)하고 있는 이 드물거늘, 공은 순순(恂恂)하시어 안으로 굳게 지킴이 있었다. 자랑하지 않으시고 꾸미지 아니하시며 남과 경쟁하여 치달리지 아니하셨다. 퇴연(退然)히 물러나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했지만, 의(義)로써 떨쳐 일어났을 적에는 맹분(孟賁)ㆍ전저(專諸)의 (용력으로도) 그 용감함을 뺏을 수 없었다. 그 의(義)는 무엇이었던가? 왕후를 부축하는 것이었다. 조정에 가득 찬 신하들이 나라의 화를 자기의 다행으로 여겨 바르지 못한 자를 돕기를 불에 기름을 붓듯이 하였다. 공은 그 뜨거운 불꽃을 범하여 자신의 죽음을 충성과 바꾸어 이 윤상(倫常)을 바로 세워서 저 간흉(奸凶)들을 징계하였다. 나라는 이로써 바로 서게 되었고 도리는 이로써 끝내 어그러짐이 없어서, 임금의 마음이 뉘우치시기를 해가 빛나는 듯이 하셨다. 빛나고 빛나는 요적(褕翟, 왕후의 옷)이여! 우리들의 왕후를 복위시키시고 왕께서 이르시길, ‘아! 충신을 내 생각하노라.’ 하셨다.
무엇을 추증하셨는가? 상공(上公)의 높음이로다. 무엇으로 드러내셨는가? 정려문을 세우게 하셨도다. 추서(追敍)의 은전이 크게 갖추어지자, 그 영예가 저 세상까지 뻗쳤도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가? 6년이 흘렀을 뿐이로다. 누가 하늘은 반드시 천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말하는가? 충성을 하고자 하는 이 있다면, 오히려 의당 힘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풍비(豐碑)가 우뚝하게 적성(赤城)의 언덕에 섰도다. 시(詩)를 지어 깊이 새겨 무한히 비추게 하도다.
(초계정씨선무랑공종친회에서 인용)
참고-경기대학교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 ≪한국의 경기지역 서원≫, 국학자료원, 2004.
기전문화재연구원, ≪일반동산문화재(다량소장처실태조사 학술용역보고서)≫,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