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다시 오사카인근으로 백제의 향기를 찾아갔다. 오사카부의 히라카타시에 위치한 백제왕신사에 3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신사라는 표지로 입구문인 도리이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도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신마의 동상이 서있었고 백제왕신사가 보였다.
제신(祭神)으로는 백제국왕과 우두(스사노 미코토)천왕(牛頭天王)을 모시고 있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백제 계통의 씨족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은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선광(善光)의 증손인 경복(敬福)이 백제에서 이주하여 살던 난파(難波)에서 그의 씨족을 이끌고 다시 옮겨 살며 번창을 누렸던 지역이다. 이 신사도 그들의 조상을 모신 곳으로서 그들이 세운 백제왕씨(百濟王氏)의 씨족신사로 추정된다. 신사 옆에는 백제사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백제사터의 안내도를 살펴보니 호류지의 구조와 같다고 한다. 두번의 화재로 지금은 공터로만 남아있지만 그 중요성은 인정되어 오사카부의 2개 뿐인 특별사적지로 지정된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겠다. 참고로 또 하나의 특별사적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이다. 백제왕신사를 떠나 우리는 왕인박사를 만나러 갔다. 얼마 떨어지지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몇년전에 새로이 정비를 하여 그나마 말끔한 모습이었다. 특히 단청이 아름다운 백제문은 인상적이었으며 단청의 무궁화꽃이 이채롭다. 왕인박사의 고향인 영암군에서많은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영암에는 왕인박사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 있다. 기회가 되면 이 곳도 한번 다녀오는 것도 좋을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왕인박사묘에 참배를 하고 백제문 앞에서 인증 샷을 하였다. 다시 버스로 교토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였다. 버스가 갈 수 있는 곳 까지 가서 우리는 내려서 식당까지 걸어 갔다. 식당은 7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를 무리하게(16명)탑승하여 6층에서 이상증세가 발생하여 겁이 나서 6층에서 내렸다.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건너편 엘리베이터를 갈아 타고 7층으로 올라 갔다. 오는 날 점심으로 먹었던 고기 뷔페처럼 무한리필 고기를 구워 먹는 집이었다. 역시 이런 곳은 별로인것 같다. 저녁식사 후 시내구경을 할 팀은 시내구경을 하고 걸어서 호텔로 왔고 우리는 버스로 바로 호텔에 와서 쉬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올때 염려했던 태풍의 진로가 부산쪽으로 향해 부산에서 비행기가 결항을 하게 되어 우리의 다음날 일정을 바꾸어야할 형편이란다. 그나마 12시 30분 비행기로 우리를 부산으로 태워다 준다고 하여 오전에 오사카성만 보고 부산으로 가는 걸로 결정했다. 아쉽지만 기상변동이 우리의 발목을 잡으니 어쩔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으로 경로가 변경되거나 빨리 빠져나가 예정대로 일정을 소화할 수 있기를 빌어 볼 뿐이다.
백제왕신사로 들어 가는 길
이 풀밭이 백제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백제왕신사 입구를 나타내는 도리이
신마
백제왕신사
제신(祭神)으로는 백제국왕과 우두(스사노 미코토)천왕(牛頭天王)을 모시고 있다. 이 신사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같은 지역의 서방사(西方寺)에 보전되어 있는 「백제왕영사묘유래기(百濟王靈祠廟由來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737년 3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직계 후손 남전(南典)은 종삼위(從三位)라는 관직에 올랐지만 병에 걸려 같은 해 9월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세이무왕(聖武王)은 백제왕사묘(百濟王祠廟) 및 백제의 사찰을
주큐(中宮)에 건립하도록 명하여 백제왕씨족의 선조 영(靈)을그곳에다 안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 신사는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았던 백제 계통의 씨족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은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선광(善光)의 증손인 경복(敬福)이 백제에서 이주하여 살던 난파(難波)에서 그의 씨족을 이끌고 다시 옮겨 살며 번창을 누렸던 지역이다.
위의 남전은 경복의 숙부에 해당하는 인물이라 한다.
그들은 또 이곳에 그들의 씨족사찰인 백제사(百濟寺)도 건립하였으며,
또 “백제왕들은 나의 외척(外戚)이다.”라고 간무왕(桓武王)이 말할 만큼 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신사도 반드시 그들의 조상을 모신 곳으로서
그들이 세운 백제왕씨(百濟王氏)의 씨족신사로 추정된다.
옛 백제사터의 모습
남대문을 지나 중문을 통과하여 절집으로 들어오면 동 서로 두개의 탑이 서있고
가운데에 금당이 있으며 금당 뒤에 강당이 서있는 배치도의 모습이다.
서쪽편에 백제왕신사가 있다. 이 것이 일본의 '신습불합' 즉 불교 절 안에 신사를 세움으로써 서로 싸우지 말라는뜻이라고 한다.
서탑이 있던 곳
금당이 있던 곳
동탑이 있던 곳
중문이 있던 곳
이 풀
주춧돌이 남아 있다.
전 왕인박사묘로 들어 가는 문
지붕의 단청이 아름 답다. 무궁화가 이채롭다.
2006년 10월 이 곳 묘소에 백제학자 왕인 박사를 기리는 ‘백제문(百濟門)’이 세워졌는데
사단법인 한일문화친선협회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기부금 2억3000만원을 모아 세운 것이다. ‘백제문’은 높이 5m, 폭 6m, 너비 1.8m 규모의 단층으로 이뤄졌다. 목재나 기자재는 한국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며
전문 목수 10명이 전남 영암군에 있는 왕인묘를 바탕으로 건립하였다.
왕인박사초상화
왕인박사묘
오사카부 히라가타시(大阪府 枋方市)에 위치해 있으며
백제의 학자 왕인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다.
백제학자 왕인(王仁) 박사는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 백제의 문화를 전해 일본의 아스카 문화(飛鳥文化)와 나라문화(奈良文化)의 토대를 만들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백제인 왕인 박사는 오진천황(應神天皇) 15년에 아직기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
왕인 박사는 지금도 일본문화의 은인으로 많은 일본인에게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또 그의 후손들도 일본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왕인 묘는 1731년 묘소가 고증되어 묘역이 다듬어졌다.
또 옛날의 나니와(難波) 땅에서 왕인 박사의 권유로
닌토쿠천황(仁德天皇)이 405년에 등극했다 하여 메이지 정부는 1905년,
인덕천황 나니와궁(難波宮) 천도 1500년 기념제로 왕인묘 주변을 확장했다.
왕인 묘소가 오사카의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1938년.
이후 1984년 ‘제1회 왕인박사축제’가 열리기 시작했고 무궁화 동산도 조성되었다.
또 1985년에 ‘왕인박사묘를 지키는 회’가 발족됐으며 1988년에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묘역환경 정화사업이 이뤄졌다.
영암군수의 기념식수
왕인 박사가 가르친 논어의 일부
왕인박사가 일본에 전해준 천자문
왕인박사묘의 백제문 앞에서
작은 공간에도 차한대가 들어 갈 수 있는 주차장이 확보되어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일본인들의 생각이다.
우리 나라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우리는 큰 저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담벼락 밑에 차를 주차하는 행위는 법으로라도 금지해야 될 일이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고기뷔페는 7층이다
고기뷔페
어둠이 내리는 강변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교토시민들
다리 위에서